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략한 소개
『문학의 역사(들)』은 문학평론가 전성욱의 네 번째 책이고, 『바로 그 시간』(2010) 이후 두 번째로 출간하는 문학평론집이다. 기존의 글을 단순하게 수합하여 내는 관행화된 평론집과는 달리 나름의 일관된 주제의식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저자는 이 비평집이 단지 ‘문학평론집’이 아니라 ‘문학론집’으로 읽히기를 바란다.
비평집의 제목과 목차의 체제는 고다르의 <영화의 역사(들)>을 차용하고 변형하였다. 영화가 쇠퇴의 길로 접어들고 있을 때, 그는 이 영화의 제작에 착수했다. 그에게 영화의 쇠퇴는 단지 한 예술 장르의 퇴락이 아니라, 개인이 세계와 맺는 관계의 근본적인 변화를 야기하거나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저자는 소설의 쇠락을 목도하며 고다르의 역사적 사색을 떠올린 것이다.
출간의 의미
‘근대문학의 종말’을 근대적인 주체의 포스트모던한 갱신 속에서 읽어낸다
이 비평집은 근래에 나온 한국 소설들을 집중적으로 독해함으로써, 문학의 그 질적인 변화에서 역사적 전환의 기미를 포착하고 있다. 예술의 종말 혹은 근대문학의 종말이란 예술과 문학 그 자체의 종말이 아니라, 역사의 거대한 전환 속에서 낡은 것들이 허물어지고 새로운 것이 나타나는 어떤 전회 내지는 갱신을 일컫는다. 근대라는 한 시대의 역사적 종막을 ‘역사의 종말’이라고 한다면 탈냉전, 액체근대, 인지자본, 포스트휴먼과 같은 어휘들은 그 이후 펼쳐진 포스트 근대의 시간과 밀착된 개념들이라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던’은 그 전면적이고 급진적인 역사의 전환을 단적으로 집약하는 어휘이다.
이 문학론집의 핵심은 한국 소설을 통해 바로 그 역사적 전환의 요지를 근대적인 주체의 포스트모던한 갱신 속에서 읽어내는 데 있다. 근대적 주체란 모든 전제적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이다.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분배로부터의 배제, 합리적 지성과 문화적 향유로부터의 배제로부터 자기의 몫을 요구하고 역사에 등장한 것이 근대적 주체로서의 자유주의적 개인이다. 근대문학은 바로 그 리버럴한 주체의 지성과 정감을 바탕으로 성립된 일종의 제도였으며, 그러한 근대적 주체는 곧 네이션이라는 국민국가의 이념을 정초하는 핵심이었다. 근대문학은 신의 섭리라는 초월성으로부터 독립한 세속적인 개인의 예술이었다. 그 세속적 개인이 독창성과 자율성의 이념으로 고고하게 자기를 신성화하다가 마침내 파국에 이른 것이 근대문학의 종말이라는 것이다. 독창성의 이념이 새로운 것의 창조라는 강박을 낳았고, 그 강박이 낡고 진부한 것들의 부정이라는 증상으로 표출되었으며, 그렇게 극단적인 부정을 거듭하다가 끝내는 자기의 존재론적 기반까지 말소해버리는 파국에 이르렀다. 그것이 바로 모더니즘의 파국, 다시 말해 근대적 예술의 종언이다.
