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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10,000일의 전쟁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 마이클 매클리어
  • |
  • 을유문화사
  • |
  • 2002-08-05 출간
  • |
  • 620페이지
  • |
  • A5
  • |
  • ISBN 978893246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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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끝나지 않은 전쟁, 베트남전쟁의 실체를 파헤친 책!
20세기 후반부를 수놓았던 전쟁, 식민주의의 쇠사슬을 스스로의 힘으로 끊었던 전쟁,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전쟁, 프랑스와 미국이 패배를 자인할 수밖에 없었던 전쟁. 처음에는 인도차이나전쟁으로 알려졌던 '베트남전쟁'의 시작은 1945년 4월이었고, 끝은 1975년 4월 30일이었다. 얼굴 없는 전쟁, 신비스러운 전쟁으로 알려졌던 베트남전쟁은 때로는 왜곡되기도, 때로는 묻혀 버리기도 했다. 이 책은 20세기 세계사에서 가장 논란이 심했던 베트남 30년 전쟁을 새롭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재조명하여 베트남전쟁의 진실을 파헤침으로써 중동분쟁, 보스니아내전, 아프가니스탄전쟁으로 혼란을 거듭하는 21세기의 향방을 가늠해 보는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호치민과 패티 소령
제2차 세계대전의 끝자락이 펼쳐지던 1945년 4월 어느 날, 베트남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중국 윈난 성 근처의 시골 찻집에서 그저 '장군'이라고만 부르던 50대 중반의 게릴라 지도자와 미군 OSS 대원 '아르키메데스 패티' 소령이 만난다.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해 협력이 필요했던 시기였다. 허술한 차림에 단아한 자세의 게릴라 지도자가 패티를 'Welcome, my good friend!'라고 따뜻하게 맞이한다. 그가 바로 20세기의 전설이 된 호치민胡志明이다.

30년 전쟁은 이렇게 시작된다. 일본의 패전, 베트남의 독립, 프랑스의 재점령이 이어졌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식민주의는 문명의 수치다'라고 생각해 베트남의 독립을 지원하려 했고, 미 국무부에 접수된 미군 관계자들의 현지 보고서 또한 호치민이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밝히고 있다. 호치민도 '새로운 베트남을 건설하는 데 공산주의가 타당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다짐과 함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우리가 미국에게 바라는 것은 도덕적인 지원밖에 아무것도 없다'라면서 베트남 독립을 애절하게 호소한다. 그러나 식민주의가 젖줄이라고 여겼던 영국의 처칠과 프랑스의 드골이 루스벨트의 발목을 잡았다. 베트남은 다시 투쟁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
프랑스 점령군에게 무력투쟁으로 저항했던 베트남의 지도자들은 서북쪽 라오스 국경 지대의 작은 마을 '디엔비엔푸'를 결전장으로 선택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5월, 역사 교사에서 전쟁의 달인이 된 '보 구엔 지압'이 이끄는 베트민 병사들은 프랑스 공수부대 진지를 초토화시켜 버렸다. 프랑스군 사령관 나바르 장군은 '백기는 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투항했다. 베트남이 스스로의 힘으로 식민주의의 쇠사슬을 끊는 순간이었다.

대포의 포신에 줄을 매서 허리에 묶고 하루에 반 마일씩 정글 속을 끌고 갔다는 베트민 병사들, 물자 수송용 자전거의 펑크를 막기 위해 입고 있던 바지를 벗어 타이어를 감싸는 바람에 팬티밖에 입을 수 없었다는 노력 봉사자들, 독립을 얻기 위한 길은 멀고도 험했다. 하지만 프랑스군이 물러간 자리에는 공산주의 도미노 이론을 겁낸 미군이 다시 깃발을 세우고 있었다. 미국은 한반도 분단을 베트남 문제 해결의 정답으로 인식했다.

