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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프 식스

캠프 식스

  • 프랭크 스마이드
  • |
  • 하루재클럽
  • |
  • 2017-10-13 출간
  • |
  • 452페이지
  • |
  • 125 X 205 mm
  • |
  • ISBN 9788996745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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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프랭크 스마이드가 쓴 1933년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대한 기록
세계에서 가장 강인하고 훌륭한 등산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는 프랭크 스마이드는 초창기 고산등반 발전에 중심적 역할을 했고, 인기 있는 등산 관련 책과 사진집을 많이 남긴 작가이자 탐험가, 강사였다. 1920년대 말 몽블랑 브렌바 벽 등반으로 알프스 등반에 크게 기여했고, 1930년 칸첸중가 원정에 참여했으며, 1931년 에릭 십턴과 함께 카메트(7,756m)를 초등했는데, 이는 당시 인간이 등정한 가장 높은 산이었다. 이어 1933년과 1936년, 1938년 에베레스트 원정에 연속 참가했고, 1937년에는 가르왈 히말라야에서 마나피크(7,272m), 닐기리파르바트(6,481m)를 초등하는 등 여러 고봉을 오늘날 소위 ‘경량속공등반’이라 불리는 방식으로 등반했다.
에베레스트 초등이 이루어지기 20년 전인 1933년 프랭크 스마이드는 등정 파트너였던 에릭 십턴이 컨디션 난조로 돌아서자, 이전에 어느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에베레스트 최고점을 혼자서 올랐다. 로프도, 산소도 없이 악천후를 뚫고 이루어낸 그의 등반은 에베레스트 등반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시도 중 하나였다. 『CAMP SIX』는 당시 함께했던 1933년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대한 스마이드의 따뜻한 기록이다. 그는 마지막 캠프까지 가져가서 썼던 일기를 토대로, 이 책에 등반의 극적인 상황과 산의 풍경에 대한 생생한 묘사를 담았다. 산악문학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은 에베레스트와 그곳에서 이루어진 초기 원정의 위험과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보아야 할 소중한 유산이다.

[책속으로 추가]
1캠프
다음 날인 4월 19일 아침, 쉐비와 롱랜드, 십턴, 버니, 보스테드, 우드 존슨, 브로클뱅크로 구성된 한 조가 1캠프를 설치했다. 짐꾼과 현지에서 고용한 티베트인을 포함한 많은 사람이 모두 무거운 짐을 졌다. 한편, 러틀리지와 나는 꼭 필요한 비품을 열심히 골라내어, 캠프에 따라 다른 색깔의 상자에 담았다. 이 산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비품을 충분히 올려 보내야 하지만, 이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네팔의 솔라쿰부 계곡에서 이곳으로 오고 있는 짐꾼들이 도착하지 못하면, 이 일은 분명 쉽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에베레스트 서쪽의 티베트로 오려면 넘어야 할 고개가 겨울의 눈으로 여전히 막혀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오후에 우리는 망원경으로 에베레스트 위쪽 지역을 상세히 관찰했다. 에베레스트는 등반하기 최적의 상태였고, 우리가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이래 바람이 불 징후도 거의 없었다. 고성능 망원경으로 이 산을 관찰하는 것은 늘 멋진 일이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것같이 시간이 지나야 우리의 가정과 주장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알게 될 것이다. 고인이 된 위대한 등산가이자 명장인 J. P. 파라가 이따금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곤 했다. “코로 바위를 문질러 볼 때까지는 그 상태를 알 수 없다.”---p.164~165

2캠프
태양은 4시 15분에 사라졌다. 평소처럼 온도가 급락했다. 4시 10분에 내 텐트 온도는 18도였는데, 4시 20분에는 영하 6.6도였고, 4시 30분에는 영하 13.9도였다.
또다시 매우 추운 밤이었다. 침낭과 텐트에 불쾌한 서리가 덮였고, 최저온도는 영하 20도였다. 설사 영하 48도라 하더라도 에베레스트에서 낮은 온도는 그저 이야기의 절반일 뿐이다. 산소 부족 또한 고려해야 한다. 산소는 신체의 연료이고, 이 연료가 충분치 않으면 몸은 체온을 유지할 수 없다.
고소에서 산소가 부족하면 말초신경으로의 혈액 공급이 급격히 저하된다. 온도가 0도 정도일 때 침낭 밖에 맨손을 내놓으면 일이 분도 안 돼 손이 무감각해진다. 그리고 혈액 순환이 안 되면 회복이 쉽지 않다. 거푸 손을 세게 비벼야 하는데, 이 과정은 고통스럽다.---p.190