지성의 문학, 공감의 문학, 자유주의 문학에 대한 포스트모던한 비판
지금 한국문학은 근대에서 포스트 근대로, 역사적인 문턱을 건너고 있는 중이다. 근대적인 주체의 존재론적 근거가 무너짐으로써 새로운 주체가 탄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고 있다. 확고부동하고 나르시시즘적인 근대적 주체는, 유동적이고 개방적인 주체로 변신 가능하다. 그렇게 변신 가능한 포스트모던한 주체는 아집과 독아론을 극복하고 외부의 타자와 접속함으로써 자기를 그 무엇으로도 변이시킬 수 있는 잠재성의 주체이다. 문턱 건너의 문학, 근대문학 종말 이후의 문학은 바로 그 변신 가능한 잠재성의 주체에 대한 모색과 성찰로 드러난다. 이 평론집의 부제로 삼은 ‘소설의 윤리와 변신 가능한 인간의 길’이라는 구절 속에 그런 뜻이 집약되어 있다. 그것을 극기복례(克己復禮), 천하위공(天下爲公)이라는 의고적인 표현으로 대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전체를 위해서 멸사(滅私)하는 주체가 아니라, 자기 이외의 다른 세계와 만나기 위해 아집을 극복하는 극기(克己)의 주체. 그 주체가 이 세계의 정의와 공익을 위해 자기를 극복하는 것이 곧 윤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학론집은 한국에서 근대적인 문학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지성의 문학, 공감의 문학, 그러니까 그 부르주아적인 자유주의 문학에 대한 포스트모던한 비판을 함축한다. 여기서 특히 주의할 것은 그 비판이 계급주의에 입각한 프롤레타리아적인 비판이나 배타적인 민족주의적 비판이 아니라는 것이다. 강조하기 위해 거듭 밝히지만, 이는 자유주의 문학에 대한 포스트모던한 비판이다. ‘지성’의 한계를 보완하는 ‘또 다른 인지적 역량’의 발굴, ‘공감’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적대’의 현실에 민감하게 맞서는 주체, ‘개체의 자유’를 넘어 ‘공공의 정의’로 도약하는 정치, ‘서구적 근대성’에서 비서구적인 가치를 포괄하는 ‘다원적 근대성’으로, 이러한 것들이 그 포스트모던한 비판의 대략적 요지이다. 그리고 그것을 한국소설의 맥락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 타자와의 충돌을 감당할 수 있는 주체, 그 충돌을 통해 스스로를 갱신하는 주체
◇ 낯섦을 소비하는 새로움이 아니라 낯섦으로부터 새로워지는 진부함
◇ 조화로 미봉되는 여행이 아니라 불화로 파열되는 여행
◇ 세상의 이치대로 교양되지 않는 아이들
◇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도달해야만 하는 것
◇ 재현의 불가능성으로부터 불가능의 무릅씀으로
◇ 찬란한 하나의 별빛에서 별무리의 미약한 반짝임으로
이 책의 구성
이 책은 근래에 출간된 한국소설들에 대한 정밀한 비평이면서, 그 작품들의 저류를 흐르는 역사적 맥락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이다. 서문과 뒤이은 보론에서는 역사의 전환이라는 거시적 차원에 응대하는 새로운 문학의 논리를 구상하였다. 서구적 근대성에 치우쳐온 자유주의 문학론을 향한 포스트모던한 비판을 수행하면서, 우리가 도달해야 할 규제적 이념으로서의 문학적 이상을 ‘소설의 윤리와 갱신 가능한 주체’라는 논리를 통해 개진하였다.
본문은 모두 한국문학의 구체적 현장을 파고든 평문들이다. 염무웅, 미시마 유키오, 신경숙, 마광수, 장정일, 김원일, 윤정규, 조갑상, 권성우 등이 등장하는 I부는 한국의 파행적 근대화가 낳은 굴곡들이 낙인처럼 찍힌 한국문학의 표면과 심층에 대한 탐구이다. 황정은, 편혜영, 윤대녕, 손보미, 권여선, 정이현, 조해진, 고은규 등의 작품을 비평한 II부에서는 최근의 한국소설에서 드러난 역사적 변화의 기미를 포착하면서 앞으로 가능할 새로운 문학의 미래를 예감한다. I부가 지나간 시간에 대한 성찰이라면, II부는 현재의 시간에 대한 비판과 미래의 모색이다. 정영수, 조남주, 김사과, 김애란 등의 작품을 다룬 III부는 II부의 주제 중에서도 ‘현재의 시간’에 대한 심화된 접근으로서, 세속의 현실에 감응하는 소설의 예민함을 윤리적인고 미학적인 힘이라는 관점으로 독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