고 딘 디엠과 군부의 부패
미국이 내세운 고 딘 디엠은 족벌정치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결국 백악관이 기획하고, CIA가 지원한 군부 쿠데타의 희생물이 되었다. 이어지는 군정의 부패, 초점을 잃어버린 미국의 정책은 북베트남의 통일 의지를 지원하는 민초들의 온상이 된다. 미국의 지원은 장성들과 부패 공무원들의 호주머니를 채웠을 뿐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한 가치를 깨우치게 만드는 데는 실패했다. 내정 간섭과 지원을 분간하기 어려운 지경에 빠졌다. 미국은 55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파견했으나 실제 전투 병력은 10%에 불과했고, 병사들의 평균 연령도 18세에 지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1년마다 교체되는 복무 기간으로는 강철 같은 의지로 무장한 게릴라들과 대적한다는 것이 역부족이었다. 국방장관을 지냈던 클라크 클리퍼드는 이런 대목을 꼬집어 '미국은 정책과 전략이 없었기 때문에 도저히 이길 수 없었던 전쟁이었다'고 평했다.

호치민의 타계
1969년 9월 호치민은 통일을 보지 못한 채 저세상으로 갔다. 죽음에 앞서 11명의 정치국원들에게 '단결하라'는 한마디 유언을 남겼다. 단결만 하면 통일은 기필코 이룰 수 있다는 뜻이었다. 레 두안, 팜 반 동, 보 구엔 지압, 레 둑 토 등 11명은 '단결'을 가슴에 새겼다. 북베트남 지도자 31명의 항불抗佛 전과 기록을 합치면 220년이 넘는다. 지하 30피트에서 7만 명이 3년 반을 견디어 낸 인내심, 밥 한 공기를 먹고 험악한 '호치민루트'를 하룻밤에 50km씩 행군했던 북베트남 병사들, 성년이 된 이후부터는 오직 독립이라는 한 가지 생각밖에는 안 했다는 청렴 강직한 '호 아저씨'가 만들어 낸 신화의 실체였다. 호치민이 공산주의자인가, 아니면 민족주의자인가 하는 논쟁은 무의미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프랑스 식민주의의 잔인한 행태를 젊어서 수없이 목격한 호치민이 당시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등장한 공산주의에 빠져들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확실한 어조로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공산주의는 새로운 베트남을 건설하는 데는 맞지 않는 이데올로기'라고 고백했었다. 식민지 베트남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프랑스의 욕심이 그를 철저한 공산주의자라고 매도하면서 미국을 흔들어댔을 뿐이다.
그는 분명 민족주의자였다. 베트남의 독립 외에 호치민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가족도, 유산도 없다. 있다면 하노이에 남아 있는 10여 평 남짓한 누옥 한 채와 책 20여 권, 그리고 타이프라이터 한 대가 있을 뿐이다. 그가 가장 좋아한 음식은 '메기 조림'이었다고 한다. 미군의 공습이 극성을 부리면서 많은 곳에 웅덩이가 생겨났다. 웅덩이에서 자란 메기로 조림을 해먹으면서 호치민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래, 공습을 하고 싶으면 해라. 그러면 웅덩이가 파일 것이다. 우리는 웅덩이에서 자란 메기를 잡아먹고 독립을 위한 투쟁을 이어갈 것이다."

전선은 미국으로
파병 인원이 늘어나자 가난한 백인과 흑인들이 그 몫을 채워 갔다. 백인 고학력 상류층은 캐나다로, 유럽으로, 멕시코로 줄행랑을 쳤다. 베트남 전선에서 말없이 돌아오는 주검도 늘어났고, 부상병들은 국내에서 따돌림을 당했다. 남의 전쟁에 더 이상 간섭하지 말라는 반전 데모가 미국을 흔들기 시작했다. 전비도 더 이상 충당할 여유가 없어 고심했다. 7명의 대통령이 30년 전쟁의 증인들이다. 루스벨트, 트루먼, 아이젠하워, 케네디, 닉슨, 존슨, 포드가 그들이다. 케네디 때 시작한 군사 개입은 존슨 때 절정을 이루었고, 포드가 막을 내리게 된다. 독립전쟁 이후 미국을 베트남전만큼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은 사건은 없었다. 조국이 외면한 전쟁에 참여했다는 허탈감이 참전 용사들을 병들게 했다. 전쟁이 끝난 후 참전용사들의 70∼80%가 심한 정신질환에 시달렸다는 통계가 그것을 증명한다. 전장의 병사들은 마약, 탈영, 상관 폭행을 일삼기도 했다. 닉슨과 키신저는 베트남에서 빠져 나갈 궁리에 나섰다.

