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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시인 윤동주

생명의 시인 윤동주

  • 다고기치로
  • |
  • 한울
  • |
  • 2018-04-09 출간
  • |
  • 320페이지
  • |
  • 40 X 205 X 23 mm /513g
  • |
  • ISBN 9788946064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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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병원’이던 시집은 어떻게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되었나
‘죽음’의 시대를 이기고 ‘생명’을 노래한 시인
저자는 윤동주의 삶과 시를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된다고 판단한 사건과 주제를 선별해 연대순으로 엮어간다. 먼저 이 책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표지 여백에 희미하게 남은 흔적에 시선을 맞춘다. NHK 다큐멘터리 촬영을 준비하던 중 저자는 윤동주 시인의 조카 윤인석 성균관대 교수의 집에서 윤동주가 남긴 자필 시집 원본을 볼 기회를 얻었다. 거기서 그는 윤동주가 남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자필 시집 원고 표지에 ‘병원(病院)’이라고 썼다가 지운 흔적을 발견한다. ‘병원’이었던 시집 제목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바뀐 배경에 무언가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을 것임을 직감한 저자는 당시 다큐멘터리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그 의미를 찾아 나선다. 이 책에는 그 제목 변경의 과정에서 윤동주가 겪었을 약 20일간의 드라마가 소개된다. ‘mortal’과 ‘immortal’ 개념, 시와 시집 구성의 변화, 기독교 정신, 윤동주가 남긴 메모 등을 통해 저자는 윤동주가 죽음의 시대, 생명이 경시되던 악덕의 시대에 고뇌와 극복을 거쳐 기적처럼 도달한 곳은 ‘죽음’이 아닌, 그것을 넘어선 ‘생명’이었다고 설명한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생명의 시인 윤동주’는 그렇게 탄생한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일본에서 윤동주의 시집을 처음으로 번역해 소개한 이부키 고(伊吹?)가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를 “모든 살아 있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번역한 것을 두고 시인의 뜻을 왜곡했다는 비판이 일었던 일을 상기하면서, 그 번역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지만 한편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에서 ‘죽음’ 너머의 ‘생명’을 읽어내는 것이 어떻게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핵심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길인지를 이야기한다. 얼핏 이는 윤동주의 시를 볼 때 민족주의적 해석에 치우쳐 있던 이들에게는 불편하게 느껴질 법한 부분이지만, 저자가 윤동주의 시에서 생명을 읽어낸 과정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런 해석과는 또 별개로 윤동주의 시를 바라보는 시야를 확장해줄 수 있는 해석임이 분명하다. ‘저항 시인’이라는 틀에만 가둬두기에 윤동주가 추구한 시 세계는 너무 넓다는 것이다.

