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중에서∥
진실을 알기 전에는, ‘진’이라는 남자를 만나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 약용의 발을 죄고 있던 끈이 툭 끊어졌다. 누군가 약용의 곁으로 헤엄쳐 들어와 도운 것이다. 호흡곤란을 겪던 약용을 가냘픈 팔이 붙잡고 잡아채 올렸다. 약용은 다시 눈을 감았다. 어디선가 복숭아꽃 향기가 다시 났다.
“눈을 떠봐, 약용이! 어서 눈을 뜨라니까.”
가환이 울먹이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코에 비해 좀 큰 애체가 오르락내리락하며 움직이고 있겠지.
“약용이!”
환한 햇빛이 눈에 들어왔다. 약용은 얼굴을 찡그리며 천천히 누군가의 손을 붙잡는데, 눈이 기름하고 얼굴이 하얀 소녀의 얼굴이 들어왔다. 열여섯 살이나 되었을까? 그녀는 약용과 눈을 맞추다 이내 거둬들이고 서서히 일어났다. 약용은 두 손을 허우적대며 그녀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p. 58)
약용은 고드름처럼 늘어진 종유석 아래로 허리를 굽히고 냄새가 잡아끄는 곳으로 향했다. 저만치 약한 불꽃이 간신히 보여주는 시야에 하얀색 옷차림이 흘깃 보였다. 가환이 지레 놀라 뒤로 자빠져 앉았다. 약용은 성큼 발을 내디뎌 하얀색 희끄무레한 것에 다가갔다. 하얀 옷을 입은 남성 셋이 누워 있었고, 그들의 배 부분부터 옷자락이 헤쳐져 있었다. 그리고 열린 복강, 드러내진 늑골 사이로 비어 있는 배 속이 드러났다.
분명 장기가 있어야 할 텐데.
약용은 서양에서 들여온 책에서 인체의 해부도를 얼핏 본 적이 있었다. 그 안에는 심장, 간, 창자 등의 장기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바닥에 누워 있는 세 구의 시신은 배 속이 텅 비어 있었다. (p. 69)
“이미 18년이나 된 일이지만 자네도 아직 기억하지 않는가? 봄날, 자네와 내가 서학에 관해 논쟁을 하다 만난 그 남자 말일세.”
듣고 싶지 않았지만 이야기는 계속됐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오랜만이군. 나도 자네 앞에서 그 충격적인 만남을 다시 언급하고 싶지 않지만 이미 내 머릿속에서는 수천 번도 넘게 추악한 상상이 오갔네. 바로 자네와 내가 그 남자의 묘한 복수 의식에 알게 모르게 동참하지 않았던가?”
“그만하게나.”
약용이 완곡히 말렸다. 가환은 거문고를 돌려놓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 남자를 다시 만나지 않으면 평생을 두고 후회할 걸세. 여기서 일어난 사건은 그때 그 사건과 양상이 비슷해. 만약 동네 소문대로 괴질 환자들의 소행이 아니라면 무언가 그때 사건과 겹치는 부분이 있어. 살해된 양상이 그러하네.”
“끝난 일이야. 난 모레면 여기를 떠나야 하네.” (p.124)
“어서 오시게. 또 만나서 반갑군.”
약용은 빛이 환하게 나오는 돌기둥 뒤로 들어갔다. 손에 든 등잔불이 바닥에 떨어졌다. 광산에 가득 차 있던 축축한 습기가 이곳에는 없었다. 기분 좋은 느낌, 은은한 미향 속에서 청아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나가 끝났으나 그 하나는 끝난 것이 아니다. 하나가 시작되었지만 시작된 하나는 없다. 자네와 나의 만남은 끝도 시작도 없네. 언제나 반복될 뿐이지.”
약용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남자 ‘진’은 18년의 세월 동안 변한 데가 없었다.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약간 휜 눈썹, 반듯한 콧날, 선연한 눈빛이었다. 변한 것은 약용이었다. 이미 소년 시절을 건너 20대의 청춘을 지나 지금은 서른 초반의 흔들리는 눈빛을 가진 약용. 약용은 충격에 비틀거렸다. (p.188)
“그, 그렇다면 그자가 나의 미래까지 꿰고 있단 말인가? 그런 자를 어떻게 대적하겠는가? 그에게 협력하여 도모하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지 않은가?”
가환은 답답하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내가 지난 10여 년 동안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고 생각하는가? 주역에서 ‘진’은 하나의 상징을 이루지. 움직이는 것, 진동하는 것 외에도 검고 누런색, 맏아들을 뜻하기도 하네. 옛 어르신들이 봄날에 땅바닥에 귀를 기울이며 우레가 땅속에서 울리고 있다고 하는 것 본 적 없던가? ‘진’은 바로 생명의 태동을 말하네. 움직이는 것, 깨어나는 것, 천지개벽하는 것. 그게 바로 진일세. 그리고 우리를 기만한 그 남자는 이 세상을 뒤바꿀 천재이거나, 천하에 둘도 없는 악마일 걸세.” (p. 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