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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 유학자들

호남의 유학자들

  • 안진오
  • |
  • 전남대학교출판부
  • |
  • 2016-01-11 출간
  • |
  • 855페이지
  • |
  • 152 X 225 mm /1228g
  • |
  • ISBN 9788968492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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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이 책은 전남대 철학연구교육센터에서 편찬 중인 ‘호남유학총서’ 시리즈의 두 번째 권이다. 이 시리즈는 고(故) 현암(玄庵) 이을호(李乙浩) 선생의 정신적 유산을 이어받아 지역학으로서 호남학의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한 철학, 사상적 기초를 제공하려는 의도에서 기획되었다.
시리즈의 첫 권인 『19세기 호남유학의 재구성』(전남대출판부, 2015)은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을 중심으로 하는 노사학파의 개괄적 양상을 탐구한 것이었다. 이 책은 『호남의 유학자들』이란 제목으로 호남 지역을 대표하는 유학자들을 총괄적으로 소개한다.
호남의 유학자들이 호남의 사상적, 경제적, 문화적 토양에서 배양한 의리정신과 실학사상은 기호학ㆍ영남학과 차별화된 호남학(湖南學)의 정립 가능성을 시사한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에게 남겨진 학문적 책무는 호남의 사상가들이 정초한 주체적이고 독창적인 사유의 세계를 한국의 근현대사와 접목시켜 새로운 맥락에서 정리하여 호남학으로 재정립하는 것이다. 이 책은 바로 현대의 호남학을 정립하는 데 디딤돌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

책속으로 추가

첫째, 인륜의 대원을 우주의 질서로부터 찾아야 한다는 주장은 당시 성리학의 토착화 시기에 있어서의 학문적 경향을 말하는 것으로서, 윤리적으로는 나의 행위가 우주의 원리와 일치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전제로 한 것으로 “천지와 함께 함”의 경지를 실현한다는 생각에 근거한 것이니, 이는 우주의 질서를 현실에 적응시켜야 한다는 그의 학문관을 엿볼 수 있는 것이요,
둘째로는 의리를 행하려는 이 상소로 인하여 당시의 집권층인 훈구대신에 대한 공격은 신진사류의 의도를 반영한 것으로서, 이로부터 소위 사림파(士林派)를 형성하게 된 동기가 되었고, 가까이는 기묘사화의 기폭제가 되었다.
셋째, 국가의 기강은 정의를 정통성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요, 정의를 떠난 어떤 권력이나 집권세력도 이를 용서할 수 없다는 그의 생각은 사림사상 이후의 조선조의 사상계에 많은 영향을 준 점이라 하겠다. 그러면 이러한 신비복위소(愼妃復位疏)에 대하여 당시 사림들과 훈신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으며, 어떤 입장으로서 이 사건을 해결하려 하였을까? 이 상소가 조정의 대신들 사이에 어떻게 받아들여졌는가? 대사헌 권민수, 대사간 이행 등은 말하기를,

담양부사 박상, 순창군수 김정은 상소에서 감히 사특한 의논을 발했으니, 놀랄만한 일입니다. 붙잡아다가 하옥하고 추문하기를 청합니다. 이 두 사람은 무식한 자도 아니요, 문자를 좀 안다는 사람인데도 이와 같으니 반드시 그 뜻이 있을 것입니다. 신 등이 근래 시관(試官)에 들어갔다가 오늘에야 이를 들었기에 아뢰는 것입니다. 소장을 대궐에 보관하지 말고 속히 대관들에게 보여 아랫사람들이 주상의 뜻을 분명히 알도록 해야 합니다.

고 하였으니 이 말은 당시의 대사헌 권민수(權敏手), 대사간 이행(李荇), 집의 허지(許遲), 사간 김내문(金乃文), 장령 김영(金瑛), 지평 채침(蔡枕) 등이 한 말이다. 이는 박상, 김정 등이 사의를 발하였으니 붙잡아다가 하옥하고 추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견을 듣고 이에 대한 사신은 객관적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사신이 말하기를,

이행이 먼저 발의하여 말하기를 “박상 등이 이런 사특한 의논을 말하고 있으니 추문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거기에 따른 것이다. 이행의 뜻은 대개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원자를 낳고 승하했으니 곤위(坤位)가 비었더라도 국본은 정해진 것이다. 다시 신씨를 복위시키면 신씨가 앞이요, 장경왕후가 뒤가 되는데, 그렇게 되면 국본이 동요된다’는 것을 우려한 것이었다. 헌납 유돈(柳墩)이 홀로 그렇지 않다고 반대했는데, 그의 뜻은 대개 ‘상소했다 하여 붙잡아다 추문을 한다면 언로를 방해할 염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신비복위상소는 당시의 사림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이 경우 상ㆍ정의 뜻을 옹호하고 훈신들을 공격하는 사림의 태도는 단순한 공감이나 동류의식이라 보기 어렵고 정의와 진리를 수호하는 신념으로 보인다. 특히 정암의 청파양사계(請罷兩司啓)는 구대신들이 항상 주장한 종사보호라는 명분론 밑에 도사린 자기 권력의 유지라는 실체를 드러내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이 사림의 정신은 정몽주의 사상을 이은 것이었다. 단순한 그 시대의 산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배경을 기초로 하여 성숙한 것이었다. 이 정신은 위로는 정몽주를 잇고 아래로는 진리의 근원을 천리(天理)에서 찾으려는 올바른 학문관을 심었으니, 조선조에 있어서 전성기의 성리학자들의 학문관에 올바로 수용되었던 것이다.
박상이 청복고비신씨소를 올린 지 229년 후, 즉 조광조가 죽음을 당한지 225년 후, 이재(李縡 1680-1747)는 이 역사적인 상소를 기념하기 위하여 삼인대를 세우고 비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아아 이 대는 바위와 시내의 좋은 경치 있어, 고금에 걸쳐 퍽 많은 고관대작들이 다녀갔지만, 그들은 모두다 안개나 구름이 눈을 스쳐가듯 하여 버리고, 오직 세 선생의 풍모만이 늠름하게 죽지 않고 전해지는 것은, 군신과 부자의 윤상(倫常)이 하늘과 땅의 변함 없음과 같이 만세토록 살아있는 때문이 아닌가 ……. 선생들의 의논이 한 때 굽혀지기는 했지만, 마침내는 백년 후에 펴지게 되었다. 하늘이 정한 것이 인위적인 것을 이긴다는 것은 분명하다 할 것이다. 시비가 이미 확고하게 정해졌으니 저 훈신이라는 자들이 그래도 평안하게 종형되는 차례에 끼어 있을 수 있겠는가. 우둔한 나는 이 일에서 더욱 윤상을 지키고 덕을 좋아하는 마음이 사람마다 다 갖추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박상이 생존해 있던 1500년대 이전까지는 비교적 학문의 연구가 자유스러웠으니, 노장(老莊)이나 불교에 대하여도 퍽 관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자학 만을 주장하던 이황(李滉 1501-1570)의 영향, 특히 그의 전습록변이 쓰여진 1566년(퇴계 66세) 이전까지는 소위 이단(異端)의 논쟁이 엄격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있어서는 김안국(1478-1543)도 상산집(象山集)을 인출하기도 하였고, 눌재 역시 노ㆍ불ㆍ양명에 대하여 철저히 이단이라고 배척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의 시ㆍ부 가운데는 도가적 사고가 많이 나타나고 있으니, 그의 황종부에 “아득한 옛날 태초에는 고요하고 이름도 없고 소리도 없었다.” 라는 말은 도가사상이 짙게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의 시 가운데는 장자를 인용한 부분이 많이 발견된다. 또한 그는 불교에 대하여도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그의 시문 속에는 당시의 많은 도학자들이 그랬듯이 산사를 주제로 하여 읊은 시들이 산견되고 있다.
그의 학문에 있어서는 정주학자들이 우주의 추서(推序)를 법(본)받아 인간행위로 발견함을 최고의 이상과 목표로 여기었다고 할 때, 그가 실천한 입신(立身) 행의(行義)는 이러한 윤리적 덕목을 실현하였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조선조 초기 정주학의 토착화 과정에서 보인 학문적 경향은 특히 사림학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절의적(節義的) 성격이 두드러지는데, 이러한 사상의 형성이 눌재의 행의와 연관, 또는 연원을 갖는다고 할 때, 그의 인도정신의 실천은 그의 도학자적 면모를 보여준다 하겠다.

