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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영선

사기영선

  • 사마천
  • |
  • 일빛
  • |
  • 2012-02-24 출간
  • |
  • 805페이지
  • |
  • 176 X 245 X 40 mm /1384g
  • |
  • ISBN 978895645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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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사마천의 『사기』를 한 권으로 읽는다!
정조 대왕이 엄선하고,
다산 정약용이 교정ㆍ교감을 본 『사기』의 정수(精髓)
『사기영선』을 최초로 완역하다.

이 책에 대하여

『사기영선(史記英選)』은 정조(正祖)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서 그 정수(精髓)만을 친히 가려 뽑아 엮어 후학들에게 규범으로 삼고자 한 책이다.
이 책은 1796년(정조 20년)에 조선 초기에 있었던 주자소를 복설하여 정유자(丁酉字)로 간행하였고, 태백산, 오대산, 적성산 사고(史庫)에 보관케 하면서 영남과 호남, 관서의 감영에 명하여 번각(飜刻)하여 바치게 하였다. 처음에 정조는 이 책을 『어정사기영선(御定史記英選)』이란 이름의 8권 5책으로 나누어 편찬하여 간행하게 하였는데, 『사기』에서 27편, 『한서(漢書)』에서 8편을 가려 뽑아 모두 35편의 글이 실려 있다. 현재는 6권 3책이나 8권 5책의 활자본 또는 목판본 등 여러 판본이 전한다.

정조대왕이 가려 뽑고, 정약용과 박제가가 교정과 교감을 본 『사기영선』

정조는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하였고, 그는 국왕이 되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또한 스스로를 ‘호학군주(好學君主)’라 자부하며 군사(君師)라는 이름에 걸맞게 엄청난 저작 활동을 꾸준히 하였는데, 자신의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를 남긴 유일한 왕이기도 하다. 그의 문집은 180권 100책 10갑의 방대한 분량으로 어느 학자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정조는 또한 규장각을 세우고 여기에 편찬 기능까지 두어 수천 권의 책을 편찬하거나 혹은 편찬토록 독려하였는데, 이러한 책들은 크게 규장각 관료를 비롯한 국왕 측근의 신료들에게 분담하여 편찬하게 한 ‘명선서(命撰書)’와 정조 자신이 직접 선발의 기준을 마련하고 엮어 편찬한 ‘어정서(御定書)’로 구분할 수 있다. 그 어정서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사기영선』이다.
지금 전하는 『사기영선』은 정조가 1795년(정조 19년)에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글 27편과 반고의 『한서(漢書)』에서 가려 뽑은 8편의 정수(精粹)를 덧붙인 것으로 모두 35편의 글이 실려 있다. 『홍재전서』에는 “정조 19년(1795년) 12월, 『사기영선』을 완성하다”라고 적혀 있기도 하다. 정조는 정약용과 박제가에게 교정과 교감을 보게 한 후 2년에 걸쳐 1797년에 『사기영선』을 편찬하는데, 정약용(丁若鏞)의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1796년) 겨울이 되자 약용을 불러 규영각에 들게 하여 이만수(李晩秀), 이재학(李在學), 이익진(李翼晋), 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사기영선』을 교정토록 하고 자주 마주 대하시며 서명(書名)을 의논하시었다. 날마다 진기한 음식을 내려 배불리 먹여주시고, 또 쌀, 땔감, 꿩, 젓갈, 홍시, 귤을 비롯한 아름답고 향기롭고 귀한 것들을 하사해 주셨다.”

박제가(朴齊家)도 자신의 문집 『정유각집(貞표閣集)』에서 “정조 21년 정약용과 함께 『사기영선』을 편찬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다.

“정조 20년 병진(1796년)에 정유자(丁酉字)로 『어정사기영선(御定史記英選)』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이어 정조는 1797년에 명을 내려 주자소(鑄字所)에서 인쇄하여 올린 『어정 사기영선』을 신하들에게 나누어주고, 태백산, 오대산, 적상산 세 산성에 나누어 보관하게 하였다. 그리고 영남, 호남, 관서에 명하여 번각 목판본으로 간행해 올리게 하였다.”

정조는 정약용과 박제가에게 교정과 교감을 보게 하였고, 특히 다산은 정조의 명을 받고 영의정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에게 가서 서명(書名)을 정하여 받아오기도 하였다. 이 책은 바로 그 『사기영선』을 최초로 번역한 책이다.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고 엄청나게 다독을 했던 정조 역시 이런 역사서에 깊은 관심을 보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방대한 역사서를 누구나 읽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에 정조는 그 가운데서도 정수만을 가려 뽑는 작업을 한 것이다.
이를 위해 정조는 처음에 『사기』에서 본기(本紀) 1편(「항우 본기」), 세가(世家) 2편(「소상국 세가」 「유후 세가」), 열전(列傳) 22편(「백이전」 「관중·안영전」 「오자서전」 「소진전」 「맹상군전」 「평원군전」 「신릉군전」 「범저전」 「악의전」 「굴원전」 「장이·진여전」 「회음후전」 「역생·육고전」 「원앙전」 「오왕비전」 「위기후·무안후·관부전」 「급암전」 「이장군전」 「자객전」 「유협전」 「골계전」 「화식전」)과 자서(自序) 1편(「태사공자서」)을 뽑아 6권으로 『사기영선』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전하는 『사기영선』은 반고의 『한서』에서 8편(「소무전」 「이릉전」 「곽광전」 「하후승전」 「위상·병길전」 「소망지전」 「조충국전」 「매복전」)과 『사기』에서 「흉노전」 1편을 더하여 권7과 권8이 보태진 것이다.
정조는 이를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선발되었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이만수(李晩秀), 이익진(李翼晋) 등으로 하여금 1796년 10월에 함께 규영각에 숙직하면서 교정·교감을 보게 한다.
그렇다면 이토록 정성을 쏟으며 정조가 『사기영선』을 편찬한 까닭은 무엇이며, 그 의미는 무엇일까?

