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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선비들

최후의 선비들

  • 함규진
  • |
  • 인물과사상사
  • |
  • 2017-10-24 출간
  • |
  • 368페이지
  • |
  • 152 X 225 mm
  • |
  • ISBN 9788959064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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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천하의 근심을 누구보다도 먼저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은 맨 나중에 즐기리라.”

미혹과 광란의 시대를 살다간 ‘최후의 선비들’
“유교적 태평천하의 꿈을 꾸다”

선비란 무엇인가? 우리는 속된 세상과의 인연을 미련 없이 끊어버리고, 출세를 위한 학문이 아니라 학문 그 자체를 위한 학문에 사로잡혀 평생 글을 벗 삼다가 조용히 눈 감는 사람을, 학처럼 고고하게 정결한 삶을 살다가는 사람을 선비라 부르며 존경했다. 한마디로 선비는 붓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한국 사회를 오랜 세월 지배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들이 행정가나 예비 행정가였기에 국가와 사회가 효율적으로 돌아가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며, 성직자 집단 같은 도덕적 카리스마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한말 세상은 광기와 광란과 미혹의 시대였다. 신유박해로 영ㆍ정조 시절 관용된 서학에 대한 관심을 일체 부정하고 서양 문물에 대해서는 오직 척화와 쇄국뿐임을 국시로 세운 것이 1801년이었고, 외세의 위협 앞에 강화도조약을 맺고 개국을 허락한 것이 1876년,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 종지부가 찍힌 것이 1910년이었으니 길게 보아 약 100년, 짧게는 30년 만에 선비들이 영세불변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던 질서는 산산조각 나서 무너져버렸다. 특히 이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중에서도 유교적 태평천하의 꿈을 꾸던 사람들이 겪은 정신적 혼란과 상처, 절망은 상상을 불허한다. 그래도 그들은 스스로 선비임을 자각했다. 그런 문명의 충돌과 국권의 침탈 시기, 망국과 망천하의 위기를 동시에 맞은 ‘최후의 선비’들은 여럿으로 갈렸다. 상투와 도포를 보전하기 위해 살신성인을 부르짖으며 순국의 길로 나선 선비가 있는가 하면, 성현의 가르침을 폐할 수 없다며 세상을 버리고 은둔한 선비가 있었다. 또 개화에 전념하는 일이 선비의 본분이라 여겨 변절자나 친일 매국노라는 오명도 감수한 선비가 있는가 하면, 유교의 정신을 계승하되 사회적ㆍ시대적 현실 또한 외면하지 않으며 유교의 경장(更張)과 구신(救新)을 모색한 선비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 함께 뒤엉키고 휩쓸리며 광란의 시대를 비틀비틀 걸어갔다.
『최후의 선비들』은 구한말 ‘위정척사’를 평생의 신념으로 삼으며, 개화에 전면적으로 반대한 최익현부터 1910년 국권이 상실되자 세상을 버리고 은둔한 전우, 조선을 경장하는 게 선비의 지상 과제라고 생각했던 김옥균, 자유의 마음을 담아 절명시를 짓고 자결한 황현, 당대의 가장 ‘앞선 지식인’이었던 유길준, ‘을사오적’이자 1905년 을사조약문에 대한제국 대표로 이름을 남긴 박제순, ‘아와 비아’, ‘소아와 대아’의 대립이라는 틀로 세상을 보았던 신채호 등 20명의 ‘최후의 선비’들을 다룬다. 그들이 겪어야 했던 시대와 그들의 간절한 소망과 노력으로 조금이나마 흐름을 바꾸었던 시대가 오늘날의 우리 시대를 낳았다. 그러므로 ‘최후의 선비’들이 걸어간 길을 되짚고, 그들의 고뇌와 결단을 되새겨보는 일은 우리 시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개화’와 ‘개혁’을 용서할 수 없었던 선비
최익현에게 천하에서 가장 큰 근심은 서양 문물이 조선의 강토를 더럽히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서양 문물에 대해 극단적인 배척을 주장하면서, 병인양요가 벌어지던 1866년에 75세의 노구에 병든 몸을 이끌고 궁궐 앞으로 나와 ‘척화’를 외쳤다. ‘도끼를 지고 궐문 앞에 엎드려 척화의 뜻을 밝힌 상소문(지부복궐척화의소)’은 위정 척사론을 절절하게 담고 있었다. ‘일본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으니 곧 서양이며, 서양인은 삼강오륜도 모르니 곧 사람 탈을 쓴 짐승이나 같다. 사람은 사람끼리, 짐승은 짐승끼리 놀아야 하는데 이제 강화하고 개국한다면 기(氣)가 이(理)를 이기는 것이며, 사람이 짐승으로 타락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통하고 개혁한다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들어갈 여지가 없었다.
전우는 1895년 명성황후가 처참하게 살해당하는 사상 초유의 사건을 두고 크게 통탄하며 “이 원수를 갚아야 한다”며 분개했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다섯 역적의 목을 벨 것을 청하는 상소(청참오적소)”를 올렸다. 그러면서 “죽으면 의가 없거늘, 살아 있으면 한 오라기의 낙도 없다”라며 한탄했다. 1910년 국권이 상실되자 세상을 버리고 섬으로 은둔했다. “500년의 종사를 저버릴지언정, 3,000년의 가르침을 폐지할 수는 없다.” “굴욕적으로 구차히 살기”를 스스로 택한 것이다. 그러면서 심의, 복건, 치포관의 차림새를 고수했으며, 제자들에게도 “만약 육지에 나갔다가 붙잡혀 단발을 당하게 되면, 섬에 들어오지 말고 자결하라”고 단단히 일렀다.
황현은 나라가 외세에 먹혀들어가고, 인륜이 땅에 떨어지고, 전통적 가치가 사라진 세상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천분(天分)은 글 쓰는 일에 있으며, 당대의 모순을 꿰뚫고 후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 글을 쓰는 것이 선비의 사명이라고 믿었다. 그는 국권 상실의 소식을 듣고 마지막으로 붓을 들어 「절명시(絶命詩)」를 쓰고, 스스로 ‘진작 했어야 했던 일’을 했다. 그는 목숨을 끊으면서도 “이 행동은 개인의 뜻일 뿐, 충성이 아니다”라고 했다.