3) 사상적 의의

다음으로는 박상이 그 주변과 그 제자들의 학문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는 박상 문하 제생의 학문적 성격과 행의가 될 것이니, 지역적으로는 호남지역의 학문적 특성이 될 것이다. 박상은 어려서 큰형 정(禎)에게 수학하였는데, 김종직(金宗直 1431-1492)과 깊은 관계를 맺고 많은 지도를 받은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동생 우(祐)는 곧 박순(淳 1523-1589)의 아버지이다. 박상의 문하에서 임억령(1496-1568), 송순(1493-1583), 정만종 등이 직접 사사하였지만, 간접적으로는 기묘사림과 뜻을 같이 한 기준(奇遵 1492-1521)의 참화로 그의 조카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이 광주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 또한 기묘명현의 한분인 고운의 손자가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이며, 송순(宋純)의 문하에서 정철(鄭澈 1536-1593)이 배출되었다. 이렇게 볼 때 박상 이후의 사상적 특징은 성리학, 문학, 춘추사상의 세 가지 두드러진 성격을 보이면서 전개되어 갔다고 보인다. 이러한 사상적인 변천은 각기 조금씩 다른 형태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 근원적 배경으로서의 주체는, 사림들이 추구하였던 인도의 실현을 목표로 한 도학사상이었다. 그러므로 도학사상(道學思想)의 발전이 곧 이 세 가지 특징으로 성숙되어 나갔다고 보이며, 특히 호남 유학에서는 더욱 두드러진 면이 발견된다 할 수 있다.
첫째, 성리학의 발전은 우리가 흔히 조선조의 사상을 도학 성리학이라는 발전적 맥락으로 여겨왔거니와, 이를 사림사상과 연관지어 볼 때, 사상적 영향은 물론 혈연, 지연, 환경 등의 여건에서 이러한 발전적 계기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고봉의 사상적 배경과 연원으로 보아서도 분명하다 하겠다.
둘째, 문학 사상으로서의 발전이라 볼 수 있는데, 박상의 사림정신은 송순에 이어지고 송순의 문학과 사상은 정철에 의하여 꽃피워지니, 이들의 문학 세계가 도학 정신으로부터 발전하고 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겠고, 시인 박상의 문학은 그 기개와 아름다움이 성당(盛唐)과 맞설만하고, 문장은 서경(西京)에 맞설 수 있다고 할 때, 그의 문학은 송순, 정철에 의하여 조선조 가사 문학으로 토착화되었다고 볼 수 있으니, 이는 중국의 송학이 도학의 시기를 거쳐 조선조의 성리학으로 발전한 것과 그 성격적 궤를 같이한다 하겠다.
셋째로, 사림의 절의정신은 정의와 진리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 진리를 정통으로 옹호하는 것은, 불의의 난신적자를 몰아내는 춘추정신과 상통한다. 박상이 대신들을 향하여 “춘추의 뜻이란 이런 무리를 위한 것이다.”라고 한 것도 모두 정의를 수호하려는 생각이며, 이러한 정의를 정통으로 할 때 국가 민족도 정의로와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국가를 위하여 희생할 수 있다는 신념은 진리를 위하여 희생할 수 있다는 소신의 발로인 것이다. 이러한 춘추정신은 고경명에 의하여 분명히 밝혀지고 있다. 고경명의 정신 또한 사림정신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은 앞서 지적하였거니와, 이는 춘추 정신의 실천이라는 점에서 호남유학의 특징을 나타낸다 하겠다.
이렇게 볼 때, 기대승의 학문은 조선조 성리학의 전성기를 장식하였으며 송순ㆍ정철의 문학은 조선조 가사 문학의 최고봉을 이루었고, 고경명의 절의는 국난을 극복하는 춘추정신으로 꽃피웠으니, 이는 박상과 더불어 이루어진 호남유학의 특징이라기보다는 조선조 유학의 발전이라 할 수 있겠으며 그렇기 때문에 박상의 학문과 업적은 매우 뜻깊은 의의를 갖는다 하겠다.