첫째, 광범위한 내용을 간략하게 가려 뽑아 그 백미만을 보여주려고 하다

『사기영선』은 원문의 내용을 그대로 게재하였고, 한 곳도 고쳐 쓴 흔적이 없다. 다만 원문의 내용을 그대로 게재하고 있으나 의도적으로 조금씩 뺀 곳이 보인다. 그 하나가 열전 가운데 두 사람 이상을 합전(合傳)한 것에서 한 사람의 전만을 수록한 경우이다. 이때도 합전된 인물들을 종합하여 평한 논찬은 대체로 빼지 않고 기재하였다.
또 하나는 내용이 풍속을 해치거나 불경스러우면 한 편의 열전에서 일부 내용을 빼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흉노전(匈奴傳)」 중간 부분에 “흉노전에 뽑힌 것은 대개 그 문장을 취한 것이고, 묵돌(冒頓)의 일을 특별히 제거한 까닭은 그 악행을 구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라는 간주가 붙어 있다. 묵돌이 그의 아버지 두만 선우(頭曼單于)를 따라 사냥을 나갔다가 명적(明笛)을 쏘아 죽이고, 이어 그의 계모와 동생을 죽인 사실을 삭제한 까닭은 그 내용이 해괴망측하기에 정조가 의도적으로 삭제를 하였던 것이다(옮긴이의 한글 번역본에서 이를 작은 괄호 안에 번역함).
이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잃었지만 할아버지 영조(英祖)에게 보였던 효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조 스스로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었으리라. 그의 세심한 인간적인 풍모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싶다.
또한 『사기영선』은 일체의 평이나 해설을 붙이지 않았다. 이는 정조가 “유박반약(由博反約 : 광범위한 내용을 간략하게 가려 뽑다)”, 즉 그 백미만을 보여주자는 취지로 편찬했기 때문이다. 주석 역시도 없다고 봐야 할 정도로 매우 간략하게 붙였을 뿐이다. 이는 정조가 원문을 통해 자유로운 사고와 창의적인 사고를 하도록 바랐던 평소의 생각이 그대로 드러난 것인데, 정조는 평소에 주석보다 원문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특정한 학설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는 길을 열고자 하였다.
정조가 다스리던 시대는 성리학(性理學)의 발달이 정점에 이르고 청나라의 고증학(考證學)이 도입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정조는 항상 학자들에게 특정한 시각에 입각해 주석이 붙어 있는 경서를 볼 것이 아니라 원문을 자유롭게 해석하며 유학(儒學)의 본지를 찾을 것을 권했다. 따라서 정조는 원문 그대로의 경서(經書)들을 끊임없이 편찬하게 했는데, 『사기영선』 또한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이는 정조가 인간적인 풍모뿐만 아니라 학문과 출판의 측면에서는 학자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물론 정조가 일련의 선본(選本)을 편찬해 나가는 동안에 신료들의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794년(정조18년) 초계문신 유태좌(柳台佐)는 선본 편찬은 간편한 것만 좋아하는 얄팍한 마음과 학자들에게 지름길로만 재빠르게 가려는 간사한 마음을 조장할 수 있다고 하였지만, 정조는 예전보다 서적이 엄청나게 늘어난 상황에서 이 모든 분량의 서적을 전부 다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간략한 선본을 통해 여러 책을 섭렵하게 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라 여겼다.
이와 더불어 정조는 『홍재전서』 「춘저록(春邸錄)」에서 ‘번잡함보다 간략함을 좋아하는 것이 인간의 성정’이고, “공자도 사대(四代) 이천 년 동안의 역사와 시를 『서경』과 『시경』 등으로 간략하게 편집하였다”며 경서의 원문만을 싣거나 원문을 요약한 선집을 간행했다.
선집 간행에 대해서 정조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말이 있는데, 『일득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지금의 사람들이 책을 읽기 싫어하는 습속이 있고, 그 전서(全書)를 읽기를 두려워하기에 핵심을 간추린 선본을 통해 그 근원에 다다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나마 핵심 구절을 가려 뽑아내어 학습하는 데 편리하도록 하려는 정조의 간절함이 배어있다.

둘째, 정조가 『사기영선』으로 문장의 법도를 보이려고 하다

정조는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시경』, 『서경』과 같은 유교 경전을 먼저 읽어야 효(孝)·제(悌)·충(忠)·신(信)의 사덕(四德)과 오상(五常)을 올바로 세우고, 다음에 『사기』를 익히고 나아가 당송팔대가의 문장을 익힌다면 문장이 저절로 순정해질 거라고 여겼다.
정조는 당시의 학자들 가운데 다수가 명말청초(明末淸初)의 패관소설(稗官小說 : 민간에서 떠도는 이야기를 주제로 한 소설)이나 서학(西學)에 경도되는 것을 비판하였지만, 근본에 해당하는 정학을 진흥시키면 말단일 뿐인 서학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정조는 조선의 문풍을 어지럽히는 패관잡기류 책들을 수집하여 불태우자는 유태좌의 건의에 대해서도 정학(正學)을 밝혀 유학(儒學)과 정주학(程朱學)을 익히게 하면 되지 그들의 서적을 불태울 필요는 없다고 하였다. 정조는 타락해가는 문체를 순정한 문체로 바르게 되돌려 놓겠다는 의지로 1792년 문체반정(文體反正)을 단행하기도 하였다.
『사기영선』을 정조가 친히 문장의 모범을 보인 글들을 가려 뽑아 편찬한 뜻은 당대에 급부상한 패사소설체(역사를 소설과 같은 형식으로 꾸며서 쓰는 것)에 대한 대응책으로 『사기영선』이 문장의 법도를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를 바랐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조가 『한서』에서 여러 전을 가려 뽑았을 때의 일이다. 경연관에서 신하들이 「조황후전(趙皇后傳)」이 빠진 것을 안타깝게 여기자, 정조는 『일득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이 전(傳)은 참으로 빼어난 작품이지만 중간의 사실 가운데 좋지 못한 곳이 많이 있고, 문체가 염야(艶冶)하고 섬교(纖巧)하여 후세 소설가의 길을 열었다. 이 전을 특별히 뺀 것은 참으로 호오(好惡)와 취사(取捨)의 뜻을 부친 것이다.”