일본인 친구들이 기억하는 윤동주의 모습과 일본 유학 생활
일본 시인과의 교제와 생전 최후의 사진
이어서 이 책 2장과 3장에서는 저자가 윤동주 다큐멘터리 취재 과정에서 접한 놀라운 사실이 소개된다. 윤동주를 만나 친분을 나눈 일본 시인이 있고 그가 생존해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윤동주와 친분이 있어 그를 기억하는 일본인이 단 한 사람도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한국에서도 윤동주와 친분이 있는 일본인의 이야기는 윤동주 관련 책 어디에도 등장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저자가 만난 ‘우에모토 마사오(上本正夫)’는 윤동주와 중학교 시절 ≪녹지대≫라는 시학지의 일원으로서 알고 지냈으며, 1942년에는 자신이 입원해 있던 일본의 병원으로 윤동주가 문병을 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고 밝혔다. 저자는 우에모토 마사오 진술의 사실관계를 꼼꼼하게 검증하는 한편, 이를 통해 윤동주의 발자취와 시에 남은 흔적, 사람됨을 그려본다. 우에모토 마사오는 윤동주에 관한 추억을 긴 산문시로 남겼는데, 저자는 이 시 전문을 본문에 인용해 소개한 뒤 이를 자세히 분석한다.
이 책 4장에서는 현재까지 거의 밝혀진 바 없는 윤동주의 일본 유학 시절 흔적들이 저자의 집념으로 조금씩 드러난다. 저자가 찾아낸 한 일본인 학우의 기억 속에는 “둘뿐이면 틀렸을 때 부끄럽습니다”라고 수줍게 말하는 윤동주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더 놀랍게도 그의 자택에서는 윤동주가 도시샤대학 학우들과 함께 우지강으로 소풍을 가서 찍은 사진이 남아 있었다. 윤동주 생전 최후의, 그리고 일본에서의 유일한 모습이 담긴 사진이 발견된 것이다. 당시 소풍은 윤동주가 귀국하기로 마음을 먹어 일종의 송별회를 겸한 것이었는데, 일본인 학우의 기억에 따르면 소풍을 간 우지강에서 윤동주는 우리말로 ‘아리랑’을 불렀다. 그 밖에 이 장에서는 윤동주가 자신 앞에서 심한 말을 내뱉은 일본인 교수와 충돌한 일이 소개되며, 체포 후 판결문과 윤동주를 아는 사람들의 기억을 토대로 윤동주의 교토 시절 행적을 차근차근 쫓아가 본다. 특히 그가 구금된 진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그 숨은 진실에 한 발 더 다가가 본다.

의문에 휩싸인 죽음, 과연 진실은 무엇인가
남겨진 자료와 관련자 취재를 통해 재구성한 마지막 나날
“드디어 윤동주의 마지막 나날에 관해 써야 한다. 슬프도록 마음이 무겁다. 아픔 없이는 한 줄도 나아갈 수 없다.” 이 책 5장 첫머리를 저자는 이렇게 시작한다. 윤동주가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어 최후를 맞기까지의 시간을 따라가는 저자의 무거운 마음은 5장과 6장에 곳곳에 짙게 배어 있다. 하지만 윤동주 죽음에 얽힌 의문을 풀어가는 동안 저자는 감정적 무게에 짓눌리기보다 철저히 객관적 자료에 의존해 사실관계를 따지며 앞으로 나아간다. 일본과 한국은 물론 미국에 남아 있는 자료까지 뒤져가며 진실에 다가가고자 애쓴다. 당시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이들과 잡역부, 교도관 등 관계자를 직접 만나 취재한 내용도 중요하게 다뤄진다.
주지하듯 오늘날 한국에는 윤동주가 주사를 통한 인체실험으로 사망했다는 것이 정설처럼 퍼져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객관적인 증거는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은 상황. 저자는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그 설에 남아 있는 모순된 지점을 밝혀낸다. 특히 인체실험설의 결정적 근거가 된 윤동주의 당숙 윤영춘의 회고에 남은 몇몇 오류를 짚으면서, 그런 잘못된 일부 기억을 보정하고 거기에 다른 자료와 관련 인물의 진술에서 찾은 사실들을 더함으로써, 불완전하나마 논리적 결함을 최소화한 조금은 다른 가능성을 도출해낸다.

