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늦게 글을 배운 어머니들의 시 100편을
김용택 시인이 엮고 글을 보태다
글을 읽고 쓰는 일이 아무렇지 않은 사람들은 글을 모르는 이들의 답답한 속을 짐작하기 어렵다. 글을 모르면 당장 불편하고 서럽고 안타까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간판의 글자도 읽을 수 없고, 버스를 탈 때도 사람들에게 물어봐야 한다. 은행 일을 보거나 택배를 보낼 때도 “그것도 모르냐”고 핀잔을 받기 일쑤다. 심지어 동화책을 읽어달라고 조르는 손자도 무섭다. 온갖 서러움과 불편함 속에서 못 배운 한이 가슴에 사무친 어머니들이 뒤늦게 글을 배워 당신들의 마음을 시로 그려냈다.
이 책에 실린 시는 2012년부터 2017년까지 교육부와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이 주관한 ‘전국 성인문해교육 시화전’에서 수상한 작품들 가운데서 100편을 엄선해 엮은 것이다. 그동안 한글교실에서 글을 배운 할머니들이 지역 단위로 문집을 낸 적이 있는데, 이 책은 김용택 시인이 시화전 수상작들 가운데서 시를 고르고 거기에 생각을 보태 더 특별하다. 시를 쓴 어머니들은 이제 겨우 글눈이 트여서 맞춤법도 정확하지 않지만, 시에 담긴 저마다의 사연이 따뜻한 감동을 안겨준다.
어머니들의 시에 생각을 보태가며 김용택 시인은 몇 번이나 목이 메고, 고개가 숙여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사는 것이 부끄러웠다고, 글을 쓴답시고 얼마나 건방을 떨었는지 알게 됐다고 고백한다. 어머니들의 시가 이렇듯 시인을 울린 것은 꾸밈없고 거짓이 없는 날것 그대로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으로 읽다 보면 마음이 젖어들어 자신도 모르게 눈물짓게 되고, 웃음이 터지고, 읽어갈수록 힘이 난다.
희망이 힘을 잃어가는 세상에
희망으로 피어난 엄마들의 ‘꽃시’
글을 처음 배운 할머니들의 시가 인터넷 공간에서 단편적으로 회자될 때, 네티즌은 시가 주는 순수한 감동에 빠져들었다. 어떤 시인은 할머니들의 시를 읽고, “이 땅의 시인들 다 죽었다!”라고 탄식했다. 이 책에 실린 100편의 시를 쓴 어머니들은 모두가 시인이다. 그중 최고령자는 88세, 지적 장애를 가진 45세 엄마도 있고, 남편 하나 믿고 한국으로 시집 와 한글을 배운 이주여성도 있다. 나이가 많든 적든, 장애가 있든 없든, 그들은 글을 배우고 세상에 다시 태어난 듯 벅찬 행복과 희망을 발견하고 그 감정을 시에 담아냈다.
시의 말미에 김용택 시인이 풀어내는 생각 가운데는 작가의 어머니와 관련된 일화도 담겼다. 아들이 글을 쓰는 사람인데 시인의 어머니도 글을 몰랐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며느리에게 글을 배워 아들이 쓴 책을 떠듬떠듬 읽을 만큼은 됐다. 어머니로부터 삶이 곧 공부라는 것을 배운 시인과 어머니의 사연도 가슴 뭉클하다.
‘엄마의 꽃시’는 감사와 희망을 말한다. 사는 게 힘들다고 푸념하는 인생들에게 나를 보라고, 칠순에도 팔순에도 글공부 시작하고 인생을 새로 시작한 사람이 여기 있지 않느냐고 말한다. “좀 늦으면 어떻고 더디 가면 어떠니”라는 시의 한 구절처럼, 거침없고 당당한 어머니들의 삶 앞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이 시를 읽고 그럭저럭 살던 인생들이, 인생을 다시 시작하는 희망찬 목소리가 이 세상에 울려 퍼질 것입니다.”(p.182) 김용택 시인의 말처럼 ‘엄마의 꽃시’는 용기와 희망의 메아리로 우리들 가슴에 울려 퍼질 것이다.
