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무드란 무엇인가
성서와 탈무드는 유대인이 인류에게 전한 가장 중요한 두 책이다. 천지창조부터 기원전 5세기까지의 유대 역사를 기록한 히브리 성서는 기독교의 경전(구약성서)으로 받아들여져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탈무드는 비유대인은 물론이고 유대인에게도 여전히 신비하고 난해한 책으로 남아 있다.
모세가 신에게 성문율법 곧 ‘토라’를 받은 이래로, 모호한 율법들의 정확한 의미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모세에 의해 처음 시작된 이 작업은 입에서 입으로 후대에 전해졌고, 유대의 현자들이 자신들의 시대와 삶의 당면한 문제들에 대한 설명을 계속 추가하면서 그 말뭉치는 점점 커져갔다. 이러한 구전 전통에서 다양한 문헌들이 탄생했는데, 서기 1세기경 랍비 아키바 벤 요셉에 의해 완성되어 성서의 토씨 하나하나까지 자세히 해설한 ‘미드라시’, 이 미드라시를 바탕으로 3세기 초 랍비 예후다 하나시가 구전율법을 6가지 주제별로 집대성한 ‘미슈나’, 이후 300~400년 동안 이스라엘과 바빌로니아의 랍비들이 각각 미슈나의 의미를 분석하고 토론한 내용을 담은 ‘게마라’가 그것이다.
탈무드란 바로 이 미슈나와 게마라를 합쳐 부르는 말로, 실제로 ‘예루샬미’(예루살렘 탈무드)와 ‘바블리’(바빌로니아 탈무드)라는 두 종류가 있는데, 더 늦게 만들어져 더 많은 논의를 담고 있는 바블리가 오늘날 널리 읽힌다. 보통 특대판형 20권으로 출간되는 탈무드는 책장에 꽂으면 폭이 1미터에 이르며, 전체 분량이 250만 단어, 5400쪽이 넘는 탈무드를 매일 한 쪽씩 읽으면 전권을 마치는 데 7년 이상이 걸린다.
왜 ‘원전에 가장 가까운’ 탈무드인가
우리나라에서 탈무드는 그동안 주로 마빈 토케이어의 책들을 중심으로 소개되었다. 그는 주일미군 군목으로 일본에 왔다가 그곳에 정착하여 20권가량의 책을 일본어로 썼다고 알려져 있다. 1970년대 우리나라에 일본어 번역으로 처음 소개된 그의 탈무드 책들은 이후 《탈무드의 지혜》 《탈무드의 처세술》 《탈무드의 웃음》 등으로 여러 차례 재편집되며 우리 독자가 처음으로 탈무드에 접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의 책들은 탈무드 원전과는 거리가 있다.
탈무드는 잘 알려져 있듯이 ‘할라카’와 ‘아가다’라는 두 종류의 담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율법’을 의미하는 할라카가 딱딱하고 법리적인 이론 부분이라면, ‘이야기’를 의미하는 아가다는 그것을 예화로 풀어쓴 응용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할라카가 ‘무엇을?’ ‘어떻게?’에 대한 대답이라면, 아가다는 ‘왜?’에 대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둘은 원래 동전의 양면과 같이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일반인에게는 아가다가 훨씬 쉽고 재미있는 것이 사실이다.
토케이어는 탈무드에서 아가다 부분만을 발췌하여 엮음으로써 탈무드를 지나치게 가벼운 우화집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출처를 전혀 명시하지 않았고, 이야기에 지나치게 많은 윤색을 가했으며, 임의로 주제별로 묶고는 원문의 맥락과 동떨어진 설교를 가미했다. 토케이어의 이 출처 불명의 탈무드는 우리나라와 일본 외에서는 거의 읽히지 않는다.