이와 같이 『사기영선』은 정조가 자신의 문학관과 문장관에 의거하여 신중히 선발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정조의 이런 노력은 당대 문단의 사조를 선도하여 일정한 준칙을 정하고자 한 것이다. 특히 정조는 앞서 말한 대로 당대에 이르러 만연한 패사소설체를 일소하고 문장의 순정화(純正化)를 꾀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순정한 문장의 모범으로 『사기』와 『한서』를 바탕으로 가려 뽑은 『사기영선』을 편찬한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이렇게 편찬한 『사기영선』을 자주 문인들에게 하사하였는데, 예를 들면 1797년 1월에 제주(濟州) 승보시(陞補試)에 장원한 세 사람에게 『사기영선』을 내려주었고, 9월에는 능행(陵幸) 행렬이 지나갔던 열 곳의 읍(邑)의 유생(儒生)을 대상으로 한 별시(別試) 선발자들에게도 『사기영선』을 하사하였다.

셋째, 만인의 본보기가 되는 인물을 주로 가려 뽑다

『사기영선』에 수록된 인물을 보면 대체로 공신, 충신, 명재상, 지사, 협객, 청백리, 인인(仁人 : 어진 자), 포의지사(布衣之士 : 벼슬을 하지 않은 가난한 선비), 학자 등 나라에 보탬이 되고 만인의 귀감이 될 만한 인물들이다. 물론 오왕(吳王) 비(?)처럼 황실의 핏줄이면서 반란을 일으킨 자나 두영(竇창)과 전분(田밸)처럼 외척으로 정치 기강을 문란하게 한 자나, 장이와 진여처럼 욕심에 눈이 멀어 친구에서 원수라는 비극적인 관계가 되고 만 자도 일부 수록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정조는 유교적 통치 질서에 입각하여 역사적으로 본보기가 될 만한 인물의 예를 비교하여 보여줌으로써 문교 정치를 하고자 했던 듯싶다.
정조는 『일득록』에서 “제왕의 학문은 마땅히 경전(經傳)을 위주로 하여야 하지만, 『사기』 또한 우선적으로 빨리 숙독해야 한다. 대개 성왕(聖王)과 명군(明君)의 정치 방법과 정치 책략, 명신의 뛰어난 보좌와 드넓고도 위대한 공적을 어린 나이 때부터 익히고 알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듯이 역사(『사기영선』)를 통해 스스로를 포함해 신하들에게 교훈의 전달을 일차적 목적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일득록』에서 다음과 같은 견해도 밝혔다.

“지금의 문체는 너무나 나긋나긋하고 부드럽고 연약하여 그 거꾸러짐이 마치 바람 앞의 버들가지와 같고, 그 문체의 겉만 화려하고 알맹이가 없는 부화(浮華)함과 가볍기가 마치 물거품 위의 꽃과 같기에 이 『사기영선』을 편찬하여 문단의 붉은 깃발로 삼고자 한다. 『한서』의 경우에는 문체가 단아하고 엄숙하고 장중하고 깊다. 때문에 「하후승전(夏侯勝傳)」, 「소망지전(蕭望之傳)」, 「매복전(梅福傳)」 등 여러 전을 그 아래에 부록으로 붙였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조황후전(趙皇后傳)」 같은 경우에는 그 이야기가 후세의 패총(稗叢) 문체를 열어놓은 것이라 곧바로 없애 버렸다.”

정조는 궁중의 추악한 비사를 담은 「조황후전」을 뛰어난 문장의 기준으로 뽑았다가 아예 삭제하였다. 문체가 후대의 폐관 소설(稗官小說)을 싹트게 한 점과 그 내용이 추악하여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는 탓이었다. 기괴하고 신기한 소품(小品) 문장을 싫어하고 남녀 간의 비밀스런 애정 비사를 입에 올리기 싫어한 정조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위 글로 미루어 보아 정조는 『사기영선』에 외척들의 세가(世家)를 뺀 이유도 능히 짐작할 수가 있을 터이고, 총애하는 수빈 박씨(綏嬪朴氏)의 아버지 박준원(朴準源)이 외척이라고 해서 단숨에 큰 벼슬아치로 삼지 않았듯이 특히나 외척의 발호를 경계한 정조의 정치 행위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듯싶다. 그래서 정조는 역설적으로 「위기·무안후 열전(魏其侯武安侯列傳)」을 『사기영선』에 실으면서 위기후(魏其侯) 두영과 무안후(武安侯) 전분의 이야기를 반면교사로 삼고자 했을 것이다.
두영과 전분은 모두 학식과 덕망이 뛰어나지 못했으나 외척 관계를 이용해 요직에 오르고 외척이라는 이유로 작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둘 사이에는 본래 원한이 없었지만 조정에서 총애를 받기 위해 싸우다 결국에는 모두 패가망신하고 만다. 전분과 두영, 이 두 외척 귀족 집단 간의 모순을 통해 한나라 초기 봉건 통치 집단의 교만과 잔인함을 드러내고자 했던 사마천의 의도대로 정조도 외척이나 종실 측근의 부정적인 측면을 널리 알리고자 했을 것이다. 정조가 매복이 국정을 쥐락펴락하는 외척 왕봉(王鳳)을 탄핵하기 위해 올린 상소문을 높이 친 까닭도 아마도 이런 이유가 아닌가 싶다.
정조가 『한서』에서 가려 뽑은 인물들을 보면 이릉(李陵)과 소무(蘇武)와 조충국(趙忠國)은 애국적이고 비장한 의지를 지닌 애국지사이고, 곽광(?光)과 위상(魏相)과 병길(丙吉)은 사직의 운명을 지탱한 충신들이고, 하후승(夏侯勝)과 소망지(蕭望之)와 매복은 굳센 의지와 고결한 정신을 지닌 학자들이다. 제왕으로서 정조는 이와 같은 인물들이야말로 『한서』의 정신이 담긴 인물이라고 보았을 것이고, 조선에서도 이러한 인물을 닮은 신하가 나와 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원래 『한서』 「이광·소건전(李廣蘇建傳)」에는 이릉 다음에 소무가 나오는데, 정조는 『사기영선』에서 소무를 이릉 앞에 두었다는 것이다. 정조는 이릉의 흉노 투항이 불가피한 선택이든 자발적인 선택이든, 오점을 남긴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끝까지 절개를 지킨 소무를 흉노에 투항한 이릉보다 높게 평가한 것이었다. 이 외에도 조선이란 나라의 최고 경영자로서 정조는 왕권 강화를 위해 신권을 견제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곽광을 뽑았을 것인데, 이는 제왕으로서 나라를 다스리기 위한 노회한 정치가로서의 면모를 느끼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넷째, ‘소통과 의리’를 『사기영선』으로 보여주고자 하다