‘변절자’와 ‘친일 매국노’ 사이에서
‘백성이 편안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부국강병을 도모한다. 그러려면 경장해야 하고, 경장하려면 개화의 법을 세워야 한다. 개화의 모델은 바로 일본이다.’ 김옥균의 개화사상이다. 그는 개화파 중에서도 최고의 급진파로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볼모로 삼고 국정을 좌우한다”는 생각을 실행한 사람이다. 그래서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서광범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렇게 그는 군주에도 불충(不忠)하고 경전에도 불순(不順)했다. 그러나 그는 기회주의적 모리배들처럼, 자기 일신(一身)의 부귀영화를 좇지 않았다. 그에게는 유교의 가르침 중에서 다른 무엇보다도 ‘경장’이 중요했다. 어쩌면 일본을 등에 업고 턱도 없는 쿠데타를 벌인 친일 몽상가였는지도 모른다.
1905년 11월 17일, 경운궁의 중명전에 모여 앉은 사람들은 숨소리조차 쉽게 내지 못할 만큼 극도로 긴장한 상태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의 대신들에게 을사조약에 승인하라고 압박했다. 그리고 ‘5대 3이니, 대신들 입장은 찬성으로 정리한다’는 이토 히로부미의 선언! 이토 히로부미는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주무 대신의 이름으로 서명하라고 종용했다. 한국 사상 최대의 치욕적 조약인 을사조약은 그렇게 이토 히로부미와 박제순의 이름으로 조인되었다. 인생에서 가장 선비답게 행동해야 했던 순간, 그는 선비답지 못했다. 그리해서 그의 이름은 역사에 시뻘건 글씨로 적히게 되고, 영원히 최악의 변절자 혹은 민족의 반역자라는 낙인을 찍혀도 변명할 말이 없게 되었다.
안인식에게 ‘진짜 유학’은 “실질에 기반한, 통의와 상식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실용적인 도덕의 유학”이었다. 이는 실학의 이념이기도 하며, 정약용 같은 학자들이 매번 강조하던 주장이다. 그러나 안인식은 조선 실학은 일체 언급하지 않고, 일본에서 꽃핀 양명학과 이를 일본 고유의 신토와 습합한 일본 유학을 예찬했다. 안인식의 문제의식은 기존 유교개신론자들과 비슷했지만, 일제의 제국주의 지배에 야합했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다. 그러나 안인식이 친일 유학자로 특별히 공헌한 점은 ‘황도유학’의 이론적 기반을 닦았다는 데 있다.