X-mas 북폭과 평화협상
평화협상을 끌어내기 위해 미국은 1972년 12월 크리스마스 대공습을 개시했다. 하노이와 하이퐁이 초토화되었다. 외국 언론은 이 공습을 '인륜의 파괴'라고 비난했다. 1973년 1월 파리에서 잠정적인 평화협정이 이루어졌다. 그 공으로 키신저와 북베트남 정치국원 레 둑 토는 그 해의 노벨평화상 공동 수상자로 지명된다. 레 둑 토는 '베트남에 진정한 평화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노벨평화상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을 남긴 채 수상을 거부했다. 키신저 같은 협잡꾼과 함께 평화상을 수상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동양인에게 처음으로 돌아간 노벨평화상은 주인을 잃어버렸다. 미군은 이 협정을 빌미로 남베트남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키신저의 보좌관이었던 '알렉산더 헤이그'는 여전히 매파의 선봉에 서 있었다.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전장이 소강 상태를 거치는 동안 미군은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남베트남 병력이 빈자리를 메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전쟁의 피해 극복에 박차를 가했던 북베트남은 통일의 의지를 결코 잊어버리지 않았다. 프랑스 점령 시절 방직공장 직공에서 디엔비엔푸를 거쳐 참모총장에 이른 '반 티엔 둥' 장군은 레 둑 토와 함께 베트콩 차림으로 남베트남 밀행길에 나섰다. 통일의 길을 답사하기 위한 잠행이었다. 1975년 4월에 들어 남베트남 정국은 혼미를 거듭했다. 마지막 대통령 구엔 반 티우는 금괴 2톤을 가지고 떠났다. 부통령 구엔 카오 키는 남중국해 해상에 떠 있던 미국 항공모함 '미드웨이 호' 갑판에서 회한의 눈물을 뿌렸다. 4월 30일 미국 대사관은 '그레이엄 마틴' 대사 혼자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외교관으로서 최후까지 남베트남을 구하지 못한 죄책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헬리콥터 조종사를 통한 포드 대통령의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지금 무엇을 꾸물대고 있는 건가! 이 헬리콥터를 타고 빨리 탈출하라."

옥상에서 성조기를 끌어내린 해병대원들과 마틴 대사가 헬기를 탔다. 뒤이어 반 티엔 둥 장군이 이끄는 북베트남군 탱크가 사이공의 대통령궁에 들어섰다. 30년 전쟁의 끝이었다.

다시 보는 30년 전쟁
디엔비엔푸 전사였던 UN 주재 초대 베트남 대사 '하 반 라우'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지도자들은 프랑스 점령 시절 같은 형무소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어깨를 맞대고 싸웠지요. 자주독립 외에 다른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또 이런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30년 전쟁 동안 약 1천 5백만 명의 베트남인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아마 각 가정마다 최소 한 사람씩은 희생되었다고 보면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극복해 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들을 보살피기 위해서도 평화가 필요합니다."

이탈리아에서 이민온 뉴욕 서민 집안 출신인 아르키메데스 패티 소령은 30년이 지난 뒤 플로리다에서 글을 쓰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베트남은 미국의 얼굴에 남겨진 화농化膿 자국이다. 미국의 정가는 자본주의로 세계를 제패하겠다는 분위기에 젖어 있다. 이런 생각은 잘되어야 미국의 고립만 자초할 뿐이다."