4) 원문 번역

이 글은 1515년 박상이 42세 때 담양부사로 있으면서, 순창군수 김정(金淨)과 더불어 중종반정 당시 중종의 본부인이었던 신비(愼妃)를 복위시킬 것을 청한 상소문이다.
1506년 유순정(柳順汀)ㆍ성희안(成希顔) 등이 연산군을 몰아내는 반정(反正)계획을 세우고 강귀손(姜貴孫)을 시켜 당시 좌의정이었던 신수근(愼守勤)을 보내 반정에 가담할 것을 은밀히 요청하였다. 이 때 신수근의 여동생이 연산군의 비(妃)였고 진성대군이 사위였으므로 “매부를 폐위하고 사위를 왕으로 추대하는 일인데 무어라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박원종 등이 훈련원에 모여 신수근에게 왕명이라 거짓으로 불러들여 창덕궁 하마비(下馬碑) 앞에서 살해하였다. 그리고는 중종반정을 일으켜 진성대군을 임금으로 추대하고 그 때 진성대군의 부인이었던 신씨(愼氏)를 비(妃)로 책봉하여 궁중으로 들게 하고 모든 벼슬아치의 하례를 받게 하여 왕비로 예우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박원종ㆍ유순정ㆍ성희안 등이 이품(二品) 이상을 거느리고 궁궐에 들어가 신수근의 딸을 밖으로 보내도록 강요하였다. 이는 신비(愼妃)의 아버지인 신수근을 죽였으므로 신비(愼妃)의 노여움을 사서 스스로 신변이 위태로울 것을 걱정하여 자기들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였다. 그 후 1507년에 박원종 등이 윤여필(尹汝弼)의 딸로 비(妃)를 삼게 하였으나 8년 만에 원자(元子: 인종)를 낳은 다음 죽고, 여러 후궁 가운데 아들이 있어 동궁을 다투었다. 이렇게 조정이 어려워지고 날씨가 고르지 못하자 임금은 언론을 구하였다. 이 때 박상은 김정과 함께 “원자가 아직 어린데 만약 후궁을 정비(正妃)로 삼게 되면 동궁의 자리가 위험하기 때문에 신씨(愼氏)를 왕비로 책봉하는 것만 못하다”하고 정통성을 세우고 질서를 바로 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이 글을 올린 것이다. 그러나 이는 반정(反正)의 공신들이 교만하고 방약무인하여 사욕을 채우기 위해 국모를 축출하였으니 이를 처벌하고 올바른 의리정신이 발휘되도록 하자는 것이다.
문집 가운데는 이 글이 부록에 실려 있는데 박상의 의리정신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청복고비신씨소 請復古妃愼氏疏
담양부사 신(臣) 박상과 순창군수 신 김정 등은 주상전하께 말씀드립니다. 엎디어 생각하옵건대 제왕이 하늘의 뜻을 받들어 군주의 자리에 오르는 방법치고 처음을 바로 잡는 것으로 근본을 삼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발단을 만들어 처음을 굳히는 것이 바른데서 나오면 큰 벼리와 큰 근원이 법도가 정연하게 위에서 빛나고 움직여서 온갖 일과 온갖 가르침에 미쳐가는 것이 그림자가 몸에 따라다니는 것 같고 메아리가 소리에 호응하는 것 같아서 어디에 가도 합치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됩니다. 이와 반대되게 하고서 교화가 이룩되기를 바라는 것은 마치 그 근원을 흐려놓고서 흐름이 맑기를 바라는 것 같으니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역경에 이르기를

하늘과 땅이 생긴 연후에 만물이 생기고, 만물이 생긴 연후에 남녀가 생기고, 남녀가 생긴 연후에 부부가 생기고, 부부가 생긴 연후에 부자가 생기고, 부자가 생긴 연후에 군신이 생기고, 군신이 생긴 연후에 상하가 생기고, 상하가 생긴 연후에 예의가 적용될 데가 생긴다.

라고 하였습니다. 시경의 대서에 이르기를

주남과 소남은 처음을 바로잡는 도리이고 왕자의 교화의 기본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역경은 건과 곤을 첫머리에 내놓았고 시경은 관저(關雎)편부터 시작되어 있습니다. 배필을 맞이하는 것은 인륜의 시작이고 온갖 가르침의 근원이고 기강의 첫머리이고 왕도의 큰 발단입니다. 노나라 애공이 공자에게

면류관을 쓰고 친히 아내를 맞이하는 것은 그 ‘예’가 과중하지 않습니까?

하고 묻자 공자는 자세를 가다듬고 정색을 하고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이성의 좋은 사이를 합쳐 선대 성군의 뒤를 이어서 천지와 종묘와 사직의 주인이 되는데 임금께서는 어떻게 과중하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제환공의 규구에서의 회명 첫 조목이 “첩으로 처를 삼지 말라” 하였습니다.

성인이 자세를 가다듬고 정색을 한 것은 애공이 천지와 종묘와 사직의 주인을 소홀하게 여겨 그 예를 무시해서 그 때문에 한심해져서가 아니었겠습니까? 환공은 패자였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배필의 소중함은 알 수 있어서 그 분수를 어기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다 진실로 발단을 만들어 처음을 굳히는 도리가 왕자로서 신중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였던 것입니다.
옛날 주의 가문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 태왕과 왕계와 문왕은 다 성덕을 지녀 가문을 다스리는 도리를 잘 해낼 수 있어서 예법을 문란하게 하지 않아 대대로 현숙한 왕비를 얻어가지고 인륜의 근본을 바로잡고 왕자의 교화의 근본을 밝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나라 사람의 시에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옛 임금 단보는 일찍이 와서 말을 달렸다. 서쪽 물가를 따라 기산 아래에 당도하였다. 그리고는 강씨네 딸과 함께 몸소 와서 살 곳을 살폈다.

그 뜻은 태왕은 적인의 환난이 황급하였을 때에도 돈독한 은애를 어기지 않고 왕통의 기초를 잡아놓았다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조신하오신 태임은 문왕의 어머니로 주강을 사랑하길 생각하여 왕실의 며느리 노릇하였다.