‘조선의 독립’을 가슴에 품다
이상룡은 ‘민간단체를 잘 수립하고 잘 운영하는 게 구국과 경장의 급선무’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1905년에 을사조약을 계기로 가야산에서 의병을 조직하고, 1907년에 전통 예교와 신식 학문을 교육하는 협동학교를 설립하고, 1909년에 대한협회의 안동지회를 설치했다. 또한 병학 연구에 골몰하는 한편 의병을 일으켜 승리하려면 신식 무기보다 사람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신흥무관학교를 꾸려 그 병력으로 한반도의 경찰서, 면사무소, 악질 친일파의 집 등을 습격했다. 그러나 유교를 버리지 않으면서 긍정과 포용의 자세로 새 시대에 임했던 그는 최후의 선비로서 낯선 땅과 낯선 시대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김창숙은 국내에서 독립운동ㆍ계몽운동 단체에 참여하고, 장지연ㆍ남궁억ㆍ오세창 등이 주동해 설립한 대한협회에 가입하며, 성주군에 지회를 설립하는 일에 앞장섰다. 3ㆍ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의 뜻을 모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릴 예정이던 평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장서(長書)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중국에서는 쑨원을 만나 임시정부와 대한 독립을 후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홍콩에서 ‘한국독립후원회’를 만들고 의연금을 모금했다. 그리고 광저우와 베이징을 오가며 박은식ㆍ신채호 등과 함께 신문을 만들고, 독립운동 자금을 걷는 등의 일에 힘썼다.
신채호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비타협적인 투쟁의 연속이었다. 그는 ‘아와 비아’, ‘소아와 대아’의 대립이라는 틀로 세상을 바라보는 데 익숙했다. 이런 시각은 신념에 비추어 옳지 않은 일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비판했다. 중국으로 건너가 베이징을 근거지로 저술과 독립운동단체 참여에 매진했다. 특히 고조선과 고구려의 무대였던 백두산과 남만주 일대를 돌아보았고, 이는 새삼 신채호의 ‘대륙 지향적’ 역사관과 민족주의를 강화할 자양분이 되었다. 또 그는 가장 극단적인 투쟁만이 효과적이라며 의열단을 위해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고,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에 가입했다. 운명의 호의는 거기까지였다. 1928년 5월 8일 일본 경찰에 붙들려 재판을 넘겨지고 10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1936년 2월 21일 뤼순 감옥에서 신채호의 ‘나의 투쟁’은 그렇게 끝났다.