3캠프
오후 3시 15분, 예상보다 일찍 캠프에 해가 졌다. 평소처럼 밤이 되면서 눈이 그치자 온 세상은 엄청나게 추웠고, 구름 또한 서둘러 사라졌다. 지극히 깊은 우주의 심연에서 죽음의 액체처럼 추위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나는 돌아서기 전에 노스콜이 완전히 보일 때까지 빙하 쪽으로 계속 전진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1924년의 노스콜 사진 속 모습과 달리, 지난 9년 동안 노스콜에 이르는 비탈면이 상당히 변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1924년에 맬러리가 올라갔던 얼음 침니는 이미 사라졌고, 위협적인 빙벽이 콜로의 어프로치 루트를 수평으로 가로막고 있었다. 1922년 눈사태가 발생했던 이 어프로치 루트는 쉬워 보였지만, 이 시렁이 위험한 중앙 루트를 경유하고 있었다. 이 루트의 가장 큰 특징은 바깥쪽으로 비탈진 처마인데, 오른쪽 낮은 곳에서 왼쪽 높은 곳으로 콜의 벽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눈의 상태가 나빠지면 이 시렁 아래쪽으로 눈사태가 일어나겠지만, 지금은 그곳이 얼음이었다. 나는 힘없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이 얼음이 희미하게 빛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빙벽을 등반할 수 있으면, 그 처마로 가는 최고의 루트는 1922년의 루트를 따라가는 것이고, 처마를 지나면 콜의 꼭대기로 연결되는 좀 더 쉬운 루트가 나올 것이다.---p.205~206

노스콜
우리가 있는 곳에서 위쪽 비탈면을 관찰할 수 있었다. 1922년과 1924년의 원정대가 머물렀던 처마는 흔적도 없었다. 캠프 한 동을 설치할 정도의 유일한 사이트가 보이기는 했는데, 이미 말한 콜 꼭대기 하단 60~90미터 지점에 있었다. 그쪽으로 가려고 처음에는 눈의 상태가 좋지 않아 매우 위험해진, 급경사의 넓은 처마를 가로질러 갔지만, 그 빙벽 위쪽 루트는 온갖 눈사태의 자연 통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외떨어진 세락의 오른편을 지나, 칼처럼 생긴 멋진 얼음 왼편에 서 있는, 신기하게 층이 진 빙벽 밑에서 대각선으로 등반을 해나갔다. 삼십 분 후 우리는 그 처마 아래에 섰다. 그것은 반쯤 채워진 크레바스의 아랫입술이 만든 것이었다. 윗입술은 9미터 높이의 오버행 빙벽이고, 그 위쪽은 급경사의 비탈면이 콜의 꼭대기로 펼쳐져 있었다. 이 비탈면은 비교적 좋은 장소였다. 텐트를 칠 수 있는, 가로 12미터 세로 6미터의 평편하고 넓은 공간이었지만, 확실한 단점은 눈사태의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 처마는 우리가 기대했던 만큼 콜에 가깝지 않았다. 아마 더 위쪽에 캠프 자리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너무 지쳐서 더 이상 등반을 할 수 없었다. 나는 특히 다리에 힘이 없었고, 심장은 여전히 갈빗대를 들어 올리며 불쾌하게 계속 쿵쿵 뛰었다.---p.236~237

4캠프
우리가 있는 곳은 노스콜의 가장 낮은 지점이 아니었다. 그곳으로 내려가려면 딱딱한 눈으로 된 날카로운 능선을 횡단해야 했다. 능선은 바람이 강해, 우리는 험악한 돌풍에 맞서 균형을 잡으려 피켈을 사용했다. 그 능선은 놀라웠다. 베데커라면 “능숙한 사람들에게는 어렵지 않겠지만, 그 대신 완전하고도 확고한 이성이 요구되는 곳”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40여 미터 거리는 거의 평편했고, 이어 내려가면서 원래대로 넓어지며 콜의 가장 낮은 지점으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눈사태의 위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래쪽 처마에서 더 안전한 곳으로 4캠프를 옮겨야 한다면, 이곳이야말로 텐트 몇 개를 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넓은 곳이었다. 그렇지만 에베레스트와 북봉 사이에서 힘이 모인 북서풍이 최고의 세기로 안부를 가로질러 불어대는 곳이기도 했다. 콜의 위쪽으로는 이미 말한 대로 7,468미터에서 끝나는 길고 점점 가
팔라지는 설사면이 솟아 있고, 이 설사면의 한 쪽에는 오르기 쉬워 보이는 부서진 바위가 있는데, 그곳이 북봉의 실제 정상이었다.---p.256