그 뜻은 왕계는 이러한 조신하고 유덕한 배필이 있어 주강(태왕비)에게 며느리의 도리를 다해 주실의 며느리가 되는데 부족함이 없어 자손에게 복된 근원을 길러놓았다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점괘로 그 길일을 정하여 몸소 위수에서 맞이하였다. 배를 만들어 다리를 놓으니 그윽한 곳에서도 빛이 들어났다.

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조종의 신령에 순종하여서 신령은 원한 없고 신령은 고통 없다. 큰 마누라를 올바로 대하고 형제에까지 그렇게 하여서 집안과 나라를 다스리도다.

서론

이 책은 전남대 철학연구교육센터에서 편찬 중인 ‘호남유학총서’ 시리즈의 두 번째 권이다. 이 시리즈는 고(故) 현암(玄庵) 이을호(李乙浩) 선생의 정신적 유산을 이어받아 지역학으로서 호남학의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한 철학, 사상적 기초를 제공하려는 의도에서 기획되었다.
시리즈의 첫 권인 『19세기 호남유학의 재구성』(전남대출판부, 2015)은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을 중심으로 하는 노사학파의 개괄적 양상을 탐구한 것이었다. 이 책은 『호남의 유학자들』이란 제목으로 호남 지역을 대표하는 유학자들을 총괄적으로 소개하려는 것이다.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던 다양한 학자들을 호남의 유학자라고 명명(命名)할 때 연관된 몇 가지 전제들이 문제시된다. 첫째, 호남 유학사상의 상한선은 어디까지인가? 또한 호남이라는 명칭과 그 명칭이 가리키는 지역적 한계를 어디까지 적용할 것인가? 이를테면 삼국시대에 진한의 지역에서 흥기하였던 초기 백제의 문화와 오늘의 호남이라는 지역의 연관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초기 백제 문화는 역사적, 지역적으로 오늘날의 호남과 일치한다고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백제의 문화와 사상을 떠나서는 호남의 사상적 모태를 설정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점을 어떻게 고려해야 할 것인가?
둘째, 유학사상의 개념을 어떻게 볼 것인가? 유학과 유교는 같다고 할 수 없고 원시유학과 신유학(新儒學)으로서 정주학(程朱學)의 사상적 성격이 다르며, 또한 실학적 사유는 신유학적 사유와 차별적이다. 이런 다양한 유학의 개념들과 호남유학이란 지역학적 용어는 또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는가? 한편, 유교라고 할 때는 의식이나 정신적 형태까지를 포함한 종교적 성격을 가지는데, 이러한 요소를 호남의 유학으로 포함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도 제기될 수 있다. 나아가 문헌적 근거가 확실하지 않은 원시유학사상의 전래와 도교ㆍ불교와의 교섭관계는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필연적으로 제기될 수밖에 없다.
셋째, 호남 유학사상의 지역적 한계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 호남이라고 할 때의 지역적 한계는 행정구역으로 볼 때 오늘날의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논의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행정구역으로서 호남이 성립되기 이전에 호남의 사상은 이미 존재했다. 이에 대한 한계 설정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것 또한 문제 가운데 하나다. 이와 같은 문제점들을 고려해서 이 책을 서술해나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그 한계에 대한 잠정적인 기준이 요구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준을 임시로 설정하고자 한다.
호남 유학사상의 기점은 유학사상가들의 저술이 문헌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시기로 설정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대체적으로 독자적 저술이 문헌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시기는 고려 말엽부터라 할 수 있고 그 이전의 저술들은 손꼽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여러 사서(史書)에 부분적인 기록들이 남아있지만 독자적인 저서로 보기에는 힘들다.
유학이란 하나의 학문적 이론이며 사상적 형태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나 의식이 아니라 구체적인 논리와 사상을 담고 있을 때 학문으로서의 성격을 부여할 수가 있다. 그러한 점에서 유학자의 사상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고 그 사상이 유학이라고 인정되어질 때 유학사상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호남 유학사상의 기점은 독자적 저술이 이루어진 시기를 그 기점으로 한정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 이전의 유학사상, 즉 다른 기록에 나타난 유학정신은 어떻게 취급되어져야 할 것인가? 그것은 유학사상의 형성기로 취급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형성기를 모체로 하여 호남의 유학사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성립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백제의 유학적 특징이 아무리 찬란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백제의 유학이지 호남의 유학사상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그러한 점에서 백제의 유학은 호남의 유학사상을 형성하는 밑바탕이 되었으리라고 보는 것이며 백제의 유학 자체가 호남의 유학사상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대체적으로 조선조의 유학이 하나의 독자적 사상으로 형성되어진 것은 신유학(新儒學), 이른바 정주학(程朱學)이 수입되고 난 이후부터이다. 물론 정주학의 학문적 성격에 관한 논의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지만 어떻거나 조선조의 유학사상은 신유학사상 수입 이전의 원시유학 사상의 완전한 사상적 형태를 찾아보기 어렵다. 흔히 신라의 학제나 고구려의 교육기관이나 백제의 왕인이 『논어』를 일본에 전했다는 기록들은 그 당시의 유학사상을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자료는 될 수 있을지라도 하나의 이론과 체제를 이루는 독자적 유학사상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점에서 호남의 유학사상은 조선조 초기 광주라는 행정구역이 정립되던 시기로부터 광주를 중심으로 하는 호남지역에서 배출한 유학사상가들이 스스로 독자적인 저술을 통하여 유학적 공헌을 남긴 구체적 문집과 문헌들을 통하여 증명할 수 있는 인물로부터 그 기점이 성립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광주의 건치(建置) 연혁에서부터 논의를 전개할 수 있다. 고려 태조 19년에 처음으로 광주로 개칭한 기록이 보이고, 그 후로는 다른 이름으로 불려오다가 공민왕 22년에 다시 광주로 고쳐 불렀고, 조선조에 이르러서도 그대로 불렸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광주라는 지명이 고려 말부터 조선조 초기에 이르기까지 쓰이기 시작하였다고 본다면, 광주라는 지명의 성립 시기는 정주학의 수입 및 발전기와 대략적으로 어울리게 된다. 다만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광주의 개념을 하나의 사상적 문화권으로 이해한다면 광주권(光州圈)은 광주라는 지역과는 달라질 수 있다. 그것은 사승(師承)의 계승성과 유학사상의 공통적 사고(思考)로 인한 인물군(人物群)을 연상한다면 광주지역의 행정구역과는 또 다른 문제가 제기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본고는 대체적으로 광주권이라 할 때 광주와 인접한 일차적 공간권(空間圈)으로서 광주 주변의 인접지역과 사상적으로 연결되는 이차적 유학사상권을 생각하였다. 이러한 기준은 자칫 애매모호(曖昧模糊)할 수도 있지만 광주권이라고 할 때 그 한계는 유학사상권(儒學思想圈)의 기준으로 설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준에는 또한 유학사상 자체가 여러 가지 특징을 나타내며 발전하여 왔다는 점에서 본다면 문제가 있게 된다. 이를테면 도학, 성리학, 실학사상의 특징에 따라서 그 사상적 특징과 지역적 구성이 조금씩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 사상권(思想圈)으로 본다면 행정구역상의 광주권을 벗어날 수도 있다는 점을 당연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 호남 유학사상의 전기(前期)

