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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중국 회화의 거장 리커란(시공아트 31)

20세기 중국 회화의 거장 리커란(시공아트 31)

  • 완칭리
  • |
  • 시공아트
  • |
  • 2003-01-25 출간
  • |
  • 252페이지
  • |
  • 148 X 210 mm
  • |
  • ISBN 9788952730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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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중국 현대 산수화의 혁신가, 리커란
"만일 20세기 중국의 화가 중에서 그의 생애, 예술 경력과 사상, 영향력이 이 격동기의 예술적 흐름을 요약적으로 보여주는 이가 있다면, 그는 바로 리커란이다. - 마이클 설리번"

리커란(1907-1989)은 서구 문명의 충격이 중국을 강타한 20세기 초, 동서문화가 뒤섞인 복잡하고 새로운 문화 환경에서 태어나, 평생 동안 중국 전통 회화의 혁신을 추구한 화가이다. 급격한 서구화와 전통 파괴를 경험한 20세기 중국의 화가들에게 개량주의와 전통주의는 그들이 선택할 수 있었던 가장 상식적인 노선이었다. 치바이스(齊白石, 1863-1957)와 황빈홍(黃賓虹, 1865-1955)으로 대표되는 전통주의와 쉬베이홍(徐非鴻, 1895-1953), 린펑미엔(林風眠, 1900-1990)이 이끈 개량주의는 리커란에게도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었다. 그러나 리커란이 그들과 달랐던 점은, 그가 개량주의자이면서 전통주의자였고 동시에 개량주의자도 전통주의자도 아니었다는 점이다.

리커란이라는 화가는 아직 우리에게 낯설다. 중국 미술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아직 전통시대에 주로 머물러 있으며, 21세기를 갓 접어든 지금, 20세기 중국 미술에 대한 논의는 설익은 감마저 준다. 그러나 지난 세기의 한 중국 화가가 일생을 걸고 고민했던 문제가 지금의 한국 화가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면?

2003년 11월에 덕수궁 미술관에서 열리는 《리커란?장우성》전은 한?중 양국의 수묵화 전통이 어떻게 현대화되었는지 비교해볼 기회가 될 것이다. 낯가림을 다소나마 가시게 할 『20세기 중국 회화의 거장 리커란』은 현대 중국화의 대가에 대한 본격적인 작가론이자, 중국 근?현대 미술에 대한 흥미로운 가이드이다.

可貴者膽 所要者魂
"중국화 개혁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담량(용기)이고, 중국화 개혁을 위해 버리지 말고 지켜야할 것은 영혼이다."(p. 139)

리커란은 1954년부터 '가귀자담'과 '소요자혼'이라는 글귀를 각각 인장에 새겨 쓰면서 몸으로, 작품으로, 글과 강연으로 이를 실천해 보였다. 그가 살았던 여든 두 해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지만, 굽힐 줄 모르는 신념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일궈낸 그의 삶과 예술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것이다.

리커란의 명성은 1970년대부터 확고부동한 것이었지만, 그에 관한 제대로 된 평론이나 연구는 1980년대 후반부터 점차 나오기 시작했으며, 그마저도 오류가 적지 않았다. 저자 완칭리는 이 책에서 구전과 추측으로 왜곡된 리커란의 생애를 비로소 명쾌하게 보여주었다. 무학에다 빈농으로 작은 식당을 꾸려가며 8남매를 키운 리커란의 부모는 그에게 경제적, 문화적으로 많은 것을 누리게 해주진 못했지만, 영특하고 재능이 뛰어났던 그에게는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다.
리커란은 고향 서주의 한 화가로부터 전통적인 방식으로 2년 동안 그림을 배우다가, 소학을 마치고는 서주를 떠나 상해미술전과학교와 서호국립예술원에서 그림 공부를 계속했다. 서양화과 석사 과정으로 서호국립예술원에 들어간 그는 본격적으로 유화와 서양식 소묘를 배우며 기초를 다져나갔고, 학생들로 구성된 일팔예사(一八藝社)라는 좌익미술단체의 일원으로 활동하다가 퇴학을 당했다. 이로써 그의 공식적인 화학(畵學)은 끝났지만 리커란은 미술교사로 일하면서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1937년의 중일전쟁을 시작으로, 불안하던 중국의 정세는 전면적인 항전 태세로 돌입했고, 그도 항일 선전 공작에 참여해 선전화를 그렸다. 이 무렵, 푸파오스(傅抱石, 1904-1965), 쉬베이홍, 린펑미엔 등 선배 대가들과의 교류가 시작되었고, 1945년 8월에 전쟁이 끝나고 이듬해 쉬베이홍의 초청을 받아 북경 국립예전의 교수로 일하면서 치바이스를 만나 큰 감화를 받았다.