정조는 노회한 정치가라기보다는 공신, 정치, 경제를 실제 다루면서 보여준 그의 모습은 진정한 정치가로서의 면모를 더 많이 엿볼 수 있는데, 그의 개혁 정책 가운데 탕평책(蕩平策)이라든지 백성들의 삶을 진심으로 보살피려 했음을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특히 정조는 “멀리 있는 사람은 법을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지 않고 가까이 있는 신하는 나의 뜻을 따를 뿐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며 신하들의 간쟁을 북돋았다. 이는 『사기영선』에서도 드러나는데, “사람의 신하된 도리로서 마땅히 직언을 하고 정론을 펼치는 것을 꺼리지 않으면 그만이지 구차하게 황제의 뜻에만 아부”하지 않은 신하의 전범으로 하후승을 높이 추켜세운 것은 간언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조선에서는 북방의 변경 민족 문제를 논의할 때, 조충국(趙充國)이 ‘둔전책(屯田策)’이라는 장구한 책략을 펼쳐 강족(羌族)을 스스로 굴복하게 한 이야기를 자주 언급하고 있다. 정조도 반고가 「서전(泯傳)」에서 “병법의 상책은 싸우지 않고도 적을 항복시키는 데 있다. 영평후(營平侯 : 조충국)는 백발이 성성한 나이 일흔여섯 이후에 큰 전공을 세우고 개인의 영달보다는 장구한 전략을 내놓았다. 강족을 공격하라는 선제의 명을 따르지 않고 대신 둔전책을 내놓아 황제의 믿음을 얻었던 것”이라고 밝힌 것처럼, 올곧은 장군의 전형인 조충국에게 큰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정조 역시 언로가 뚫려야 양식이 있고 지조 있는 지식인이 결국 좌절하지 않고 시대의 병폐를 정확하게 진단하는 충언을 올릴 수 있음을 알았기에 ‘비판적 지식인’들을 충직한 신하의 전범으로 삼았다. 그래서 간언의 대명사 격인 굴원(屈原)과 악의(樂毅)와 원앙(袁?)과 역이기(?食其)와 육고(陸賈)를 충간을 잘한 충신의 거울로 삼으려고 이들을 『사기영선』에 포함시킨 것이다. 나아가 정조는 데릴사위인 순우곤(淳于?)이나 난쟁이 가수였던 우전(優朴)과 같은 비천한 골계가들의 혜안과 기지가 빛나는 우스갯소리도 간언으로 높이 사며 그 역사적 공적을 인정해 주었다. “감히 군주의 싫어하는 낯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나타내었으며, 자기 몸을 돌아보지 않고 나라를 위해 장구한 계획을 세웠다”고 칭찬한 원앙의 직언은 정조에게도 따끔한 일침이 되지 않았을까? 또한 “군주의 장점은 따르고 잘못된 점은 바로 잡아주어야만 위아래가 서로 친해지는 것”임을 몸소 보여준 관중과 안영 역시 위아래로 소통을 잘한 사회 통합의 달인이었기에 『사기영선』에 꼭 적합한 인물이었을 터이다.
특히 정조는 춘추전국 시대와 한나라 때에 지배층이 교유하기를 꺼렸다는 자객(섭정?政과 형가荊軻)과 서민 협객 주가(朱家), 시골 협객 극맹(劇孟), 저잣거리 협객 곽해(郭解)의 전기까지도 소중하게 여긴 까닭은 그들이 하는 짓이 비록 지방의 치안을 어지럽게 하기도 하였지만, 강개한 성품으로 곧은 절개와 의리를 만천하에 펼쳐 보이고 반드시 ‘언행일치’를 하는 기풍을 세웠다는 긍정적인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 역시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은 후 할아버지 영조의 보살핌을 받았지만, 정조는 세손 시절에 자신을 감시하는 눈길을 의식하며 살았고, 좌의정 홍인한(洪麟漢), 정후겸(鄭厚謙) 등의 반대파들로 인해 항상 불안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그런 정조를 보호한 서명선(徐命善), 홍국영(洪國榮), 정민시(鄭民始), 이진형(李鎭衡) 등과 ‘동덕회(同德會)’을 만들어 매년 친목 모임을 가졌고, 또한 단종과 효종에게 충성한 인물들 가운데 사육신(死六臣)과 송시열(宋時烈) 등을 표창하며 그 의리를 높이 산 것도 아마도 이런 이유였을 것이다.
또한 장사치들의 전기인 「화식열전(貨殖列傳)」을 『사기영선』에 포함한 까닭은 그들이 종사하던 일이 천직이었지만 ‘부해지면 덕을 행하라’는 것을 몸소 보여준 범려(范?), ‘내 집의 밭과 가축에서 얻은 것이 아니면 먹지도 입지도 않고’ 고을의 모범이 된 선곡(宣曲 : 섬서성 서안시 서남쪽) 임씨(任氏)의 예처럼 ‘화식(貨殖 : 부의 증식)’이 왕도 정치의 한 일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조는 사회 지도층 벼슬아치나 그 어떤 방면에서든 성공한 자들이 솔선수범하여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동의하는 의로움, 더 나아가 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위한 의로움을 실천하여야만 그것이 바로 공익의 추구이고 이러한 공익이 실현되어야만 사회 통합이 가능하다는 자신의 통치철학을 『사기영선』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실제 『사기영선』을 읽다보면, “모곤(茅坤 : 명나라 문학자)이 이른바 「화식전(貨殖傳)」을 읽으면 부를 추구하고 싶고, 「유협전(游俠傳)」을 읽으면 목숨을 가볍게 여기고 싶고, 「이장군전(李將軍傳)」을 읽으면 곧바로 나가 싸우고 싶다”라고 할 정도로 마음에 와 닿는다.

다섯째, 사람의 겉모양이 아니라 됨됨이가 중요함을 알리고자 하다

이 밖에도 『홍재전서』에 나오는 정조의 어록을 보면 정조가 『사기영선』에 왜 그러한 인물을 가려 뽑았는가를 추론해 볼 수가 있다.