그리고 시와 책이 남았다
윤동주가 남긴 메모와 일본어 장서로 읽어낸 시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듯이 이 책은 윤동주와 일본의 관계성을 연구의 중요한 주제이자 도구로 삼아 그의 시와 삶에 다가선다. 물론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더라도 윤동주를 이야기할 때 일본을 언급하지 않을 수는 없다. 무엇보다 그가 일제강점기를 살았고, 나라 잃은 아픔을 시에 담았으며, 더 나아가 일본에서 유학했고, 일본에서 최후를 맞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윤동주와 일본의 관계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윤동주의 유품으로 전해지는 소장 도서는 42권에 이른다. 그중 절반이 넘는 27권이 일본어로 된 책이다. 그중에는 우리가 사랑하는 시 「별 헤는 밤」에도 등장하는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등 일본어로 번역된 서양 문학가의 책도 있고, 철학과 예술학, 미학 관련 서적도 있다. 고집스럽게 우리말로 시를 쓴 윤동주였지만, 한편으로 일본어 서적을 읽고 창씨개명이라는 굴욕을 참으면서까지 일본으로 유학을 가 공부함으로써 자신만의 세계를 넓히기 위한 노력을 지속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가 읽은 책, 그리고 거기에 손수 남긴 메모를 통해 그것이 윤동주 시 세계에 미친 영향을 탐구하는 것은 그의 시를 이해하는 데 놓쳐서는 안 될 길잡이다. 윤동주가 남긴 발자취를 찬찬히 쫓아가던 『생명의 시인 윤동주』가 마지막 7장에 이르러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 탐구하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저자는 윤동주가 읽고 쓴 일본어와 당시 시대적 배경의 세밀한 뉘앙스까지 살펴가며 그 의미와 영향을 밝힌다. 독자들은 이 부분에서 당대 유명 학자들의 주장에 때로는 밑줄을 긋고 때로는 물음표를 그리면서 자신의 독자적인 사상을 구축해나가던 윤동주의 모습을 생생하게 떠올리게 될 것이다.

저자의 열정적인 취재와 노련한 분석이 돋보이는 이 책은, 단순히 일본인이 쓴 윤동주여서가 아니라 그런 집념이 맺은 결실을 통해 전해지는 사실의 무게와 새로운 발견의 기쁨 때문에 윤동주를 사랑하는 한국 독자에게도 큰 의미를 선사한다. 윤동주가 접한 일본의 문화와 언어에 접근하는 데 일정 부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연구자들에게도 이 책은 중요한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윤동주 시의 높은 경지를 맛본 이들이라면, 저자가 꿈속에서 만난다는 교토와 형무소 시절 윤동주의 작품을 속히 만날 수 있기를 더욱더 간절히 바라게 될 것이다.

[책속으로 추가]
나는 KBS와 NHK가 공동으로 제작해 1995년 3월에 방송한 윤동주 스페셜 다큐멘터리의 취재와 구성, 연출을 맡았다. KBS 측과 합의해서 취재를 시작한 것은 그 전년도 초여름 무렵이다. 문헌적 자료 조사와 함께 윤동주와 관련된 한국과 일본의 산증인들을 찾아 취재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 기울였다. 그러자 취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곧 놀랄 만한 정보를 접했다. 생전의 윤동주를 만나 친분을 나눈 일본 시인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우에모토 마사오(上本正夫)였다. _ 61쪽

일찍이 시에 눈을 떠 고명한 시인 김소운에게도 사숙했다는 우에모토는 전 조선 중학생 시인들을 모아 ≪녹지대≫라는 초현실주의 모더니즘 동인시지를 만들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일본어로 된 시지이기는 하지만, 일본인뿐 아니라 조선인 학생도 함께하기를 원했다. 시에 조예가 깊고 우에모토의 재능을 알아본 부산중학교 모리 도루(森亨) 부교장(1936년부터는 교장)은 그 계획에 동참했고, 어느 날 “멋진 시가 있다”며 조선인 학생이 썼다는 시를 보여주었다. 평양에서 나온 YMCA 잡지에 실린 시였는데 우에모토는 그 시를 일본어로 읽었다. 그는 그 시가 분명 「공상」과 같은 제목이었다고 기억했다. 그 시의 지은이는 윤동주였다. 우에모토는 계획 중인 시지 ≪녹지대≫에 꼭 참여해줄 것을 권유하기 위해, 마침 수학여행으로 만주까지 갈 기회가 있어 가던 도중에 평양역에서 윤동주와 만났다. 두 시간 가까이 이어진 대화는 일본어로 이루어졌고, 우에모토는 시지에 참여해줄 것을 열심히 호소했다. 하지만 윤동주는 “나는 한글로 시를 쓰고 싶다”라며 ≪녹지대≫ 참여를 고사했다. “한글을 정말 제대로 공부해야 한다”라고도 말해 민족 언어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여주었다. _ 70쪽