토케이어의 책을 근간으로 해서 이후 우리나라 저자들이 쓴 책들도 탈무드의 본령과 거리가 있기는 매한가지다. 유대인에 대한 여러 세속적 선입견에서(유대인의 부, 노벨상, IQ 등) 탈무드식 자녀교육법부터 어린이용 탈무드, 탈무드 태교동화에 이르기까지 탈무드를 내세운 각종 책들이 나왔지만, 여전히 우화 중심에 원문을 인용할 때에도 형식적인 수준의 단문에 그쳤다.
반면에 이 책은 원전에 충실하다. 탈무드의 전통적 편제 즉 제라임(씨앗들), 모에드(절기), 나심(여자들), 네지킨(손해), 코다심(거룩한 것들), 토호로트(정결한 것들)라는 미슈나의 ‘6가지 순서’를 지키며 바블리의 해당 출처를 밝힌다. 그리고 각 순서의 하위 소논문들을 균형 있게 안배하면서, 소논문들의 특징을 보여주는 대표적 절들을 가려 뽑아 원문을 그대로 옮긴다. 지나치게 기술적이거나 관용적인 세세한 표현은 피했지만 독자가 원문의 맛을 최대한 느낄 수 있도록 미슈나와 게마라를 가급적 직역했으며, 의미를 명료화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경우에만 최소한으로 저자들의 첨언을 괄호 안에 표시했다.
각 절에 대한 해설에서는, 앞뒤로 오는 미슈나를 설명함으로써(또 필요에 따라 여러 전통적 주석들도 소개함으로써) 논의의 맥락을 파악할 수 있도록 했으며, 무엇보다 랍비들의 논의를 그 시대적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 책에 수록된 90여 개의 절은 비록 탈무드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지만, 저자들의 상세한 해설을 통해 우리는 탈무드의 구성체계, 글의 특징, 논리전개 방식, 다양한 해석 방법을 점차 배워가면서 탈무드 전체에 대한 상을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다.
미국유대교신학교를 나온 현직 두 정통 랍비가 함께 쓴 이 책은 1997년 출간 이래 20년 넘게 대표적 탈무드 입문서로 손꼽히며 스테디셀러로 사랑받고 있다. 탈무드의 체제와 원문을 충실히 옮기고 친절히 해설한 이 책을 통해 이제까지 그저 재미있는 우화집, 가벼운 처세훈 정도로 잘못 알려진 탈무드에 대한 오해를 불식하고, 우리 독자들이 탈무드의 진면목을 새로이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랍비란 누구인가
탈무드는 간단히 말해, 서기 1세기부터 7세기까지 600년 이상에 걸친 랍비들의 가르침을 모은 책이라 할 수 있다. 랍비들의 가르침은 세세한 성서 해석과 율법 설명뿐 아니라 일상의 자잘한 여러 문제들에 대한 세속적·윤리적 지침을 포괄한다.
탈무드 시대의 랍비는 오늘날 유대교 회당에서 종교의식을 주관하는 직업적 사제와 이름은 같지만 그 역할과 위상은 많이 달랐다. 초기 유대사회의 중심은 성전과 희생의식이었고, 따라서 세습직인 코헨(제사장)이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서기 70년 로마군에 의해 성전이 파괴되면서, 유대 민족은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았다. 많은 유대인이 살해되고 조국은 식민지가 되었으며, 종교공동체는 여러 분파로 사분오열되었고, 예수를 메시아라고 믿는 신흥종교의 위협까지 대두되었다. 이러한 위기의 순간에 등장해 찢겨진 유대 공동체를 재건한 새로운 지도자들이 바로 랍비였다.