5캠프의 심한 눈보라
우리가 고도를 높이고 있을 때 바람이 계속 강해졌다. 어떤 집채만 한 바위 뒤에서 휴식을 위해 멈췄지만 악의에 찬 바람의 공격을 조금도 피할 수 없었다. 이제 눈까지 심하게 내려 시야는 몇 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첫 조가 루트 표시를 위해 넘어지지 않도록 바윗덩어리로 받쳐놓은 붉은 깃발을 보고 우리는 때때로 환호성을 질렀다.
마지막 150미터는 정말 어려웠다. 주로 바람 속에서 균형을 잡느라 긴장해서 다리에 힘이 빠졌는데, 리듬을 타고 율동적으로 전진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나는 한 걸음마다 두 번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납처럼 무겁고 떨리는 한 발을 앞으로 그리고 위로, 헉! 헉! 천천히 의식적으로 노력해 무게가 앞발로 옮겨지고, 이어 다른 무거운 발을 앞으로 그리고 억지로 위로 내밀고, 헉! 헉! 이런 식으로 계속됐다.---p.278

6캠프
롱랜드가 말한, 내려가는 횡단 루트를 확신할 수 없어서 바위지대 위로 곧장 올라가기로 했다. 캠프는 거꾸로 된 V자형으로 펼쳐진, 두 개의 작고 얕은 협곡이 만나는 곳에 있었다. 이 협곡 중 하나가 편리한 루트를 제공해주었다. 그곳으로 들어가는 것은 옐로밴드 초입부터 어느 정도 거리까지 이어지는, 딱딱하게 굳은 넓은 눈 바닥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것을 의미했다. 첫 등반조가 만든 발디딤 흔적이 없어 스텝커팅이 필요했다.
십턴과 나는 카메트의 7,620미터 높이에서 스텝커팅을 한 경험이 있지만, 여기는 600미터가 더 높은 곳이다. 눈은 푸른색으로 얼어 있고, 정말이지 거의 얼음 같아서 스텝을 만들자니 여러 번 피켈로 타격해야 했다. 산에서는 보통 피켈이 눈이나 얼음에 부딪치는 소리가 가장 감미로운 소리로 들리지만, 이곳에서는 타격을 할 때마다 안 그래도 지친 몸에서 조금씩 힘이 빠져나갔다. 여섯 번을 타격하니 심장과 폐가 견딜 수 없을 만큼 마구 뛰어서 피켈에 기대고 헐떡여야 했다. 자칫 헐떡이는 것을 잊기 쉽지만, 산소를 마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행동이다. 서서히 피곤한 폐의 펌프질이 익숙해졌다. 다시 피켈 자루를 쥐었다. 휘두르고, 휘두르고 또 휘둘
렀다. 그러자 심장과 폐가 다시 천천히 그리고 세게 뛰었다. 이것이 계속 반복됐다.---p.330~331

공격
눈을 치우는 일이 너무 느리고 힘들어서 촉감에만 의지하기 시작했다. 즉, 홀드가 보일 때까지 바위지대의 눈을 치우느니보다 눈 아래 있는 홀드를 발로 더듬어서 찾는 방법을 신뢰하게 됐다. 하지만 이런 방법의 위험을 충분히 알고 있어서, 가능할 때는 언제든 추가적인 지지력을 얻으려고 피켈의 피크를 크랙에 끼워 넣었다. 분명히 이런 대비책이 재앙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주고 있었다. 무릎까지 빠지는 부드러운 눈이 덮인 급경사의 바위지대가 있었는데, 더듬는 내 첫 발이 눈 밑에 있는 홀드를 찾아냈다. 그것은 꽤 확실했다. 그래서 피켈의 피크를 가느다란 크랙 속으로 15센티미터 정도 밀어 넣었다. 그리고 주의 깊게 그 홀드 위로 다른 발을 올리면서 모든 체중을 앞발로 옮겼다. 뒷발이 앞발과 만나려는 순간 갑자기 스탠스가 무너졌다. 한순간 두 발이 다 미끄러지면서 내 체중이 피켈에 실렸다. 다음 순간 발놀림을 회복해서 다른 스탠스를 찾아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어서 내 부실한 뇌가 공포를 느낄 겨를도 없었다. 나는 완전히 본능적으로 행동했는데, 이런 일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기도 전에 이 사건은 끝나버렸다.---p.368~369