호남 유학사상의 모태를 상기할 때, 우선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백제의 유학정신이다. 삼국시대에 이미 유학이 수입되어 백제는 물론 고구려, 신라의 문화와 사상, 가치관과 풍습 등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학사상의 정확한 전제나 시원(始源)에 대하여는 확실한 기록이 없다. 다만 중국의 여러 사서(史書)들을 통하여 삼국시대의 유학사상의 한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을 뿐이다. 『북사(北史)』 「백제전(百濟傳)」이라든지 『수사(隋史)』 「백제전」의 기록에 따르면, 서로 만나고 헤어질 때 또는 윗사람을 대할 때 예(禮)를 행한다는 기록이 있고, 또한 그 풍습이 말 타기를 잘하고 글씨를 잘 썼다는 사실들에 의거하면 일찍부터 유학사상이 발전하였을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백제에서 유학사상이 발전하였다는 근거는 구체적으로 왕인(王仁)의 업적과 공헌을 먼저 들어야 할 것이다. 백제는 일찍부터 해상무역이 발전하여 일본과 중국의 교통의 요지가 되었고 산동 반도와 지역적으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산동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공자의 가르침인 유학사상이 해상 루트를 통하여 쉽게 백제에 전달되고, 또한 백제에서 쉽게 왜(倭)에 전달되었으리라는 사실을 우리는 단순한 추리로도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신라는 물론 백제에서도 수많은 입당 유학생들이 있었고, 백제에서 사신과 문물을 보내 일본의 개화에 이바지하였던 사실이 이를 밑받침하고 있다. 왕인이 『논어』와 『천자문』을 일본에 전달했다는 일본의 사료들은 백제의 유학사상이 먼저 발전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왕인의 정확한 출생지나 그의 생애(生涯)에 관한 구체적 기록을 찾을 수 없는 것이 한스러운 일이나 오늘날 일본과 우리의 사료에 나타난 사실만으로도 왕인의 유학적 업적은 높이 칠수 있을 것이다. 또한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단순히 논어와 천자문의 전달만이 아니라 천문, 역법, 산학, 지리서 등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사용될 수 있는 유학적 저술들이 함께 전달되었음을 볼 때, 백제 스스로 높은 유학적 지식과 안목을 가지고 많은 저술과 업적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며, 단순한 중국유학의 전파 경로에 불과 하지 않고 백제의 문화와 의식 속에서 이를 창조하고 소화하여 일본에 전달하였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백제시대에 벌써 유학의 기본적인 학문과 수준은 높은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삼국의 통일 이후 고려시대에 있어서는 호남지역을 대표 할 수 있는 특이한 사상가를 발견하기 힘들다.
일반적으로 유학사(儒學史)에서는 정주학(程朱學) 전래 이전의 유학사상에 대하여는 개인의 사상이라든가 유학적 특징을 인물사(人物史)로 다루기보다는 통사(通史)로서 학풍ㆍ제도 등을 통하여 유학적 특징을 살피고 있다.
이병도의 『한국 유학사』에서는 삼국시대의 유학으로 고구려에서는 ‘한자 사용, 태학, 예속(禮俗), 유ㆍ불ㆍ도(儒佛道) 삼교의 소장(消長)’으로, 백제에서는 ‘유교문화와 일본에의 문화전파’로, 그리고 통일 신라에서는 ‘화랑도의 특징, 세속오계,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으로 설명하고 있다. 고려시대의 유학은 ‘훈요십조, 최승로의 시무책, 관학과 과거제도’ 그리고 송학(宋學)의 전래 이후부터 비로소 인물과 사상을 소개하고 있다.
현상윤은 안유(安裕) 이전의 유학자로서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 최충(崔沖) 세 사람을 들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대체적으로 한국유학사에서 신유학이 수입되기 이전에 있어서 호남과 인연을 가진 인물을 찾아내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다만 현상윤이 조선유학사에서 지적한 최치원은 전북 태인지방의 태수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고 지금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이 그를 배향하기 위한 서원으로서 대원군의 서원 철폐에도 화를 면하였던 서원으로 보존되어 있음을 상기한다면 최치원의 유학사상과 호남이 차지하는 비중을 높이 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대체적으로 한국유학사에서 신유학(新儒學) 도입기 이전의 유학자들이 이와 같다고 기록하고 있다면, 호남권과 그리고 호남권을 중심으로 한 유학사상가들은 누구를 손꼽을 수 있을 것인가?
『광주읍지』에 기록된 바로는 조선시대 이전의 인물로서 21명을 들고 있는데 김양감(金良鑑)을 맨 먼저 들고 있다. 김양감은 고려 문종(文宗 재위 1046-1082) 때 사람이다. 신유학의 전래가 충열왕 때 안향(安珦)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면 김양감은 그보다 2백년이 앞선 인물이다. 김양감이 호남지역 최초의 유학자로서 일컬어지고 있는 것은 『광주읍지』에서 뿐만 아니라 호남의 『인물지』나 『호남지』 등 지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문헌 거의에서 그를 최초의 인물이며 유학자로 지목하고 있다. 읍지의 기록에 따르면 “김양감은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사공(司公) 길(吉)의 현손으로서, 1051년에 문과에 오르고 벼슬은 평장사(平章事)를 지냈으며, 1074년에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송나라를 세운 임금의 조상을 모신 사당인 태묘(太廟)의 그림과 국자감의 그림을 그려왔는데 소동파는 시를 지어주었다”고 하고 그 시를 소개하고 있다. 이는 『고려사』의 기록을 인용한 것인데, 여기에서 김양감의 유학자로서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그가 태묘(太廟)와 국자감(國子監)의 그림을 가지고 왔다는 사실과 신유학이 공식으로 전래되기 2백 년 전에 이러한 일들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태묘의 그림을 그려왔다는 것은 제례(祭禮)의 예법을 수입하였음을 말함이요, 국자감의 그림을 그려왔다는 것은 유학의 교육을 배워왔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태묘는 나라의 시조로부터 시조가 나올 수 있도록 한 조상의 위패를 추존하고 시조의 사당에 배향하여 큰 제사를 올리는 곳이다. 그러므로 태묘는 모든 의식과 예절이 나오는 곳으로서 유교의 종교적 의식을 규정하는 곳이다. 이러한 태묘를 그려온 것은 당시 유교의 종교적 내용에 대한 전래를 뜻한다. 단순히 태묘의 외형만 그려오는 일이었다면 이는 무의미한 일이라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의식의 내용이 인식되지 않는 외형의 그림만을 그릴 필요가 있겠는가? 여기에는 분명이 태묘의 제례와 의식의 중요성을 인식하였으므로 태묘의 그림을 그려온 것이 분명한 것이다. 또한 국자감 역시 당시의 유학교육을 전담하던 기구로서 중국의 교육기관과 교육내용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고려의 국자감 제도를 부흥하고자 이를 그려왔음이 분명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김양감을 통하여 고려조에 있어서 송나라의 유학, 곧 신유학(新儒學)의 정신이 의식과 학교 교육으로서 새롭게 전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 시기는 안향(安珦)이 정주학(程朱學)을 수입한 시기보다 2백여 년이 앞선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그러므로 광주의 김양감이 전래한 송나라의 국자감의 교육정신과 태묘의 의식의 내용들은 유학을 종교와 학문의 두 가지 면에서 전해온 것이며, 이는 조선조 유학사에 있어서 커다란 획을 긋는 중요한 사실로 평가 하여야 할 것이다.
김양감의 5대 손자로서 김수(金須)가 있다. 그는 어사(御使)로서 지영광군사(知靈光郡事)로 나가 삼별초를 토벌하다 죽어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증직하였고, 그의 아우 김주정(金周鼎)은 1276년에 16살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고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어 원나라 임금의 생일 하례를 위해 원나라에 갔었다. 임금이 있는 행재소(行在所)까지 가서 임무를 수행하니 원나라 사신들이 이를 칭찬하였다. 김주정의 호는 쾌헌(快軒) 또는 설암(雪庵)이며 광식(光軾)ㆍ광철(光轍)ㆍ광재(光載)ㆍ광로(光輅) 네 아들이 있었다.
김광철(金光轍)은 문과에 오르고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서 기황후(奇皇后)의 친척인 기삼만(奇三萬)을 제거하였다. 광철의 아우 광재는 1313년 문과에 합격하고 전리판서(典理判書)가 되었다. 공민왕 때 효성이 지극하여 명망이 높았으며 왕이 그 사실을 듣고 만나기를 원하였다. 병중에 궁중에 들어가니 왕은 기뻐하고 그가 죽자 정문(旌門)을 세워 효자리(孝子里)라 하였으며 마을의 세금을 면제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 호는 송당(松堂)이다.
광주 읍지에 수록된 조선조 이전의 인물 가운데 고려사에 실린 인물 몇 사람을 소개하면 이와 같다. 이 외에도 정구진(鄭龜晋)ㆍ김약채(金若采)ㆍ김약항(金若恒) 등이 소개되어 있지만 이분들은 실제로 조선조의 개국 이후 인물인데도 고려조의 인물로 소개하고 있어서 생략한다. 『광주 읍지』에는 고려조의 인물 21명 가운데 위에 소개한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 행적이 간단하다. 그러므로 호남의 유학사상가로서 조선조 이전 인물을 든다면 위의 몇 분과 그리고 과거 급제자, 피봉공신(被封功臣) 정도라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제시된 문제점과 소개 인물들이 호남 유학사상의 형성을 위한 전기(前期) 곧 태동기(胎動期)에 해당 한다면, 고려말을 지나 조선조로 접어들면서부터 호남의 유학사상의 형성기(形成期)에 접어든다고 할 것이다.
호남의 유학사상 또한 조선조의 유학사상이라는 큰 흐름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대체적으로 조선조의 유학사상을 도학(道學)사상, 성리학(性理學), 실학(實學), 척사위정(斥邪衛正)과 개화사상(開化思想) 등으로 구분하기로 한다. 이는 대체적으로 조선조 유학사상의 특징에 따른 서술방법이지만 호남 유학사상의 발전적 특징에 따른 서술은 어떤 기준에서 나눌 수 있을 것인가?