윤동주는 누마타를 찾아갔다. 7년 전에 단 한 번 평양역에서 만났을 뿐인 ‘시우’를 문병했다. “백의를 입고 있던 나를 그는 연민이라는 말로는 표현되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꽉 안아주었다.” 우에모토의 기억 속 윤동주는 어떻게 해도 윤동주답다. 너무나도 윤동주 그 사람의 모습이다. “연민이라는 말로는 표현되지 않는 미소”에서, 윤동주의 마음에 넘쳐나던 진심이 무언중에 드러난다. 우리는 이 시기 윤동주가 지은 미소의 깊이를 알고 있다. 마지막 귀성이 되어버린 1942년 여름, 친지들과 용정에서 찍은, 삭발한 머리에 교복 차림으로 시원한 미소를 띤 사진은 여러 윤동주의 사진 중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기며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있을 것이다. _ 96~97쪽

NHK 디렉터였던 내가 윤동주 다큐멘터리 리서치를 시작한 것은 1994년 봄이었는데, 가장 먼저 한 일은 어떻게든 윤동주를 기억하는 사람을 일본에서 찾아내는 것이었다. …… 1945~1946년 무렵에 두 대학을 나왔으리라 생각되는 영어영문학 관련 학과 졸업생들에게 빠짐없이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윤동주는 쉽게 다가와 주지 않았다. 기억에 없다, 모른다는 답변만 듣게 되면서 헛수고가 되풀이되었다. 한없이 깊은 어둠처럼 느껴졌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 역시, 어차피 또 같은 답변을 듣겠지라는 묘한 예감으로 마음의 준비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화기 너머에서 역사의 어둠을 뚫기라도 하듯 뜻밖에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히라누마 씨 말씀이지요. 네, 기억합니다. 조선에서 왔던 히라누마 씨!” _ 136쪽

기타지마는 조용한 ‘히라누마 씨’가 했던 한마디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영어영문학과 학생으로서 프랑스어 수업을 들은 이는 두 여학생 외에 윤동주뿐이었는데, 어느 날 모리타가 아파서 결석했을 때, 수업 시작 전 잠시 동안 교단 앞에 나란히 앉았던 ‘히라누마 씨’가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고 한다. “둘뿐이면 틀렸을 때 부끄럽습니다.” _ 138쪽

기타지마 마리코가 전하는 윤동주에 관한 추억은 상기의 증언에 머물지 않았다. 자택에 있던 낡은 앨범에서 영어영문학과 학생들이 ‘히라누마 씨’와 함께 찍은 사진이 나온 것이다. 담뱃갑 절반 정도 크기의 작은 사진이었는데, 교토 근교의 우지시(宇治市)를 흐르는 우지강에 달린 아마가세(天ケ瀨) 현수교 위에서 두 여학생을 포함한 아홉 명의 학생의 모습이 담겨 있고(촬영한 남학생을 포함하면 일행은 10명), 윤동주는 그 중앙에서 조금 눈이 부신 듯한 쑥스러운 얼굴로 서 있다. 그때까지는 일본에서 윤동주를 기억하는 인물이 알려지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찍은 사진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었다. 그랬던 것이 증인과 동시에 사진까지 나온 것이다. 기쁨은 컸다. 하지만 당시에는 기쁨에 들떠서 통찰력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했다. 무언중에 사진이 말해주는 몇 가지 중요한 부분을 간과했었다. 그것을 깨닫게 된 것은 방송이 나간 지 15년 가까이 지나고 나서였다. _ 141쪽

사진이 나옴으로써 기타지마의 기억도 점차 세밀해졌다. 그에 따르면, 윤동주는 이날 점심식사를 한 후에 급우들의 부탁대로 강가에서 조선 민요 [아리랑]을 모국어로 불렀다고 한다. 송별 소풍이었다고 한다면 주인공인 ‘히라누마 군’이 노래 한마디 선보이는 것은 당연한 절차였으리라. [아리랑]을 부른 것은 고국의 노래를 불러달라는 학우들의 요청이 있어서였는지도 모르고, 혹은 조선에서 온 유학생으로서 귀국 인사로 들려줄 노래로는 민족을 대표하는 노래가 어울린다고 생각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_ 146쪽