후퇴
빙하를 내려가는 우리 행렬은 슬프고 초라했다. 버니는 몸이 좋지 않아서 거의 걸을 수조차 없었다. 동상 입은 발이 그를 무척 괴롭혔다. 그는 몹시 고통스러워했다. 십턴도 여전히 두통을 겪고 있어, 한두 명과 함께 하루 더 3캠프에 남았다.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즐거운 산책 정도였다. 나는 발가락에 신경이 쓰였는데, 걸을 때마다 격심한 통증에 시달렸다.---p.405~406
최후의 시도
3캠프로 계속 전진하기 전에 우리는 망원경으로 에베레스트를 관찰했다. 에베레스트에는 한겨울 고산의 산봉우리만큼 눈이 많은 것 같았다. 곳곳에 눈사태가 지나간 자국이 보였다. 길고 좁은 고랑은 느슨한 분설이 미끄러져 내려온 흔적을 암시했는데, 옐로밴드와 노턴의 횡단 바위지대에서 특히 그랬다. 6캠프의 텐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눈에 묻혀 있는 것 같았다.---p.418

목차

서문
저자 서문

1장 다르질링
2장 시킴을 지나가는 행군
3장 나투 라
4장 캄파쫑으로
5장 티베트 평원
6장 쉐카르쫑
7장 롱북 계곡에서 베이스캠프로
8장 1캠프
9장 2캠프
10장 3캠프
11장 노스콜
12장 4캠프
13장 5캠프의 심한 눈보라
14장 6캠프
15장 공격
16장 후퇴
17장 최후의 시도

에베레스트에서 발견된 피켈
옮긴이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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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저자 프랭크 스마이드는 1900년 영국에서 태어났다. 초창기 고산등반 발전에 중심적 역할을 했고, 인기 있는 등산 관련 책과 사진집을 많이 남긴 작가이자 탐험가, 강사였다. 1920년대 말 몽블랑 브렌바 벽 등반으로 알프스 등반에 크게 기여했고, 1930년 칸첸중가 원정에 참여했으며, 1931년 에릭 십턴과 함께 카메트(7,756m)를 초등했는데, 이는 당시 인간이 등정한 가장 높은 산이었다. 이어 1933년과 1936년, 1938년 에베레스트 원정에 연속 참가했고, 1937년에는 가르왈 히말라야에서 마나피크(7,272m), 닐기리파르바트(6,481m)를 초등하는 등 여러 고봉을 오늘날 소위 ‘경량속공등반’이라 불리는 방식으로 등반했다. 스마이드의 1933년 에베레스트 등반기록인 이 책은 1937년 출간됐다. 그는 『칸첸중가 모험The Kangchenjunga Adventure』, 『카메트 정복Kamet Conquered』 등 27편의 다양한 책과 사진집을 남겼는데, 그중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꽃의 계곡The Valley of Flowers』은 하루재클럽을 통해 이미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소개됐다.

도서소개

에베레스트 원정기의 고전 - 1933년 에베레스트 원정을 기록하다!

에베레스트 초등이 이루어지기 20년 전인 1933년 프랭크 스마이드는 이전에 어느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에베레스트 최고점을 혼자서 올랐다. 로프도, 산소도 없이 악천후를 뚫고 이루어낸 그의 등반은 에베레스트 등반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시도 중 하나였다. 이 책은 당시 스마이드와 함께했던 1933년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대한 따뜻한 기록이다. 산악인이자 훌륭한 작가인 스마이드는 마지막 캠프까지 가져가서 썼던 일기를 토대로, 이 책에 등반의 극적인 상황과 산의 풍경에 대한 생생한 묘사를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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