전통 중국화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중국화로 나아가려는 목표를 세운 리커란은 이당(李唐), 황공망(黃公望), 석도(石濤) 등 역대 대가들을 깊이 연구하고, 서법과 기량을 연마하는 한편 중국 각지로 사생 여행을 다니며 정체된 중국화에 새 길을 모색했다. 그러나 공산당은 전통 중국화를 봉건시대의 산물로 폄하하며 탄압했고, 리커란도 1966년에 시작된 '문화대혁명'에서 무사할 수 없었다. 표현의 자유는커녕 붓을 쥐는 일조차 금지되었던 암흑기 동안 그는 간간이 당의 부름을 받아 서명 없이 그림을 그려바쳐야 했고,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하방(下放)되어 노동을 해야 했다. 문화혁명이 끝나는 1976년까지 20여년간 리커란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끊임없이 고통을 받았지만, 그는 언제나 그림을 그리고 연구하고 생각했으며, 정치적 외압에도 중국화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모든 힘든 시기가 지나간 뒤엔 리커란은 이미 일흔 살의 노인이었지만, 병이 난 발가락을 잘라내는 수술을 감행하고 산에 올라 사생을 계속했다.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그는 활발한 작품 제작으로 커다란 예술적 성과를 거두었고, 화가로서는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그러나 그림을 청하며 몰려드는 권세가들과 언론의 허세에 그는 점차 지쳐가고 있었고, 1989년 12월, 집으로 온 문화부 관원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돌연 세상을 등졌다.
리커란은 가난과 전쟁, 야만적 근대화의 격류를 헤치고, 자신의 예술 세계를 송두리째 부정하려든 문화혁명의 광기를 넘어 찬연히 솟아난 큰 봉우리였다.


"리커란 선생께서 내게 가르치신 말씀은 문자로 나열하기에는 너무 많아 다 쓸 수가 없다. 그는 내 마음속에 소박한 모습의 노농(老農) 또는 자비로운 아버지 같은 모습이셨고, 그의 예지는 공자와도 비길 만한 분이셨다." (p. 221)

저자 완칭리는 이 책에서 리커란의 생애와 예술 사상을 소상히 서술하고, 그의 작품을 예리하게 분석하며 양식의 형성 과정과 특징을 명확하게 밝혔다. 뿐만 아니라 중국 근?현대 화단의 흐름을 요약적으로 제시한 뒤, 그 속에서 리커란의 위상과 영향력에 대한 합리적인 판단을 시도했다. 이는 가히 리커란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 결과라 할 만하며, 한편으로 미술사학자 완칭리가 사부(師父) 리커란에게 바치는 최고의 헌사이다.

완칭리와 리커란의 인연은 문화혁명 초기 중앙미술학원의 감옥에서 시작되었다. 중앙미술학원 미술사학과의 제일 어린 1학년생이었던 완칭리는 '우귀사신(牛鬼蛇神)' 즉 반동분자로 체포되어 그곳의 임시감옥 '우붕(牛棚)'에 투옥되었다. 그가 그 학교 중국화과 교수였던 리커란과 한 방에 갇힌 것은 너무도 극적인 우연이었다. 리커란은 극한의 상황에서도 언제나 평온을 잃지 않았고, 그를 따뜻하게 배려했으며, 하방에서 돌아와 4년만에 리 선생을 뵌 완칭리는 그에게 스승이 되어줄 것을 청했다.