“말(馬)을 잘 알아보는 사람은 그 빠름을 볼 뿐 색이 검거나 누렇거나 따지지 않으며 독서를 잘 하는 사람은 그 뜻을 본받지 그 문사(文辭)를 본받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비를 잘 취하는 사람은 그 마음을 취하지 그 모양을 취하지 않는다. 선비의 마음을 보아 등용해야 한다.”

정조는 이렇게 인재는 겉모양이 아닌 알맹이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며 먼저 사람 됨됨이, 즉 수신(修身)이 잘 된 인물을 선호하였다. 그래서 의로움과 양보라는 도덕적 정신주의가 드높았던 백이와 숙제를 『사기영선』에 포함시키고, 또 ‘청백리(淸白吏)’였던 급암(汲菴)을 높이 샀을 것이다. “사대부는 청렴해야 하니 청렴한 후에야 득실을 따지는 기틀에 물들이지 않을 수 있으며 사대부는 공정한 뒤에야 현명함과 사악함의 분별을 잘 할 수 있다”라고 한 정조의 어록에서도 급암은 물론이고 명재상 소하(蕭何)와 안영(晏창)을 『사기영선』에 넣은 까닭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들이 청렴하고 공정하고 지혜롭고 현명한 신하의 표상이었기 때문이다.
정조가 강조했던 또 하나의 정치 원칙은 ‘명검론(名檢論)’이다. 명검이란 명분에 맞게 자신을 검속하는 절제의 논리이다. 정조는 벼슬아치가 명검을 할 줄 모르면 사회 통합에 해로운 존재라고 간주하며, “사대부가 평소에 의리를 밝히고 행검(行檢 : 자기 절제)을 닦으면 조정의 일처리가 반드시 해볼 만할 터인데 장부 처리나 하면서 일하는 듯이 하는 것은 말단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것인데, 이런 측면에서도 장량(張良)과 소하와 안영과 악의와 굴원과 역이기와 육고와 같은 충신들은 모범적인 벼슬아치의 거울로 인식되었다.
아울러 정조는 “의리(義理)란 공(公)으로서 사사로이 치우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세상에는 혹시 기회를 타고 자신이 중히 여겨짐을 빙자하여 자신의 사(私)를 끼고 남을 빼앗는 데까지 이르는 자가 있으니, 그 역시 불인(不仁)이 심한 것이다”라며 ‘공과 사가 분명한’, 즉 공정한 통치 철학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래서 한신과 같은 인재를 몰라보고 자신의 일가붙이에게만 상을 주고, 자기가 예뻐하는 자만을 왕과 제후로 삼은 항우의 공평하지 못한 처사를 제왕 통치의 반면교사로 삼았던 것이다.
또한 정조는 “인심이 날로 변하고 세속의 도리가 날로 어지러워지고 조정이 날로 비루해지며 풍속과 습관이 날로 병드는 것은 모두 나아가는 것을 어렵게 하고 물러가는 것을 쉽게 여기는 이른바 진퇴가 확실한 선비의 존재가 없기 때문”이라며 선비의 진퇴론을 중요시하기도 했다. 정조가 진퇴를 잘못해 토사구팽(兎死狗烹)을 당한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과 오자서(伍子胥)를 『사기영선』에 포함시키면서도 절묘한 진퇴로 소하처럼 의심을 받거나 수감이 되지 않으면서 좋은 결말을 맺은 장량을 가려 뽑은 까닭이 아닌가 싶다.
“나무를 잘라 바둑판을 만들고 가죽을 잘라 공을 만드는데도 법도가 있지 않음이 없으니 하물며 글에 있어 서랴?”라는 송나라의 정치가이고 문인인 구양수(歐陽修)의 말처럼 지금 수천 년을 망라한 인물들 가운데 『사기영선』에 오로지 서른다섯 편을 가려 뽑았으니, 너무 간단하게 줄였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글의 법도에서 지극한 것을 취하여 배우는 자의 사표(師表 : 모범적인 인물)로 삼을 만하다 여긴 정조, 여기서 그의 생각의 한 편린(片鱗)을 읽어보자.
정조(正祖)가 쓴 「춘추를 완독하던 날 자궁(혜경궁 홍씨)께서 음식을 마련하여 기쁨을 표하므로 읊어서 신하들에게 보이다(春秋完讀日 慈宮設饌識喜 뜰示諸臣)」(1799년) 라는 글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나는 삼여(三餘 : 겨울철, 밤, 비 올 때) 때마다 한 질의 책 읽기를 매년 상례로 삼았고, 직접 선별한 책을 반드시 인쇄하여 안팎에 배포했다. 이는 문풍을 진흥하고 습속을 바로 잡으려는 고심에서였다. 책이 배포되면 직접 먼저 읽어서 익혔는데, ……정사년(丁巳年 : 1797년)에 『사기영선』을 새로 인쇄하였다. 10월 8일에 읽기 시작하여 12월 27일에 완독하였으니, 80일이 걸렸다.”

이 글은 일종의 독서기라 할 수 있는데, 정조는 『사기영선(史記英選)』을 인쇄한 후 신하들에게 탐독을 권하면서도 틈틈이 시간을 내어 다시 한번 이 책을 완독하였음을 알 수 있다.

겨울 밤, 어느 눈이 내리던 날에도 정조가 이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 선하다.

목차

일러두기-17

인재를 만나야 천하를 도모할 수 있다 19

01. 항우 본기 _ 21
당돌한 청년 항우가 진시황을 넘보다-25
명문가 출신 항우가 진나라에 반기를 들다-26
항우가 진나라 병사 20만 명을 생매장하다-34
유방이 홍문의 연에서 살아남다-38
항우가 함양을 도륙하고 서초패왕에 오르다-45
유방이 처자식을 버리고 줄행랑을 치다-47
진평이 항우와 범증을 이간질하다-52
아버지를 삶은 고깃국이나 한 그릇 다오-54
유방은 호랑이를 길러 스스로 화를 자초하지 않다-56
우여, 우여, 그대를 어찌해야 하는가!-58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는구나-60

02. 소상국 세가 _ 65
진나라의 공문서를 챙겨 천하의 형세를 꿰뚫다-69
사냥꾼은 갑이고 사냥개는 을이다-71
사재를 털어 바치고 토사구팽을 면하다-73