윤동주에 관한 글에서 한글로 시를 쓴 것이 죄가 되었다는 내용을 가끔 접하게 되는데, 경찰과 사법기관에 남은 자료에 따르면 이는 바르지 않다. 세 가지 자료 중에 한글로 된 시 쓰기를 언급한 부분은 한 군데도 없다. 사건의 핵심이 된 것은 독립을 위해 조선에서의 징병제 시행을 역으로 이용하는 무장봉기론이었는데, 이는 아무리 봐도 송몽규가 주체가 되어 부르짖고 윤동주는 열심히 논리를 펴는 송몽규 옆에서 수긍하며 앉아 있었다고 생각된다. _ 152쪽

너무나 안타까운 점은 교토 시절에 쓴 시 작품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릿쿄 시절의 시는 「쉽게 씌어진 시」를 포함해 다섯 편이 서울의 친구 강처중에게 보내져 간직되었다. 하지만 교토 시절의 작품은 어떤 시였는지 단서조차 없다. 1994년 취재 당시 윤동주를 체포한 시모가모(下鴨) 경찰서에 조사를 신청했지만, 유고를 비롯한 자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답변을 받았다. 민족주의가 노골적이고 반일·항일적인 기분을 부추기는 것이었다면, 경찰은 시를 간과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학과 인연이 먼 형사가 틀림없이 일본어로 번역시켰을 시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물을 만하지 않다고 판단된 것으로 보인다.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도달점으로서의 그 시를 알고 싶다. 교토에서의 나날, 윤동주의 시는 쉽게 씌어진 것이었을까? _ 160~161쪽

전국 총수를 보면 사망 복역수 수는 1350명에서 7201명으로 5.3배로 증가해, 후쿠오카 형무소는 전국 평균 상승률보다 조금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4배로 불어난 후쿠오카 형무소만의 숫자를 보고 윤동주의 죽음과 관련지어 이것이 형무소 내에서 인체실험이 있었다는 증거라고 논하는 경우가 여기저기에서 보이는데, 다른 형무소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후쿠오카만의 숫자를 그 근거로 다루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_ 184쪽

면회실에 들어가기 전 멀리서 눈에 띈 것인지, 면회 후에 실제로 복도를 걸어가 의무실 앞에서 목격한 것인지, 어쨌든 50명의 푸른 죄수복을 입은 젊은 복역자들을 본 것은 틀림없으리라. 다만 이를 모두 ‘조선인’ 수형자라고 기술해버린 것은 윤영춘의 선입견 내지는 문장의 지나친 비약일 것이다. 면회실에서 주사와 관련한 이야기를 송몽규로부터 들었기 때문에 아마도 그 인상을 안은 채 의무실에 줄지어 있는 복역자 역시 그 주사를 맞는 사람들이 틀림없다고, 그렇다면 윤동주, 송몽규와 같은 조선인일 것이라고 굳게 믿어버린 것 같다. 실제로 그곳에 줄지어 선 수형자들은 조선의 독립운동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푸른 죄수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 일반 죄수였던 것이다. 즉, 절도나 폭행 등 일반 범죄로 수감된 복역자이며, 붉은색(감색) 죄수복이 의무화된 엄정 독거 치안유지법 위반 수감자와는 수감된 이유도, 수감 후의 대우도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 _ 201~202쪽

