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대접 받기 위한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작품은 2000년대 후반, 프랑스계 대형 마트인 ‘푸르미’를 배경으로 부당해고지시를 받은 주인공 이수인과 노동운동가 구고신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이수인은 입바른 소리를 삼킬 줄 모르고 끝없이 세상과 부딪히며 불화하는 인물이다. 조용히 살기 위해 직업군인을 그만두고 평범한 직장을 잡았지만, 회사가 직원들을 강제로 내보내라는 지시를 내린 탓에 다시 한번 세상과 부딪힌다. 이런 이수인을 돕는 구고신은 푸르미 근처에서 노동상담소를 운영하는 냉철하고 능수능란한 노동운동가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원칙주의자인 이수인과는 다르게 사람들에게 거침없이 다가가고, 목적을 위해서라면 때로는 무리한 방법도 꺼리지 않는다. 두 사람이 ‘평범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직원들에게 권리를 일깨우고, 함께 변화해가는 과정은 독자의 가슴에 불을 지핀다.
주변 인물들은 작품에 현실감과 생동감을 더한다. 맑은 성품으로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주는 주강민, 명문대 출신의 이수인을 시기하는 부장 정민철,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노동조합에 참여하지만 이수인과 반목하는 남동협, 오랜 싸움에 지친 본조 위원장 유종학 등 작가 특유의 인간에 대한 통찰로 만들어진 입체적 인물 군상은 『송곳』의 또다른 매력이다.
『송곳』의 백미는 스스로를 ‘노골리스트’라고 부르는 최규석만의 예리한 현실인식을 담은 대사들이다. 수많은 독자들에게 회자된 “사람들은 옳은 사람 말 안 들어. 좋은 사람 말을 듣지” “선한 약자를 악한 강자로부터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시시한 약자를 위해l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것”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와 같은 명대사는 작가의 인간 본성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압축적으로 전달한다.
심각하게 재미있다
한국 최초의 노동만화
노동문제의 복잡다단한 결을 그리기 위해 작가는 2008년부터 근 10년에 걸친 현장 취재와 인터뷰를 해왔다. 철저한 현장 취재에 바탕한 만큼 무거운 사건들이 잇따르지만, 작가 특유의 유머와 뛰어난 스토리텔링은 ‘노동문제는 재미없다’는 고정관념을 보란 듯이 깨낸다. “심각하게 재미있는” 『송곳』은 jtbc에서 2015년 드라마로 방영되며 더 많은 사람들이 노동조합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깨고 노동문제를 나와 가까운 일로 생각하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작품의 전반부가 회사의 부당해고 지시와 노동조합 결성을 중심으로 노사갈등을 보여준다면, 후반부는 더 강력해지는 회사의 탄압과 노동조합 내부의 균열을 그려낸다. 조합원 간의 갈등부터, 노동조합 지부와 본조의 갈등, 주인공 이수인의 내적 갈등, 이수인과 구고신의 갈등을 첨예하게 보여주면서 『송곳』은 현실을 한층 더 깊숙이 파고든다. 투쟁을 시작하는 것보다 지속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 대의를 위한 선택이 개인의 내면을 망가뜨리기도 한다는 것, 법을 지키자고 싸우는 사람들이 법을 어길 수밖에 없게 되는 구조 등, 노동문제뿐 아니라 다른 사회문제 혹은 인간관계에도 적용해 읽을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로 확장되며 더욱 깊은 울림을 준다.
한국사회를 꿰뚫는 송곳,
그 날카로운 울림의 대단원
『송곳』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일하는 사람에게는 마땅히 권리가 있으며, 평범한 사람들이 힘을 합쳐야만 그 권리를 찾고 정당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송곳』 연재 댓글난은 체불임금을 받았다는 이야기, 노동 공무원이 초심을 찾았다는 사연 등이 줄을 이으며 다양한 연령과 계층의 독자들을 위한 ‘노동상담소’가 되었다. 살면서 누구나 겪는 부조리함을 다시 짚어보고, 잃어버린 권리를 찾게 하는 역할도 했던 것이다. 정규교육 과정에 노동교육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져가는 요즘, 『송곳』을 교과서로 삼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송곳』은 사회적인 소재로도 대중적인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증거로서 한국 만화계에 큰 획을 그었다. 사회적 메시지, 작품성, 재미, 감동 모두를 놓치지 않은 『송곳』은 한국 만화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