2. 호남 유학사상 서술의 편차와 그 방법

이 책은 위에서 소개한 내용을 배경으로 하여 광주지역 및 광주지역과 인접한 광주권을 중심으로 활동한 유학사상가를 총괄적으로 소개하는데 목적을 두고 서술한 것이다. 그러나 광주권과 관계된 유학사상가를 총괄적으로 소개하고자 하는 뜻도 지면의 한계와 자료의 발굴의 한계가 있었다. 그리하여 대체적으로 조선조 유학사상의 발전 과정에 따라서 도학사상, 성리학 사상, 절의사상, 실학사상, 개화사상의 다섯 편으로 구분하여 각 시대적 특징이 나타나도록 편차를 구성하고 내용 또한 광주 유학사상의 특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학문적 특성을 밝혀 서술하였다.
전체적인 책의 규모가 주어진 페이지를 넘을 수 없는 제약이 있으므로 전체적인 원고의 분량 또한 제한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물의 선별이나 소개의 내용도 그 한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한계점이 있다. 그래서 대략 호남지역의 유학자 70명 정도를 소개하되, 큰 인물 20명 정도, 기본인물 30명 정도, 기초적인 인물 20명 정도로 제한하고 한사람 인물마다 배당되는 분량을 각각 100매, 50매, 30매로 하여 소개하기로 하였다. 소개의 내용은 유학자 개개인의 일생의 약전(略傳), 사상적 특질, 유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 학문적 공헌과 영향 등을 밝히고자 하였다.