03. 유후 세가 _ 79
하비의 다리 위에서 태공병법을 전해 받다-83
유방, 장자방을 만나고서야 천하를 도모하다-85
논공행상으로 모반을 잠재우다-93
네 명의 은자로 하여금 태자의 자리를 지켜주다-96
세속의 일을 버리고 적송자로 노닐다-100

정말로 하늘은 공정해서 착한 사람을 돕는가? 103

04. 백이전 _ 105
시경과 서경에는 왜 허유와 무광의 기록이 없는가-109
백이와 숙제는 정말로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을까?-110
정말로 하늘은 공정해서 착한 사람을 돕는가?-112
추운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113

05. 관중·안영전 _ 115
관중의 현명함보다는 사람을 알아보는 포숙을 찬미하다-119
창고가 가득차야 예절을 알고 의족이 풍부해야 영욕를 안다-120
군자는 알아주는 이에게 참모습을 드러낸다-121

06. 오자서전 _ 125
초나라 평왕이 아들의 아내가 될 여자를 취하다-129
아비와 형의 억울한 죽음을 뒤로 하고 망명하다-130
공자 광을 오왕 합려의 자리에 앉히다-132
오나라의 힘을 빌려 초나라에 원수를 갚다-134
하늘의 뜻이 정해지면 사람을 깨뜨린다-135
눈알을 도려내 동문 위에 걸어두도록 하라-137
사무친 원한이 끼치는 해독은 그 얼마나 무서운가-140

07. 소진전 _ 143
새도 깃털이 자라야 높이 난다-147
백리 안 조나라와 합종하여 천리 밖 진나라에 대항하라-148
누에가 뽕잎을 먹듯 먹어 들어간다-150
닭의 부리가 될지언정 소의 꼬리가 되지 말라-154
처음에 싹을 자르지 않아 덩굴이 우거진 뒤에 어떻게 하랴?-156
한나라와 위나라가 배후를 칠까봐 제나라를 넘보지 못하다-158
우환이 닥친 뒤에는 이미 때가 늦다-160
일가붙이도 가난하면 업신여기는데 남들이야 오죽하랴-162
굶주린 자라도 독초는 먹지 않는다-163
충성스럽고 신실하다고 해서 어찌 죄를 지지 않으랴?-165
연나라를 위해 제나라를 피폐하게 하려다 죽다-167

08. 맹상군전 _ 169
천한 첩의 아들이던 제나라의 전문이 맹상군이 되다-173
닭 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로 목숨을 구하다-176
삼진三晉이 제나라를 귀중히 여기도록 하다-179
자식들의 자리다툼으로 봉국이 망하다-180
군주가 이익에만 눈이 멀면 백성의 마음이 떠난다-182
가난하고 지위가 낮으면 벗이 적어진다-185

09. 평원군전 _ 189
애첩까지 죽이며 신의를 지키다-193
주머니 속의 송곳인 모수가 스스로를 추천하다-194
금은보화도 후궁도 노비도 나라가 살아야 보존한다-198
이익은 지혜를 어둡게 한다-199

우물이 맑아도 와서 마시지 않는구나 201

10. 신릉군전 _ 203
누구든 겸손하게 대하니 인재들이 모여들다-207
문지기와 백정에 몸을 낮추다-208
백정 빈객이 위나라 장수를 철퇴로 쳐 죽이다-210
조국 위나라의 장군을 죽이고 조나라를 구하다-213
노름꾼과 술장사치를 찾아가 사귀다-215
장군이 되어 진나라를 물리치고 위나라를 구하다-216
어리석은 왕 탓에 술병으로 죽다-217

11. 범저전 _ 219
오줌세례를 받은 치욕에서 벗어나 진나라로 들어가다-223
제후의 인재는 나라 밖에서 찾는다-226
열매가 너무 많으면 가지가 부러지고 가지가 부러지면 나무를 해친다-234
소매가 길어야 춤을 잘 추고, 돈이 많아야 장사를 잘 한다-236

12. 악의전 _ 245
제나라가 퍼트린 헛소문으로 악의가 조나라에 망명하다-249
군자는 교제를 끊어도 상대의 허물을 헐뜯지 않는다-252
악의의 아들 악간이 능력을 인정받지 못해 떠나다-255

13. 굴원전 _ 259
하늘은 사람의 시작이며 부모는 사람의 근본이다-263
초나라 회왕이 호랑이와 이리의 나라에 들어가 죽다-264
굴원이 스스로 통쾌하게 깨닫고 흔쾌히 죽다-267

14. 장이·진여전 _ 273
장이와 진여가 문경지교의 교분을 나누다-277
격문 한 장으로 천리 땅을 평정하다-278
잡역병이 세 치 혀로 조나라 왕을 구하다-282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화를 입는다-287
장이는 왕이 되고 진여는 후가 되다-289
충신 관고가 장이의 후손들을 구하다-291

맹호라도 꾸물거리면 벌과 전갈만한 해도 끼치지 못한다

15. 회음후전 _ 299
거지 한신이 건달의 가랑이 사이로 기어나가다-303
소하가 달밤에 한신을 쫓아가다-304
유방, 한신을 너무 늦게 만난 것을 후회하다-306
한신이 배수진을 치고 살 길을 찾다-308
패한 장수는 용맹을 말할 수 없다-313
어리석은 사람도 천 번 생각하면 한 번은 맞는 경우가 있다-313
역이기가 세 치 혀로 제나라 성들을 평정하다-316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벌을 받는다-318
들짐승이 다 없어지면 사냥개는 삶아 먹힌다-322
맹호라도 꾸물거리면 벌과 전갈만한 해도 끼치지 못한다-323
날랜 토끼가 죽으면 훌륭한 사냥개를 삶아 죽인다-324
다다익선의 장군이 여자에게 속아 죽다-326
개는 요임금을 봐도 짖는다-328

16. 역생·육고전 _ 331
역생이 선비를 깔보는 유방을 혼쭐내다-335
왕은 백성을 하늘로,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안다-337
육고가 세 치 혀로 남월왕을 귀순시키다-341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 있지만 천하를 다스릴 순 없다-343
백성들은 안정되면 재상에게, 위태로우면 장군에 기댄다-345