거듭 말하지만, 자료나 증언을 통해 아무리 조사해보아도 후쿠오카 형무소 전체적으로 아우슈비츠 같은 형태의 학살 행위는 발견되지 않는다. 윤영춘의 회상에 있는, 송몽규가 교도관의 눈을 피해 짧게 조선어로 말했다는 주사 관련 부분 이외에는 투약실험, 인체실험을 의심케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규슈대 의사는 ‘연구’를 목적으로 후쿠오카 형무소에 들어갔다. 윤동주와 송몽규의 사정이 양인현이 복역하고 있을 무렵과 다른 것은 당시 형무소 내 식량 사정의 악화로 병사자가 급증했다는 점이다. 형무소에서의 사망자 통계는 1943년에 64명, 1944년에 131명, 1945년에는 259명이나 된다. 너무 지나친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이는 다시 말해서 매일같이 병사자가 나오는 상황을 이용해 생명에 관계되는 터무니없는 실험을 행했다 하더라도 눈에 띄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도 된다. _ 216쪽

동생 윤일주에 의해 전해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보내왔다는 엽서의 내용이 유일하게 만년(이라 말하기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젊지만!)의 윤동주의 마음에 닿을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1944년 초가을, 윤일주가 형무소에 있는 형에게 “붓 끝을 따라온 귀뚜라미 소리에도 벌써 가을을 느낍니다”라고 써 부친 편지에 대해 윤동주가 답장을 보낸 것으로, “너의 귀뚜라미는 홀로 있는 내 감방에서도 울어 준다. 고마운 일이다”라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_ 226~227쪽

다카오키가 주장한 논지에서 이 부분이 중요하다는 것을 윤동주도 충분히 알고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곁줄이 그어져 있다. 인용한 내용의 시작 부분 위쪽 여백에는 ‘◎’도 표시되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윤동주는 그 위에 의문부호 ‘?’도 써넣었다. 이 부분은 주목을 요한다. 중요한 곳에 표시해두는 차원을 넘어 윤동주의 심리가 미묘하지만 분명히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의 본질, 예술의 가치를 읽으면서 깊이 공감한 듯한 모습을 보인 윤동주였으나, 어느 의미로는 유물론자인 다카오키 요조의 면모가 가장 생생하게 드러나는 이 대목에서, 논지상에서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의문부호를 표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카오키의 계급사관적인 견해에 대해 의문이 들었던 것일까? _ 255~256쪽

윤동주는 왜 『맹자』의 이 대목을 인용해 메모를 남겼을까? 이 인용을 근거로 윤동주가 맹자의 영향을 받았다고 설명하는 연구자도 있다. 「서시」의 첫머리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을, 맹자가 말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고(仰不愧於天)”(「盡心 上」)의 문맥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방향까지 있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서 그러한 방향으로는 들어가지 않는다. 맹자의 영향보다 여기서 훨씬 중요한 것은 왜 이 구절이 다름 아닌 다카오키 요조의 『예술학』 표지에 적혀져야 했는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하나의 추정 자료가 되는 것은 다카오키의 저서를 구입한 1939년, 거의 시가 쓰이지 않았던 그해 9월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도 수록된 「자화상」이 읊어졌다는 사실이다. _ 263~264쪽

윤동주는 두 가지 친화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앞서 들었던 것과 같이 반파시즘 문화인에 대한 친화성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런 경향을 공유함으로써 맺어진 학우들과의 친화성이다. 이 두 가지 친화성 속에서 드디어 윤동주의 개성이 움트며 도드라진다. …… 윤동주 혼자 그 친화성의 고리에서 빠져나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두 가지 친화성을 유지하는 가운데서도 독서 체험을 거듭해 윤동주는 ‘자신에게 되돌아간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거기에서 드디어 윤동주는 시인에게 핵심이 되는 것, 흔들림 없는 자신의 광맥을 발견해가게 되는 것이다. _ 267쪽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마지막에 놓인 시 「별 헤는 밤」에는 윤동주가 걸어온 길이 집대성되어 있다. 어린 시절의 그리운 기억 속 풍경 하나하나가 밤하늘의 별빛 속에 겹쳐 떠오른다. 이 또한 하늘을 우러르는 시다. 독서 체험이 결정체를 이룬 작품이기도 하다.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등 그가 소장했던 서적에 포함된 시인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만이 아니다. 다양한 시론으로 단련된 윤동주 시의 독자적인 미학이 평온하면서도 뜨겁게, 그리고 그립게 광활한 우주적 시 공간을 조성했다. _ 294쪽