3. 조선조 유학사에 나타난 호남 유학의 특징

조선조 초기 유학사상의 특징은 주자학의 수용과정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조선왕조의 개국과 함께 대외적으로는 원나라의 멸망과 명나라의 건국이라는 커다란 변동을 맞으면서 고려의 친원정책(親元政策)이 조선의 친명정책으로 변하였으며, 이에 따라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하는 새로운 집권세력이 형성되어가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이다. 또한 고려조에 마지막까지 의리를 지켜 충절 정신을 발휘한 정몽주를 중심한 일파와 신흥 조선왕조의 건국에 적극 참여한 정도전을 중심한 일파가 각각 절의와 참여의 서로 다른 사상적 특징을 나타내면서 대립하는 모습을 나타냈던 것이다. 그러나 유학사상의 근본정신에서 본다면 끝까지 지조를 지키는 절의정신과 상황의 변동에 대처하는 실리(實利)의 정신도 하나의 방법으로서 다 같은 유학의 근본정신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조 유학의 정통성은 정도전의 일파에서 찾아볼 수 있는 실리를 더 높이 평가하기 보다는 정몽주 일파의 의리정신을 더 중요시하여 이를 도통 정맥(正脈)으로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정몽주의 정신을 잇는 의리학자들이 조선조 초기에 이르기까지 같은 연원(淵源)으로서 사승(師承) 관계 또는 부자의 관계를 이루며 발전해왔던 것이다.
이 계통의 인맥을 살펴보면 정몽주(鄭夢周 1337-1392)의 문도에서 길재(吉再 1353-1419)가 배출되었으며, 길재의 문도(門徒)중에 김숙자(金叔滋 1389-1456)가 있었고 김숙자의 아들이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며, 김종직의 문하에서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이 배출되었다. 조광조(趙光祖 1482-1519)가 김굉필에게서 배웠으니 조광조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도통은 한 줄기와 가지로서 가지런하게 계승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조광조에 이르러서는 정몽주처럼 고려조에 충성하고 조선조를 따를 수 없다는 소외의식이 없어지고 정몽주의 충절정신은 의리를 숭상하고 정의를 실현하려는 도학정신으로 승화하여 현실 정권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정신과 행동을 일치시키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호남의 유학사상에 대한 검토는 이와 같은 조선조 유학사상의 정통성에서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으며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 하는 점을 찾아야 할 것이다. 곧 조선조 유학사상이라는 보편적 정신 속에서 호남의 유학사상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개별성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살펴본다면 호남의 유학적 특징은 조선조의 유학사상의 특징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많은 기여와 공헌을 하였고, 광주를 중심으로 한 호남권의 유학사상이 하나의 사상적 전통을 이룩하면서 하나의 맥을 이어 오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사상적 독자성을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하나의 학파와 하나의 사승(師承) 관계를 형성하여 다른 지역의 사상적 특징과 다른 모습을 나타내면서 발전해 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독창성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며 독창성은 조선조 유학사의 특징이 되었다고 규정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도학사상, 성리학, 절의사상, 실학사상, 후기성리학 등의 순서로 설명하기로 한다.
‘도학사상의 발전과 광주의 인물’이라는 첫 편은 조선조 초기 도학사상의 발전기에 있어서 호남의 유학사상은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조선조 유학사에 있어서 어떤 기여를 하였는가 하는 점을 소개하려는 것이다.
도학 사상이란 정몽주의 절의정신을 이어받아 조선조 초기에 이르러 인도(人道)정신을 최고로 발전시켜 천도(天道)와 융화시키려는 이상정치를 펴려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이의 사상적 출발은 정몽주의 의리정신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조선조 개국이후 점차로 정치적 안정을 이룩하게 되자 조선조의 조정에서 새로운 이상 정치를 펴나가자는 운동으로 발전한 것이었으니 일종의 유학에 의한 이상 정치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구체적으로 불의를 미워하고 의리를 숭상하는 정통성을 옹호하고, 사욕을 근절시키고 공론을 일으켜 선비의 원기를 배양하여 국가의 기강을 확립하려는 운동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운동은 조선조 초기 사림(士林) 사상의 정신적 특징이 되었던 것이며 자연히 집권세력이나 조정 대신들과는 다른 의식을 형성하여 갔었다.
이러한 정신적 맥락의 흐름을 살펴보면 정몽주와 함께 조선조의 건국에 참여를 거부한 은일(隱逸)의 선비들과, 세조의 찬탈에 불만을 품은 사육신(死六臣)과, 단종을 애석히 여겨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짓고 피화(被禍)를 당한 김종직 일파, 도학정치를 구현하려다가 모함을 당하여 화를 입은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조광조(趙光祖) 일파가 모두 상황은 다르나 재야(在野)의 사림 출신으로서 불의를 미워하고 올바른 기강을 세우려는 의식을 가진 선비들이었다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조선조 유학의 의리적(義理的) 정통성에서 볼 때 그들이 구현하고자한 이상과 개혁의지에서 모두가 일관된 정신적 흐름과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커다란 사건과 이와 같은 개혁의지를 힘써서 떨치려 하였던 중추적인 인물은 대부분이 광주권 또는 호남권과 지역적으로 혈연적으로 또는 학파의 성격으로 볼 때 그 주역을 담당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어쩌면 고려시대에까지 도외시되었던 호남인의 처지들이 조선조 초기에까지 중요한 관료의 직책에 보임하지 못하게 되었던 점이 하나의 원인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이들 인물에 대한 구성과 출신지역을 소개하면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정몽주는 경주 영일현(迎日縣) 사람이요, 그의 학문은 정주학의 강설에 뛰어나서 그의 학문 요지가 나중에 발견된 중국의 호병문(胡炳文)의 학설과 일치한 면을 보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지만 그의 행의는 고려조에 대한 충절정신으로서 의리를 지킨 점이라 할 것이요, 길재는 선산(善山) 출신으로 금오산(金烏山) 아래 살았으므로 금오산인(金烏山人)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이 지역과 가까운 선산(善山) 출신 김숙자(金叔滋)가 또한 길재에게서 배웠고, 이 시기에 이르러 김숙자의 제자인 영남의 학자들이 조선조 초기 학문의 융성을 이루었다 할 만큼 많은 사람이 배출 되었으니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김일손(金馹孫)ㆍ유호인(兪好仁)ㆍ김맹성(金孟性)ㆍ박한주(朴漢柱) 등등 대부분이 영남 사림들이었다. 