저자 마이클 맥클리어는 10여 년에 걸친 종군 체험과 전쟁이 한창 기승을 부렸을 때 하노이를 세 번 방문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



저자 소개
저자 마이클 매클리어
CBC(Canadian Broadcasting Corporation)의 극동 특파원과 런던 주재원을 지낸 매클리어는 약 25년에 걸쳐 해외 특파원을 지내는 동안 수많은 전장을 현지에서 보도했다. 1959년 미 군사고문단의 남베트남 주둔이 시작되면서 매클리어의 베트남 취재가 막을 올렸다. 확전 과정에서 그의 보도는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1969년 9월 호치민이 사망했을 때, 북아메리카 기자 중에서는 처음으로 하노이 방문이 허용되어 호치민의 장례식과 미군의 공습으로 폐허가 된 북베트남을 생생하게 취재했다. 이때의 영상은 세계 90개국 이상에서 방영되었다. 매클리어는 북베트남을 두 번 더 방문했다. 1970년 포로가 된 미군 조종사와 인터뷰를 했고, 평화협상이 결렬된 다음인 1972년에는 B-52 폭격기들의 하노이 공습을 지켜보기도 했다. 텔레비전 영상을 통한 '베트남전쟁'의 실상 보도와 함께 〈뉴욕타임스〉가 전한 매클리어의 목소리는 독자들의 폭넓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79년 다큐멘터리 제작자의 자격으로 하노이를 다시 찾은 매클리어는 텔레비전 사상 처음으로 「베트남 : 10,000일의 전쟁」이라는 전쟁 기록을 만들기 위한 흔적 수집에 나섰다. 그는 이 기록에, 100여 명이 넘는 베트남전 관련 인사들의 증언을 더하여 이 책을 펴냈다. 미국 '군사서적클럽'과 '문학협회'는 이 책을 필독 도서로 선정한 바 있다. 그가 제작한 텔레비전 시리즈는 지금도 세계 여러 곳에서 방영되고 있으며, 태평양전쟁, 한국전쟁, 걸프전쟁, 보스니아전쟁에 관한 인상적인 제작물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켜 수많은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런던에서 태어난 매클리어는 1959년 캐나다 시민이 된 이후, 지금은 토론토에서 살고 있다.

역자 유경찬
고려대학교 정경대학을 나와 해태제과를 거쳐 한불종합금융에 근무하면서 기획이사, 투자금융본부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싱가포르에 있는 프랑스 소시에테제너럴은행의 아시아·대양주지역본부에서 일하기도 하였는데,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금융은 신음한다〉라는 책을 썼다. 최근에는 20세기 세계사에 관심을 가지고 에드워드 베르의 〈히로히토 : 신화의 뒤편〉을 번역하였으며, 현재 중동 석유전쟁의 실체를 다룬 책의 번역과 '워크아웃과 공적자금'에 대한 저술 작업을 하고 있다.

목차

역자의 말 ... 6
한국어판 출간에 즈음하여 ... 11
감사의 말 ... 13
서문 ... 15

1 첫번째 전환 ... 19
2 프랑스의 점령 ... 51
3 디엔비엔푸 ... 73
4 초기의 희망 ... 99
5 암살 ... 131
6 결단의 시기 ... 155
7 홍당무와 채찍 ... 185
8 타운트 다운 ... 203
9 어려운 동맹 관계 ... 235
10 웨스티의전쟁 ... 271
11 미로 ... 311
12 포위 ... 335
13 구정 공세 ... 359
14 전선은 미국으로 ... 393
15 게릴라 사회 ... 423
16 촌락의 전쟁 ... 453
17 절규하는 병사들 ... 473
18 4년의 기다림 ... 505
19 가자, 사이공으로! ... 559
20 항복 ... 591

저자후기 ... 615
참고문헌 ... 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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