완칭리는 리커란의 집을 드나들던 객이 거의 없었던 시절부터 그에게 그림을 배우며 많은 것을 보고 들었고, 정식으로 중앙미술학원 산수화 석사 과정으로 입학해서 리커란을 지도교수로 모시기도 했다. 그는 일찍부터 스승에 대한 전체적인 연구를 구상했고, 틈틈이 자료를 모았다. 그러나 미국 유학 직전에 작별인사 드린 것을 마지막으로 스승을 뵐 수 없었던 그는 리커란 서거 4주년이 되어서야 이 원고를 마무리지었다. 저자가 리커란과의 깊은 인연 때문에 더욱 엄정하고 객관적인 어조를 고수해야 했던 이 책의 끝자락에 은사에 대한 그리움을 뭉클하게 담은 회고를 덧붙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것이 스승이자 아버지 그리고 친구였던 리커란의 영전에 바치는 그만의 헌사였기 때문이다.

대가는 어떻게 태어났나
"지금 내 나이 팔순에 가까우나 한번도 내 그림에 만족해본 적이 없다. 내가 만일 백살까지 살 수 있다면 아마 그림이 좋아지지 않을까 늘 생각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이백살이 되어도 그것은 불가능하며, 단지 현재에 비해 조금 나아질 뿐이다. '무애유지(無涯唯智)', 즉 사물의 발전은 무궁무진하고 한계가 없으며, 절대적인 완미(完美)란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p. 100)

문화혁명기 중 6년 동안이나 창작의 자유를 박탈당했던 리커란이 1972년에 비로소 기념비적 대작 산수화를 제작하여 화단에 복귀하자, 사람들은 당연히 그의 출현에 놀랐고, 양식의 새로움과 높은 완성도에 일제히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그의 양식은 반세기간의 고된 실천과 탐색의 결과였다. 리커란은 대기만성형 화가의 표본으로, 현재의 명성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고 혁신을 갈구했으며, 일격을 이룰 만한 재능과 열정을 지닌 거장이었다.

한치의 모자람도 넘침도 없는 리커란의 대표작들과 거품을 뺀 예술론을 담은 [20세기 중국 회화의 거장 리커란]에서 저자가 공들여 말하고 있는 것은 결국 이 한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이다.
"중국 현대 산수화의 대가는 어떻게 태어났나?"
누구나 쉽게 대답할 수 있지만 결코 쉽게 실천할 수는 없다.

목차

서문 ... 7
서론 ... 12

제1장 근대 문화 사조와 20세기 중국 회화 ... 23
제2장 리커란의 생애 ... 40
제3장 리커란의 예술 사상과 회화 이론 ... 105
제4장 리커란 예술 양식의 형성 ... 115
제5장 리커란의 예술 기법과 독창적인 기교 ... 152
제6장 리커란의 영향과 리커란 화파 ... 186
제7장 리커란에 대한 평가 ... 192
제8장 20세기 중국 회화사에서 리커란의 위상 ... 196

은사 리커란 선생을 회고하며 ... 199
주석 ... 223
리커란 연보 ... 230
참고문헌 ... 240
도판목록 ... 243
옮긴이의 말 ... 251

도서소개

먹빛보다 짙고 혁명보다 치열했던 리커란의 삶과 예술을 만나다. 리커란(1907-1989)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화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20세기 초, 서구 문명의 충격이 중국을 강타했을 때, 동서문화가 뒤섞인 복잡하고 새로운 문화 환경 속에서 태어나, 평생 동안 중국 전통 회화의 혁신을 추구했다. 그리고 그의 독창성과 열정은 중국 회화의 개혁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1970년대부터 서거 전까지 리커란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저자 완칭리는 이 책에서 리커란의 예술세계를 유기적으로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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