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생에서 여러 번 불행했다”로 시작하는,
바사니의 ‘페라라 소설 연작’ 중 가장 젊고 어두운 날의 소설
제발트, 모라비아, 칼비노 등 문학의 대가들이 극찬한 작가이자 안토니오니, 데시카, 파솔리니 등 영화 거장들이 사랑한 현대소설계의 대부 조르조 바사니(1916~2000)는 20세기 이탈리아 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하나다. 볼로냐에서 태어나 유년기와 청년기를 페라라에서 보낸 유대인 작가인 그는, 이차대전 파시즘 체제하의 인종법과 유대인 박해라는 역사적 체험과 기억을 문학적으로 가장 잘 구현해낸 인물로, 페라라 유대인 공동체 전체의 증인이자 기록자로 평가받는다. 그래서인지 바사니 앞에는 곧잘 ‘기억의 작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또한 직접 체험한 ‘기억’에서 지인들의 목소리를 불러들여 쓰기에, 그의 작품은 서술자와 행위자의 목소리가 혼재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적인데, 이로써 매우 독특한 리얼리티를 내뿜는다.
바사니의 ‘페라라 소설 연작’ 중 작가의 가장 젊은 학창시기가 녹아든 이 소설 『문 뒤에서Dietro la porta』(1964)는 이런 전반적인 자전적 서술기법과 특징들이 담긴 성장소설이다. 화자는 첫 문장을 “나는 인생에서 여러 번 불행했다”고 시작하면서, 그중에서도 자신에게 “유독 암울하던 시기”였던 고등학교 일학년 무렵을 회상한다. 이 기억 속에서 세월도 치유해줄 수 없었던, 문 뒤에서 엿듣게 된 진실의 민낯은, 유대인 소년에게 처음으로 내리꽂힌 생의 비수다. 서늘한 대기에 회오리치는 페라라 소년들의 질풍노도하는 이 풍경화는, 조국 이탈리아에 유린당한 페라라 유대인 공동체의 다가올 운명을 예고하는 전경과 같다. 작가는 이 자전소설을 『핀치콘티니가의 정원』을 비롯해 여러 대표작을 발표하고 비교적 늦은 나이인 마흔여덟에 발표했다. 제목에서 보다시피, 간결한 서사와 강렬한 서정이 압축적으로 녹아든 이 작품은, ‘문 뒤에서’ 눈뜬 생의 이면에 대한 통렬한 자각의 산물이다. 바사니는 자신의 소년기에서마저 어슴푸레 감지되던 소외된 인간의 근원에 자리한 어두운 폭력성을 목격했고 그 고독한 상처를 글말로 옮겼다.
눈앞의 진실과 마주할 것인가, 문 뒤에서 물러날 것인가
: 망설이고 엿듣는 자의 고통스러운 자기발견과 진실의 이중성
1929년에서 1930년 사이, 아직은 파시즘 광풍이 휘몰아치기 전인 페라라, 이제 막 신학기가 시작한 여느 곳과 다름없는 교실, 주인공은 교장도 선생도 학급 친구들도 모두 마음에 안 든다. 아무하고도 말을 섞고 싶지 않아 스스로 고립을 택하고 맨 끝줄 구석 자리에 앉는다. 그런 주인공에게 두 친구가 생긴다. 모두가 기피하는 전학생으로 나만 바라보는 풀가와, 모든 면에서 완벽한 다가가고 싶은 카톨리카. 가난뱅이에 외지인에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풀가는 외면할 수 없는 상처투성이 친구로서 내게 성적 욕구와 폭력성을 일깨우며 전에 없던 인생의 이면을 비춘다. 독실한 가톨릭교도이자 절대 이길 수 없는 반의 우등생 카톨리카는 좀체 곁을 내주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카톨리카가 먼저 다가와 귀가 솔깃한 제안을 건네며 그의 집으로 초대하는데… 주인공은 카톨리카가 밝혀내려는 자신에 대한 풀가의 위선과 가면을 마주하고 과연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이와 동시에 자신 안의 진실과도 마주할 수 있을까. 귀찮게 따라붙던 과거의 관계 사슬을 끊고 이번에는 어떤 삶의 국면을 택할까. 세월이 지나도 선명한 상처로, “남몰래 피흘리던, 온전히 비밀한 상처로 남은” 바로 ‘그날’의 고통스러운 사건이 일어난 그 문 뒤로, 작가는 한 발 한 발 그 격랑 이는 감정의 정경 속으로 독자들을 데리고 들어간다.
마지막에 내뱉는 내적 독백은 이 작품의 백미이자 하나의 선언처럼 읽힌다. “나는 완강하게, 깨어나지 않은 채, 단절과 적대감이라는 타고난 운명에 사로잡힌 채 문 뒤에 또다시 숨어 있었으니, 활짝 열려고 생각했대도 헛일이었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것도. 지금도 못하고, 앞으로도 못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나’는 세상과 그 어떤 타협도 원하지 않는 반항하는 인간의 첫 초상이다. 소년에서 성인으로 나아가는 문턱에서, 이 야누스적 세상의 얼굴과 처음으로 마주한 ‘나’의 고통스러운 자기발견은 곧 깨어남의 표지다. 그 인식은 폭력을 수반하는 진실과의 섣부른 대면을 유보하고, 고독 속에서 적대와 저항으로 다음의 행동을 사색하는 햄릿의 망설임을 연상시킨다. 작가의 유년기 자화상이 어른거리는 이 빛나는 성장소설은 독자로 하여금 인생의 첫 단절에서 오는 상처를 저마다 꺼내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