선비 없는 세상
한국사에서 선비는 이미 고조선시대부터 있었다고도 하지만, 글재주와 도덕적 모범으로 내로라하는 유교적 선비가 사회의 주역이 된 때는 조선시대였다. 무인이나 불승(佛僧), 권문세족 등의 지배권을 부정하고 건국된 나라가 조선이기 때문이었으며, 특히 사림이 정권을 독점하게 된 16세기 말부터는 “선비의 기상이야말로 국가의 원기(元氣)”라는 말이 상식처럼 굳어졌다. 세상에 이름을 떨치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밤 새워 글을 읽고, 하루 종일 묵향(墨香)이 떠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했다.
북송(北宋)의 범중엄(范仲淹)이 「악양루기(岳陽樓記)」에서 제시한 인간상인 “천하의 근심을 누구보다도 먼저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은 맨 나중에 즐기리라”는 동양식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선비 정신이었다. 이는 오랫동안 중국과 한국에서 선비의 모델로 받아들여졌다. 세계 어느 나라, 어느 시대나 지배 권력을 가진 계급은 칼과 총으로 지배했다. 그러나 동양에서만큼은 붓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선비라 불렸다.
그러나 구한말 이후 어떤 사람들은 세상이 망했다며 은둔하고, 어떤 사람들은 시대의 요구에 부응한다며 개화의 선구자가 되었으며, 자유주의자ㆍ민족주의자ㆍ사회주의자ㆍ무정부주의자 등으로 변신해갔다. 동문수학하며 주자의 주석을 외우던 친구들 중 누구는 친일파의 길을, 누구는 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유교가 이 모든 재앙의 원인이라며 한때 금쪽같이 여기던 경전을 태워버리는 사람, 반대로 유교에서 암울한 세상을 구할 길을 찾자며 새로운 유교 사상의 개발과 보급에 헌신하는 사람들은 모두 광기와 광란의 시대를 살다가 가뭇없이 사라졌다.
그런데 지금 ‘선비’는 있는가? 유학이 예전처럼 유일한 삶의 법도가 되지는 못해도, 오늘날의 삶에 일정한 교훈을 줄 가능성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또 ‘자신보다 더 큰 가치’에 대한 순수한 믿음을 지켜낼 수만 있다면, 그 가치가 인간적인 사랑을 담고 있다면, 세상은 그만큼 아름다워질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아직까지도 완전히 폐기될 수 없는 유교의 가르침일지도 모른다. 이 책에 등장하는 20명의 ‘최후의 선비’들을 통해 지금 우리가 살아갈 희망과 비전을 읽는다면, 그게 바로 유교의 가르침일 것이다. 동양의 정신이나 전통의 가능성이 무시되고 오직 ‘글로벌 스탠더드’를 추구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이 땅에 남았던 최후의 선비까지 조용히 사라졌다. 지금은 어떤가? 선비 없는 세상은 과연 즐겁기만 한, 원망이 필요 없는 세상이 되고 있는가?

목차

책머리에ㆍ5

개화를 용서할 수 없던 선비, ‘최후의 최초’가 되다 : 최익현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ㆍ12 | 아버지의 희망을 가슴에 품다ㆍ13 | 위정척사의 진면목ㆍ15 | ‘민중의 별’이 된 최익현ㆍ18 |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이유 ㆍ23 | 최후의 길, 풀리지 않는 문제ㆍ26

시운을 믿다가 시운에 속다 : 김윤식
망국대부 김윤식의 동도서기론ㆍ30 | 북산의 빼어난 젊은 선비ㆍ32 | 청나라에서 충격을 받다ㆍ34 | 두 차례의 파병 요청ㆍ37 | 두 차례의 유배ㆍ40 | 시운의 배반ㆍ43 | 10여 년의 여한ㆍ46

500년 대신 3,000년에 충성하다 : 전우
부잣집 도령, 가난한 선비의 길로 나서다ㆍ48 | 화서학파와의 충돌ㆍ51 | 이신촌과 공학당ㆍ55 | 죽자니 의가 없고, 살자니 낙이 없다ㆍ58 | 1만 권의 책 속에 쓰러지다ㆍ59 | 전우가 남긴 것ㆍ62

한 떨기 벚꽃처럼 지사의 길을 가다 : 김옥균
군주에 불충하고 경전에 불순하고ㆍ64 | ‘조용한 폭풍의 한가운데’에서 태어나다ㆍ65 | 다재다능한 김옥균과 젊은 그들ㆍ70 | 치도를 위해 필요한 것ㆍ74 | 마침내 정변에 나서다ㆍ77 | “모두가 운명이다”ㆍ79

천하에 마음을 둘 곳이 없다 : 이건창
강화도의 봄꿈이 깨지던 때, 잊을 수 없는 날을 만나다ㆍ84 | 마음에 떳떳한 도리를 품고ㆍ88 | 치열한 대립 속에서 혼자만의 길을 가다ㆍ91 | 사슴에게 훈계를 듣다ㆍ94 | 잃어버린 마음을 위로하는 마음ㆍ99