“장하다 우리 딸! 학교를 가다니
하늘나라 계신 엄마 많이 울었을 낀데”
사무치는 그리움들이 가슴을 울리는 시 &
어제와 다른 오늘에 마음이 설레는 시
1부에 수록한 시들은 가족에게 미처 표현하지 못한 사랑이 절절히 녹아 흐르는 작품들이다. 가난해서 학교 근처에도 못 가본 어머니들이 글을 배우고 나서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사랑하는 가족. 딸이 공부하는 모습을 누구보다 대견하게 여길 엄마, 세상을 먼저 떠난 남편, 어렵게 키워낸 자식 들이다. 그들에게 적어 보내는 마음에 “사느라고 참 애쓴” 어머니들의 모진 세월이 담겨 있다. 그토록 힘든 세월을 건너왔지만, 어머니들이 쏟아내는 감정이 지난날에 대한 원망이나 회한보다는 ‘인생에 대한 감사함’이라는 데서 마음이 숙연해진다.
2부에 담은 시는 글을 알고 나서 느낀 벅찬 행복과 기쁨을 노래한 시들이다. “굳은 머리, 굽은 손, 무디어진 혀”를 놀려가며 따라 읽고 쓰는 기쁨을 눈앞에 그려 보이듯 생생하게 표현한다. 글눈이 트인 오늘은 어제와 다른 오늘이다. 이제 글자를 봐도 주눅 들지 않고, 은행도 척척 다녀오고, 간판에 적힌 글자도 눈에 쏙쏙 들어온다. 팔순 나이에 지팡이 짚고 가방 메고 학교 가는 일이 이리 좋을 수가 없다. 너무 좋아서 책을 안고 자고, 책에다 뽀뽀도 한다. 그 순진무구함에 미소가 번지고, 시를 읽어갈수록 그냥 기분이 좋아진다.
“좀 늦으면 어떻고 더디 가면 어떠니”
자연이 말해주는 것을 받아쓴 시 &
다시, 희망으로 살아가게 하는 시
3부에는 자연이 말해주는 것을 받아쓴 시들을 담았다. 시를 쓴 어머니들 중에는 시골에서 평생 농사짓고 살아온 이들이 많다. 그래서 ‘글눈’보다 먼저 트인 것이 ‘일눈’이라는 어머니들이다. 글자를 알고 나니 마른 땅에 콩을 심을 때도 글자를 생각하고, 내리는 빗줄기 속에서도 글자를 본다. 보이고 들리는 것을 글로 써내니 그대로 삶처럼 생생한 시가 된다. “농사짓고 사는 사람들은 헛짓을 하지 않습니다. 농사짓고 사는 사람들은 헛소리를 하지 않습니다.”(p.139)라는 김용택 시인의 말이 가슴에 와닿는다.
4부는 글을 배우고 찾게 된 인생의 희망을 노래한 시들이다. 세상 천지에 무서울 게 없던 어머니들에게 가장 무서운 놈이었던 ‘글자’를 잡았으니 앞으로 남은 인생에 거칠 것이 없다. “인생의 끝자락이라 여기며 그럭저럭 살려고 했는데 / 글자로 내 인생을 다시 시작합니다”(p.181)라는 시처럼 밝고 희망차다. 일흔이든 여든이든 공부를 하면 나이와 상관없이 희망이 생겨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머니들의 “이 희망찬 시작은 우리들의 삶이 무엇인지 묻는 벼락 치는 일갈”이다.
우리들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하는 시, 용기를 주는 시, 다시 희망으로 살아가게 하는 ‘엄마의 꽃시’는 이 땅의 아들딸들에게 주는 엄마의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