17. 원앙전 _ 349
강직함으로 승상을 내몰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다-353
천하를 가지고도 아우 한 사람을 끌어안지 못하다-354
천자의 수레에 탄 환관을 내리게 하다-356
천금의 부잣집 아들은 마루 끝에 앉지 않는다-357
신부인이 사람돼지 사건을 듣고 원앙에게 상을 내리다-357
천하 사람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면 날이 갈수록 어리석어진다-359
조조의 목을 베어 오초의 반란을 멈추게 하다-360
비서의 사통을 눈감아주고 보답을 받다-361
노름꾼도 교제할 만한 까닭이 있다-363
옛것을 바꾸고 도리를 어지럽게 하는 자는 화를 당한다-364

18. 오왕비전 _ 365
모반의 상이 있는 유비를 오나라 왕으로 세우다-369
연못 속에 깊이 숨은 물고기를 살피려는 것은 불길하다-370
조조가 제후들의 땅을 깎자는 ‘삭번책削藩策’을 건의하다-371
쌀겨를 핥다보면 쌀까지 먹어치운다-373
오왕 비의 돈이 천하의 가는 곳마다 있다-376
천하를 위해서 조조 한 사람의 목을 치다-379
주아부가 오나라의 식량 보급로를 끊다-381
오나라 왕이 홀로 군사를 통솔하다가 패하다-382
장군들이 사대부를 독려하여 반란군을 치다-384
제후의 땅은 사방 백리를 넘지 않아야 한다-386

재앙은 반드시 그 까닭과 결과가 있다

19. 위기후·무안후·관부전 _ 393
천하가 위급한데 겸양만을 떨 수 없다-397
부귀하게 만들 수 있는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하다-398
선악을 함께 포용해야 지위를 보존한다-399
관 장군만이 세력을 잃은 두영을 배반하지 않다-402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적진에 뛰어들다-403
두영과 관부가 서로 늦게 안 것을 한스럽게 여기다-404
밭뙈기 탓에 전분이 두영과 관부를 미워하다-405
관부가 술기운에 호기를 부리다 옥에 갇히다-407
종아리가 허벅지보다 커 부러지지 않으면 갈라지기 마련이다-409
재앙은 반드시 까닭과 결과가 있다-412

20. 급암전 _ 415
황로사상으로 다스리다-419
나라의 환난을 같이하는 사직의 신하다-420
위세 때문에 절을 하면 정말로 존중하는 것이 아니다-423
잎을 보호하기 위해 가지를 상하게 하다-424
한 번 살고 죽는데 문전성시와 문전작라가 함께 오다 -426

21. 이장군전 _ 429
고조 때 살았더라면 만호의 제후감이다-433
속죄금을 내고 평민이 되다-435
돌에 화살을 박고 활로 호랑이를 잡다-437
항복한 자를 죽이는 것보다 더 큰 재앙은 없다-438
도필리의 심문에 응할 수 없어 자결하다-441
복숭아와 오얏은 말을 하지 않지만, 그 아래에는 저절로 샛길이 생긴다-442

22. 흉노전 _ 445
어린아이도 양을 타고 돌아다니다-449
흉노의 습속은 싸움과 노략질이다-449
가끔씩 무리를 이루나 서로 하나로 뭉치지 않다-450
진시황이 몽염으로 하여금 만리장성을 쌓게 하다-453
묵돌이 명적으로 선우 자리를 차지하다-454
땅은 나라의 근본이다-456
달이 차면 공격하고 이지러지면 후퇴 한다-457
한나라 유방이 흉노와 화친조약을 맺다-460
효문제도 묵돌 선우와 화친하다-461
중항열이 한나라를 배반하다-464
하늘은 한쪽으로 치우쳐 덮지 않는다-468
한나라가 마읍성을 재물로 선우를 유인하다-470
흉노와 한나라의 싸움이 그치지 않다-472
위청과 곽거병이 고비사막 북쪽까지 흉노 토벌에 나서다-475
한무제가 흉노와의 원수 관계를 잊지 못하다-478
이릉과 이광리가 흉노에 투항해 멸문을 당하다-483
요임금도 홀로는 치세를 못 편다-484

23. 자객전 _ 487
사나이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491
연나라의 은자가 형가를 알아주다-494
진시황이 연나라를 먹는 것은 기러기 깃털 하나를 숯불에 태우듯 쉽다-496
진시황을 죽이기 위해 번오기가 스스로 목을 내놓다-499
자객은 한 번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못 한다-502
자객은 뜻을 세우면 그 뜻을 저버리지 않는다-506

24. 유협전 _ 509
선비와 유협의 차이는 무엇인가-513
갈고리단추를 훔치면 처형되고 나라를 훔치면 제후가 된다-514
서민협객은 문벌세력이나 일족 패거리와는 다르다-515
보답을 바라고 은혜를 베풀지 않다-516
극맹의 모친이 죽자 천 대의 수레가 문상 오다-517
평민인데도 장군이 부탁할 정도의 권력이 있다-517
사람들이 흠모하는 명성은 영원하다-520

정치를 가장 못하는 자는 백성과 다툰다

25. 골계전 _ 525
육경 외에도 세상 문제를 풀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529
삼 년 동안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다-529
돼지 발 한 쪽과 술 한 잔으로 풍년을 바라다-530
술이 지나치면 어지럽고 즐거움이 지나치면 슬퍼진다-531
말을 제후의 예로 장사 지내다-532
초나라에서는 청렴한 벼슬아치도 할 것이 못 되네-534
고라니와 사슴으로 적군을 막을 텐가-536

26. 화식전 _ 539
가장 정치를 못하는 자는 백성과 다툰다-543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알고 옷과 음식이 넉넉해야 영욕을 안다-545
부잣집 자식은 저잣거리에서 죽지 않는다-545
물건과 돈은 흐르는 물처럼 유통되어야 한다-546
범려가 부유해지자 덕을 즐겨 행하다-547
공자가 자공의 부로 천하에 골고루 유명해지다-548
시세에 따라 새처럼 재빠르게 사고팔다-549
부유했기 때문에 정절을 지키고 천자의 대우를 받다-550
천리에 걸친 잔도로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550
굶주리는 사람도 없지만 천금의 부자도 없다-556
부는 사람의 타고난 본성이다-557
백 년을 살려거든 덕을 베풀어라-558
재산이 만 배 많으면 그 사람의 하인이 된다-560
부자는 정해진 직업이 없고 재물은 따로 주인이 없다-561
부자는 왕과 즐거움을 같이 한다-564