자유의 마음을 담아 절명시를 짓다 : 황현
망해가는 세상에 태어나다ㆍ102 | 시와 사람이 있는 정경, 그곳으로 돌아오다ㆍ104 | ‘구안’에 머무를 수 없는 마음ㆍ107 | 완전히 진짜가 아니기에, 더 참혹한 세상ㆍ109 | 절망 속의 자유ㆍ114

머리 깎고, 양복 입고, 충의를 부르짖다 : 유길준
당대의 가장 ‘앞선 지식인’ㆍ118 | 과거 따위가 어찌 선비가 힘쓸 목표인가?ㆍ120 | 후쿠자와 유키치의 ‘이중적 개화사상’과 유길준의 ‘개화사상’ㆍ122 | 두 세계의 소용돌이 사이에서 균형 찾기ㆍ126 | 영광과 좌절, 그러나 후회는 없다ㆍ130 | 오직 충의에만 희망을 품다ㆍ132

대동을 가슴에 품고, 삭풍이 부는 광야로 가다 : 이상룡
통섭으로 가기 위해ㆍ136 | ‘자발적인 민간단체’의 중요성ㆍ139 | 대동사회와 민주 평등ㆍ143 | 칼바람 속에 피는 인동초ㆍ146 | ‘내게 한복을 입혀다오’ㆍ150

고독한 변절자의 초상 : 박제순
평탄한 삶이 보장된 외교 인재ㆍ154 | ‘한일군사동맹’을 추진하다ㆍ158 | ‘No’라고 하지 못하는 선비ㆍ161 | 꽃은 바람에 지지만, 눈은 달을 바라보네ㆍ166 | 변절자의 몽상ㆍ169

가녀린 어깨로 너무도 무거운 짐을 지다 : 박은식
세찬 회오리바람에 움츠러든 인재ㆍ172 | 유교가 세상을 구한다!ㆍ174 | 만주의 하늘 아래 신들린 듯 붓을 놀리다ㆍ179 | 상하이로 가다ㆍ182 | ‘진짜 나’는 어디에 있는가?ㆍ184

‘헬조선’ 앞에 ‘피의 눈물’을 흘리다 : 이인직
어둡고 불투명한 시대에 태어나다ㆍ188 | ‘우국지사’의 꿈에 이끌리다ㆍ191 | ‘계몽의 말을 전하는 기계가 되리라’ㆍ195 | 한일병합의 막후에서 암약하다ㆍ198 | 상실의 시대ㆍ202

‘방성대곡’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 장지연
박학다식한 4대 독자, 출세의 길을 모색하다ㆍ206 | ‘동도’를 놓지 않으며 ‘개화’를 추구하다ㆍ209 | 멈출 수 없었던 역사의 수레바퀴ㆍ213 | 술로도 잊을 수 없었던 평생의 업ㆍ215 | 나는 슬퍼도 살아야 하네ㆍ217

‘미제’와 ‘중부’ 사이에서 : 이병헌
‘개혁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ㆍ222 | 이 세상에 내가 있을 곳은 어디인가?ㆍ224 | ‘시민 종교’로서 유교를 추구하다ㆍ226 | 유교의 영혼과 한민족의 영혼ㆍ229 | 백범 김구와의 논쟁과 좌절ㆍ235 | 그래도 더 먼 길을 가야 한다ㆍ237

거센 성질의 소년, 유교의 신화가 되다 : 김창숙
악동, 부조(父祖)의 가르침을 새기다ㆍ240 | 민족운동에 뛰어들다ㆍ243 | 미쳐버릴 수밖에 없는 이유ㆍ246 | 상하이임시정부, 투쟁의 나날ㆍ247 | 감옥에서 감옥으로ㆍ252 | 차라리, 죽음이여ㆍ255

나의 투쟁, 나 여기에 서다 : 신채호
특이한 환경에서 자라난 특이한 아이ㆍ258 | 급진 개혁의 길을 가다ㆍ264 | 선비의 의절(義絶)에 목숨을 걸고ㆍ266 | 만주 벌판에서 꾼 꿈하늘ㆍ270 | 작고 불쌍한 자신과 만나다ㆍ271 | 투쟁의 세상을 넘어 하늘 높이ㆍ274

