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겨워 죽을 위험 대신에
굶어 죽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맞교환되는 세계를 원하지 않는다.”
『일상생활의 혁명』의 원제목은 『젊은 세대를 위한 삶의 지침서』(Traité de savoir-vivre à l'usage des jeunes générations)이다. 제목에서 보이듯이 이 책은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역설한 책이다. 1960년대 말 서유럽 젊은이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태어난 전후 세대로서 점점 더 고도화되는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커다란 문제에 봉착해 있었다.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이 가져다 준 물질적 풍요를 받아들이는 대신, 일상생활의 미세한 영역까지 장악한 규율과 통제를 받아들일 것인가? 다시 말해, 시스템에 길들여진 채 안전하게 생존하는 것에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시스템을 거부하고 삶의 쾌락을 추구할 것인가? 자본주의 체제를 위해 봉사하는 기계 부품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두려움 앞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기꺼이 시스템을 거부하고자 했다.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운동은 바로 그런 젊은이들의 생각이 드러난 결과였다.
상황주의에서 상황(situation)이란?
상황주의자들이 말하는 상황이란 물질적, 사회적, 정치적 조건들이 모인 상태가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상황은 사람들이 집단적,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구체적인 삶의 순간이다. 그것은 기존의 물질적, 사회적, 정치적 조건들이 모인 상태를 깨뜨리면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삶의 순간이다. 다시 말해 구속과 속박의 상태가 아니라 해방과 자유의 상태가 바로 상황이다. 상황주의자의 활동이란 바로 이 해방과 자유의 상태, 즉, 상황을 창조하는 활동이다. 이것은 주어진 물질적, 사회적, 정치적 조건들을 극복하고 초월하는 활동이라는 점에서 혁명적 활동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런 조건들이 일상생활을 제약하는 조건들이란 점에서 상황을 창조하는 것은 ‘일상생활의 혁명’이다. 상황주의자가 일상생활의 혁명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상의 삶 자체가 상품으로 전환돼 교환됨에 따라 인간은 삶으로부터 분리, 소외되고 오직 스펙터클을 통해 매개된 방식으로만 존재하고 생존하게 됐기 때문이다. 사회를 지배하는 스펙터클의 논리는 인간을 파편화하고 일상생활을 단편적으로 쪼갬으로써 인간을 수동적이고 비참한 관객, 진정한 쾌락을 느끼지 못한 채 지겨움 속에서 죽어가는 소비자로 전락시킨다. 따라서 삶의 풍요로움을 되찾아 직접 체험하는 총체적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상황을 창조해야 한다.
YOLO와 상황주의?
상황주의자들이 생각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발달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여전히 생존에 급급할 뿐 삶을 즐기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회자되고 있는 YOLO(you only live once) 문화는 어떤 측면에서는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운동의 현대적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체제는 YOLO를 끊임없이 소비문화의 한 형태로 환원시키려 한다. 한 번 사는 인생이니 미래를 생각하지 말고 아낌없이 소비하라. 이것이 자본주의 체제가 주입하고자 하는 YOLO의 모토이다.
하지만 YOLO는 그런 소비지상주의의 정확히 반대 지점에 서 있다. 사실 YOLO가 의미하는 바는 체제가 당신에게 제시한 정해진 길을 벗어나 완전히 다른 길을 걸으라는 것이다. 우리는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당연히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가고 학교를 졸업하면 당연히 취업을 해야 하고 취업을 하면 당연히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그것이 당연한가? 그것이 당연한 삶인가? 사실 그것은 생존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이런 의문이 바로 YOLO의 출발이고 바탕이다. 자본주의의 온순한 노동자이자 수동적 소비자로 길들여지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바로 YOLO의 본질이다.
혁명은 무질서한 놀이를 통해 가능해진다
우리는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정해진 시간에 일을 시작하고 끝내며 주어진 시간 동안 논다. 정해진 방식대로 길과 통로를 이동하며 정해진 공간에서 놀고 자고 정해진 공간에서 일한다. 이런 정해진 시간과 공간의 배분을 어지럽히는 일은 위험하거나 개념 없는 짓으로 간주된다. 무질서를 위험하고 폭력적인 것으로 배척하면서 자본주의 사회는 질서와 평화를 찬양한다. 그런데 질서는 평화를 만들지만, 이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라 순종과 예속의 평화일 뿐이다.
질서가 만든 평화는 지겨움만을 줄 뿐, 진정한 쾌락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혁명은 질서가 만든 평화를 깨는 일이다. 혁명은 무질서한 놀이를 통해 가능해진다. 처음에는 무질서한 놀이였더라도 놀이가 반복되는 순간, 놀이는 경직되고 창조적 힘을 잃는다. 바네겜은 “종종 봉기는 시작하자마자 눈부신 승리를 거두는데 그 이유는 봉기가 적에 의해 지켜지는 놀이의 규칙들을 깨뜨리고 새로운 놀이를 발명하고 각각의 투사들이 유희적 개발에 완전히 참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조성이 갱신되지 않으면, 그것이 반복되는 경향이 있으면, 혁명군이 정규군의 형태를 취하면, 우리는 점차 열의와 히스테리가 헛되이 전투적 취약함을 보충하고 옛 승리들에 대한 추억이 끔찍한 패배를 준비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 주장했다.
정해진 길을 따르는 일이 초래하는 근본적인 지겨움을 쉼 없이 거부하고 계속 새로운 놀이를 찾고 새로운 상황을 구축하는 것이 바로 YOLO의 의미이고 일상생활의 혁명이다. “지겨워 죽겠다”라는 외침 앞에서 자본주의는 상품을 소비하는 쾌락을 통해 지겨움에서 벗어날 것을 권유한다. 그러나 그것은 지겨움으로부터의 일시적 도피일 뿐이다. 지겨움에서 근원적으로 벗어나기 위해서는 생존의 안락함을 버리고 진정으로 삶을 만끽하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톱니바퀴가 되기를 거부하는 젊은이에게 이 책이 전하는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