이들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김숙자는 산림에서 대부분 생활하였으므로 산림학자라 할 수 있으나, 그의 문하생은 대부분 현실참여를 희망하였다. 그의 아들 김종직 또한 영남출신임은 물론 사림의 거두로서 이극돈(李克墩)ㆍ노사신(盧思愼)ㆍ윤필상(尹弼商) 등의 훈구대신들과는 의견이 대립되었을 뿐 아니라 서로 다른 당파로서 반목과 갈등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 결과로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종직의 문하에서 정여창(鄭汝昌)과 김굉필(金宏弼)이 나왔으니, 정여창은 함양(咸陽) 사람이요 김굉필은 현풍(玄風) 사람이었다. 김굉필은 무오사화와 연관되었다고 하여 나중에 피살되었으나 그가 함경도 희천(熙川)에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 희천 찰방(察訪)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와서 그의 제자 되기를 희망한 13살 소년이 있었으니 그가 조광조(趙光祖)였다.
조광조는 본래 경기도 용인 출신이었다. 조광조가 도학정치를 부르짖고 선비의 원기를 세워 현실정치를 개혁하자고 하는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자 이에 위협을 느낀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의 훈구대신들이 화를 일으켜 조광조 일파를 숙청하였으니 이를 우리는 기묘사화(己卯士禍)라고 부른다.
실제로 중종조 이전까지에는 호남출신의 유학자로서 중앙의 관료로서 두드러진 업적을 남긴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위에서 소개한 것처럼 무오사화(연산군 4년)와 관련되어 참화를 당한 김종직 일파나 갑자사화(연산군 10년)에 화를 당한 김굉필, 정여창 등의 일파 또한 호남인과의 깊은 인연을 발견하기 어렵다.
실제로 호남인이 조선조 유학사상의 주역으로 참여하고 자기의 사상적 의지를 표현 할 수 있었던 것은 중종조 초기 기묘사림파의 일원으로 참여하면서부터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이전부터서 조정에 참여한 인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신진 세력으로서 하나의 학파로서 사림의식을 가지고 의리정신을 굳건히 떨치고 일어선 것은 기묘명현으로부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광주 유학사상의 연원은 조선조 도학사상에 그 연원을 두었다고 할 것이며 실제로 조광조와 더불어 조정의 개혁을 부르짖었던 인물들로부터 그 시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시기에 활동하였던 인물로는 최산두(崔山斗)ㆍ기준(奇遵)ㆍ고운(高雲) ㆍ양팽손(梁彭孫)ㆍ박상(朴祥) 등이 있는데 기준은 기묘사화에 화를 당한 분이요, 최산두는 기묘명현으로서 낙향하였고, 고운은 기묘 당인(黨人)의 한사람으로서 기록되고 있으며, 양팽손은 조광조의 도우(道友)로서 그의 귀양살이를 보살피다가 그가 죽자 그의 시신(屍身)을 거두었고, 박상은 기묘사림의 의식을 공고히 하고 조선조의 의리정신을 형성시킨 사람이다. 대체적으로 이와 같은 인물들이 조선조 초기 도학사상의 형성기에 있어서 광주의 인물이라 하여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위의 몇몇 인물이 호남뿐 아니라 조선조의 유학사에서 차지하는 영역을 과소평가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다름 아니라 그것은 이분들의 문하에서 또는 이분들의 후예들이 조선조의 사상적 특징과 발전을 이룩한 주역이 되었다는 사실이요, 또한 조선조의 구국운동과 의병활동에 앞장서는 인물들 거의가 이분들의 후세 자손이거나 문하생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조선조의 의리정신을 형성하게 한 박상의 업적과, 조선조 유학사상의 발전을 이룩한 기대승(奇大升)의 숙부가 기준이라는 사실과,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에 앞장서서 구국운동이 일어나게 한 금산 전투의 선봉장 고경명이 고운의 손자라는 점과, 조선조 가사문학의 으뜸을 이룩한 송순(宋純)과 정철(鄭澈)이 모두 박상의 문인이었다는 사실을 감안 한다면, 조선조 초기 도학사상이 발전하였던 이 시기에 찾아 볼 수 있는 호남의 인물들은 호남 유학사상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데 이들로부터 발전된 호남의 유학은 조선조의 학풍과 성리학과 절의정신에 있어서 뛰어난 공적을 쌓았다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이상에서 조선조 초기 도학사상의 형성기에 이르기까지 유학사상의 시원과 호남 유학사상이 형성되기 이전의 형태로서 호남 유학사상의 전기, 그리고 고려 말과 조선조 초기에 이르기까지의 유학사상의 특징과 그 출신 배경 및 호남인과의 관계 그리고 호남 유학사상의 형성이라 할 수 있는 도학 사상에 나타난 호남의 인물과 그 위치 등을 일별하여 보았다. 이제부터는 각 편에 따라서 그 특징을 고찰하여야 할 것이다.

목차

서론 / 9
제1장 도학사상의 발전과 호남의 인물 / 23
제2장 조선전기 성리학과 호남 / 173
제3장 구국 운동과 호남의 절의 / 305
제4장 조선후기 성리학과 호남 / 447
제5장 실학사상과 근대적 자각 / 675
결론 / 813
색인 / 829

저자소개

저자 안진오는 전남대 명예교수

도서소개

고(故) 현암(玄庵) 이을호(李乙浩) 선생의 정신적 유산을 이어받아 지역학으로서 호남학의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한 철학, 사상적 기초를 제공하려는 의도에서 기획된 「전남대 철학연구교육센터 호남유학총서」 제2권 『호남의 유학자들』. 호남 지역을 대표하는 유학자들을 총괄적으로 소개하는 이 책은 오늘날 우리에게 남겨진 학문적 책무는 호남의 사상가들이 정초한 주체적이고 독창적인 사유의 세계를 한국의 근현대사와 접목시켜 새로운 맥락에서 정리하여 호남학으로 재정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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