나라 잃은 젊은 선비, 새 시대를 위한 헌법을 만들다 : 조소앙
선비로서 덧붙여야 할 것ㆍ278 | 신흥종교를 창설하다ㆍ282 | 세계를 누비며 ‘어중간한’ 길을 가다ㆍ284 | 삼균주의와 ‘대한민국 건국 강령’ㆍ287 | 삼균의 꿈, 북녘에 지다ㆍ290

눈 먼 예언자, 독과 피가 흐르는 땅을 가리키다 : 안인식
‘기재’와 ‘기특’의 차이ㆍ294 | 이단자의 길을 택하다ㆍ297 | ‘황도유학’이라는 것ㆍ300 | 해방 후에도 이어진 미망ㆍ304 | 버려진 사람, 그가 얻은 최후의 은혜ㆍ307

붉은 선비, 붉은 마음을 담고 부끄럽지 않은 길을 찾다 : 최익한
이미 지나간 시대의 희망ㆍ310 | 단련의 길로 발을 내딛다ㆍ312 | 공자와 마르크스를 함께 섬기다ㆍ316 | 아들의 주검 앞에서 맹세를 다지다ㆍ320 | 동토에 꽃씨를 뿌리고, 역사에 배반당하다ㆍ323

초인,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인 초인을 기다리며 : 이육사
‘내 고향 칠월은’ㆍ328 | 수인번호 264ㆍ334 | 문외한의 슬픔ㆍ338 | 강철로 된 무지개를 좇아서ㆍ342 | 가난한 노래의 씨ㆍ345

살았다, 공부했다, 원망은 없다 : 이가원
책으로 둘러싸인 담장 안에서ㆍ348 | ‘무작정 상경’, 상투를 자르고 대학생이 되다ㆍ352 | 희망은 실망으로, 선비는 침묵을 선택한다ㆍ355 | 퇴계 종손이 국문학을 하는 이유ㆍ362 | 선비 없는 세상ㆍ366

저자소개

저자 함규진은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정약용의 정치사상을 주제로 정치외교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성균관대학교 국가경영전략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현재는 서울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조약으로 보는 세계사 강의』, 『리더가 읽어야 할 세계사 평행이론』, 『세계사를 바꾼 담판의 역사』, 『영조와 네 개의 죽음』, 『조선의 마지막 왕, 고종』, 『유대인의 초상』, 『정약용,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꾸다』, 『왕의 밥상』(2010년 조선일보 논픽션 대상, 2010년 책따세 추천도서), 『역사를 바꾼 운명적 만남』, 『고종, 죽기로 결심하다』, 『왕이 못 된 세자들』 등의 책을 썼고, 『실패한 우파가 어떻게 승자가 되었나』, 『정치 질서의 기원』, 『대통령의 결단』, 『나는 죄없이 죽는다』,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죽음의 밥상』, 『팔레스타인』 등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도서소개

『최후의 선비들』은 구한말 ‘위정척사’를 평생의 신념으로 삼으며, 개화에 전면적으로 반대한 최익현부터 1910년 국권이 상실되자 세상을 버리고 은둔한 전우, 조선을 경장하는 게 선비의 지상 과제라고 생각했던 김옥균, 자유의 마음을 담아 절명시를 짓고 자결한 황현, 당대의 가장 ‘앞선 지식인’이었던 유길준, ‘을사오적’이자 1905년 을사조약문에 대한제국 대표로 이름을 남긴 박제순, ‘아와 비아’, ‘소아와 대아’의 대립이라는 틀로 세상을 보았던 신채호 등 20명의 ‘최후의 선비’들을 다룬다. 그들이 겪어야 했던 시대와 그들의 간절한 소망과 노력으로 조금이나마 흐름을 바꾸었던 시대가 오늘날의 우리 시대를 낳았다. 그러므로 ‘최후의 선비’들이 걸어간 길을 되짚고, 그들의 고뇌와 결단을 되새겨보는 일은 우리 시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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