27. 태사공자서 _ 565
사마씨 집안의 뼈대 있는 내력을 밝히다-569
아버지 사마담이 육가의 요지를 논평하다-571
사마천의 삶과 봉선의식을 행하지 못한 아버지의 울분-575
『사기』 저술의 동기를 밝히다-577
간추려 정리할 뿐 창작하지 않는다-580
울분을 풀어내기 위해 발분하여 『사기』를 짓다-581

경술을 바르게 깨우치지 못하면 밭을 가는 게 낫다

28. 소무전 _ 585
한나라의 천자는 웃어른과 같다-589
모욕을 당하고 죽는다면 나라에 누를 끼친다-590
숫양이 새끼를 낳으면 북해에서 돌아오라-593
19년 만에 한나라로 돌아오다-595
흉노족 아내가 낳은 아들을 데려오다-597
기린각에 소무의 초상을 그리다-599

29. 이릉전 _ 601
할아버지 이장군의 풍모가 묻어나다-605
흉노의 말이 살찌면 싸우기가 쉽지 않다-606
병사의 부녀자들을 색출하여 목을 베다-608
대장부 혼자 나가 선우를 사로잡겠다-609
새나 짐승처럼 흩어져 도망쳐라-610
사마천이 이릉을 변호하다 궁형을 받다-611
이릉이 선우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다-612
대장부는 두 번이나 치욕을 당하지 않는다-614

30. 곽광전 _ 617
곽거병이 아우 곽광을 궁으로 불러들이다-621
막내아들을 황제로 세우고 주공이 되라-622
왕망이 아들을 독살하다-623
외척인 상관 부자와 권력을 다투다-624
역모를 꾀한 상씨 집안이 멸문을 당하다-625
마땅한 사람이 황제에 올라야 종묘의 제사가 끊어지지 않는다-627
창읍왕이 스스로 하늘의 도움을 저버리다-633
민간에 사는 황증손을 선제로 옹립하다-636
공덕을 한나라 건국 제1등 공신 소하와 같이 하다-637
곽광이 죽자 황제가 비로소 친정을 하다-639
곽광의 분묘가 마르기도 전에 따돌림을 당하다-642
부뚜막의 솥이 나무 위에 걸리다-645
곽씨의 재앙은 참승에서 싹 트다-647

31. 하후승전 _ 651
황제가 바르지 않으면 하늘에 나타난다-655
신하는 직언을 하고 정론을 펴야 한다-656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658
경술을 바르게 깨우치지 못하면 밭을 가는 게 낫다-660

백성은 의로움도 좋아하고 이익도 얻고 싶어 한다

32. 위상·병길전 _ 665
큰 그릇을 몸에 감추다-669
언로가 막히는 일이 없도록 하다-671
전쟁 뒤에는 반드시 흉년이 든다-672
제왕의 법은 농사와 저축에 있다-674
현명한 제왕은 하늘을 존중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676
옥에 갇힌 어린 선제를 구하다-679
모든 덕은 보답을 받는다-680
대장부 가운데 포용하지 못할 자는 없다-683
재상은 자질구레한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684
선한 이는 복이 자손까지 미친다-686

33. 소망지전 _ 691
선비를 가벼이 대하는 대장군에게 대들다-695
조정에 간쟁하는 신하가 없으면 잘못이 무엇인지 모른다-697
백성은 의로움도 좋아하고 이익도 얻고 싶어 한다-699
죽을죄를 재물로 면해줄 수는 없다-701
호한야 선우를 도와 왕위를 회복하게 하다-704
승상 병길을 무시하다 좌천당하다-706
선우를 제후왕의 윗자리에 서게 하다-708
환관이 아니라 선비를 중용하도록 아뢰다-710
나라가 흥성하려면 스승을 존중해야 한다-713
황제가 어진 스승을 죽이다-714

34. 조충국전 _ 717
용맹함과 지략으로 승승장구하다-721
가을에 말이 살찌면 오랑캐의 난이 일어난다-722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보다 못하다-724
군사를 손상시키지 않고 변경의 안정을 꾀하다-727
전쟁터에서는 황제의 명령이라도 따르지 않을 수 있다-729
궁지에 몰린 오랑캐는 몰아세우지 않는다-733
털끝만큼의 차이가 훗날 천리 차이가 난다-735
제왕의 병사는 자그마한 전투에 얽매이지 않는다-737
많이 생각한 자가 적게 생각한 자를 이긴다-740
군대의 형세는 후세의 법이다-743
산서의 지리적 환경이 용맹한 장수를 낳다-746

35. 매복전 _ 749
인재가 평소 한 일을 따지지 말라-753
선비를 잃으면 나라가 가벼워진다-755
올빼미와 까치가 해를 입으면 봉황도 떠난다-757
권세를 지닌 신하는 세상이 바뀌면 위태롭다-760
딴 사람을 살리는 게 자신이 사는 것이다-760
어짊은 자기에게 달렸지 남에게 달린 게 아니다-763

발문 : 『사기영선』 여섯 권 간본(刊本)-767

부록-771
옮긴이의 글-781
찾아보기-794

저자소개

저자 사마천(司馬遷) 은 대대로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의 집안에서 태어난 사마천은 서한 시기의 역사학자이자 문학가요, 사상가이다. 태사령인 아버지 사마담을 따라 장안으로 와서 당대의 대유학자인 동중서와 공안국에게서 옛글을 배웠다. 사마천은 20세 때부터 중국 전역을 주유했는데, 이러한 답사 경험은 훗날 그가 『사기(史記)』를 저술하는 데 토대가 된다. 36세 때 무제의 봉선의식에 참석하지 못해 화병으로 죽은 아버지의 대를 이어 태사령이 되었다. 그때 『춘추(春秋)』이래 공백으로 남아 있는 4백 년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계기로 역사서 편찬을 완성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흉노와의 전투에서 패한 후 투항한 장군 이릉을 변호하다가 그 ‘화(禍)’에 연루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48세의 나이에 남자로서는 가 장 치욕스런 형벌인 궁형을 감내한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사마천은 자신의 울분을 누르고 천지자연의 이치와 인간 운명의 비극을 통찰함으로써 공자의 『춘추』를 계승한 불멸의 역사서 『사기』를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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