목차


한국어판 서문 / 머리말

제1장 ‘병원’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시인 탄생의 숨은 자취에 관한 일본어 메모
1. 시집의 원래 제목은 『병원』 / 2. 영국에서 만난 ‘mortal’과 「서시」의 참뜻 /
3. 성경 속의 ‘mortal’ / 4. ‘immortal’로 덧붙여진 「별 헤는 밤」 /
5.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탄생 / 6. 메아리치는 ‘생명’ / 7. 영원한 시인

제2장 ‘반한(半韓)’ 시인이 쓴 ‘나의 벗’ 윤동주 1: 윤동주와 교류한 일본 시인 우에모토 마사오
1. 윤동주의 ‘시우(詩友)’ 우에모토 마사오 / 2. 우에모토 시인의 증언, 윤동주의 추억 /
3. 좌절된 추적, 우에모토 시인과의 그 후 / 4. 시집을 통해 더듬어본 우에모토의 발자국 /
5. 한국 자료 속 ‘상본정부(上本正夫)’ / 6. ‘반한’ 시인과 윤동주 /
7. 우에모토의 증언으로 알게 된 윤동주의 ‘사랑’

제3장 ‘반한(半韓)’ 시인이 쓴 ‘나의 벗’ 윤동주 2: 모더니즘의 해후와 괴리
1. 윤동주 「공상」의 미스터리 / 2. 평양역에서의 해후와 이별의 의미 / 3. 쇼와 연호가 붙은 시 /
4. ‘쇼와 14년 9월’의 시 세 편 / 5. 기쿠시마 쓰네지의 「눈사태」로 더듬어보는 윤동주의 시심

제4장 도시샤의 윤동주, 교토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발견된 생전 최후의 사진을 단서로
1. ‘히라누마 도주’를 찾아서 / 2. 윤동주가 말한 “부끄럽습니다” /
3. 발견된 생전 최후의 사진이 말하는 것 / 4. “그런 마음이 아닙니다!”: 교수 집에서의 작은 ‘사건’ /
5. 윤동주, 교토에서의 9개월 / 6. 교토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제5장 후쿠오카 형무소, 최후의 나날 1: 의문사의 진실을 찾아
1. 절망적인 ‘벽’ 저편에 / 2. 북3사의 ‘거주자’들 /
3. 미국에 있는 자료 속 윤동주와 치안유지법 위반 수형자들 / 4. 악화하는 식량 사정 /
5. 죽음의 대합실 / 6.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윤동주를 본 남자

제6장 후쿠오카 형무소, 최후의 나날 2: 영원한 생명의 시인
1. 윤영춘의 회상 / 2. 형무소 내의 ‘질서’와 빠져나갈 구멍이 된 규슈대 의학부 /
3. 최도균의 이상한 체험 / 4. 송몽규의 증언에서 도출된 것 /
5. 규슈대 의학부와 바닷물을 이용한 대용 혈액 연구 / 6. 여전히 가로막힌 ‘벽’ /
7. 생명의 숨결, 생명의 시인

제7장 그리고 시와 책이 남았다: 소장 일본어 서적으로 보는 윤동주의 시 정신
1. 유품 중 일본어 서적 / 2. 윤동주가 소장한 일본어 서적 27권 /
3. 다카오키 요조의 『예술학』, 정독한 흔적으로 보는 마음의 모습 /
4. ‘자신에게 돌아가라’, 『맹자』 인용이 말하는 것 /
5. 발레리에 대한 사랑, 시론으로 살피다: ‘포에지’ / 6. 생의 철학, 딜타이에게 기대하다 /
7. 하늘을 우러러본 윤동주

맺음말 / 윤동주 연보 / 부록: 「반한 그 73」, 「풍경」, 「눈사태」 원문 / 옮긴이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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