사람들에게 율법의 참 의미를 가르친 이 교사들은 대단한 학식을 지녔지만 오늘날처럼 회당에 고용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은 대개 다른 직업이 있었으며, 개인적으로 배움의 집에 모여 함께 토라를 연구하고 토론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공부한 후 스승에게 랍비로 임명되면, 회당에서 율법에 관한 설교를 할 수 있었고 재판을 맡을 수도 있었다. 랍비는 대단한 혈통을 타고 나거나 신의 계시를 받지 않아도 자기 노력만으로 될 수 있었다. 코헨에서 랍비로 권력이 넘어가면서 출신보다 지식이 중시되었고, 회당이 성전을, 기도가 희생의식을 대신하게 되었다. 유대교는 처음에 토라(성문율법)에서 출발했으나,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랍비들의 가르침 곧 탈무드(구전율법)에 의해서였다.
랍비들은 시대마다 여러 다른 이름으로 불렸는데, 1~2세기의 탄나임(‘반복하는 자’)과 3~6세기의 아모라임(‘설명하는 자’)이 각각 미슈나와 게마라를 완성했다. 곧 이들이 탈무드의 저자이자 주요 등장인물이다.
탈무드는 왜 어려운가
성서가 자주 물에 비유되듯, 탈무드는 흔히 바다에 비유된다. 바다가 생명의 원천이면서 동시에 그 거대함과 사나움으로 우리를 압도하듯, 탈무드는 무수한 지혜의 보고이면서 동시에 그 엄청난 규모와 난해함으로 우리의 도전을 빈번히 좌절시킨다. 탈무드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대표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우선, 탈무드는 고대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쓰였다. 모음과 구두점이 전혀 없는 이 언어들은 아무리 전문가라도 쉽게 해독할 수 없다. 자음들 사이에 어떤 모음을 할당하느냐에 따라 뜻이 180도 달라질 수 있으며, 또 어디서 끊어 읽을지, 화자가 히브리어로 말하는지 아람어로 말하지도 판단해야 한다. 모든 가능성을 고려하고 최선의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암호학자와 같은 유연성이 요구된다.
둘째, 번역에 성공한다고 해서 바로 의미가 통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탈무드는 애초에 구전으로 전해진 이야기들이다. 암기하기 쉽도록 매우 축약된 형태로 전승되었기에, 중간에 무수한 설명들이 생략되어 있다. 탈무드는 2000년 된 전화놀이와 같다.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듬성듬성 전달된 그 불가해한 통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후대의 주석과 해설을 참조해 전체 맥락과 이 빠진 부분들을 파악하는 것이 필수다. 실제로 이 책에서도 가장 자주 나오는 문장이 “그가 그에게 말했다”인데, 누가 누구에게 말하는 것인지조차 따라가려면 체스 명인과 같은 집중력이 요구된다.
셋째, 탈무드는 서구의 논리적 사고틀을 따르지 않는다. 처음과 끝이 분명한 단선적 글들과 달리, 탈무드의 구조는 끊임없이 순환하는 원에 가깝다. 더구나 랍비들은 우리가 탈무드 전체를 알고 있다는 전제 아래 설명하기 일쑤고, 빈번히 옆길로 샌다. 안식일에 옷을 개는 문제를 말하다가 의복 일반에 대해 이야기하더니, 학자들의 의복으로 넘어가서는 어느새 학자란 어떤 사람인가, 왜 그들을 존경해야 하는가를 논의하는 식이다. 이러한 ‘연관의 논리’는 거꾸로 탈무드가 매우 유기적인 글임을 시사한다. 탈무드의 모든 부분은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고 서로 의존한다. 아주 작은 부분도 전체 주제로 이끌 수 있기에 어느 것도 무의미하지 않다. 헤엄치는 법만 알면 바다 어디든 뛰어들 수 있듯, 우리는 탈무드의 어느 장, 어느 절에서든 읽기 시작할 수 있다.
넷째, 탈무드의 거의 모든 꼭지는 랍비들의 대화와 논쟁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그 랍비들은 서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거나 완전히 다른 시대에 살았던 이들인 경우가 많다. 탈무드의 편찬자들은 비슷한 주제에 관해 말한 여러 랍비들의 주장을 토막토막 잘라 붙임으로써 마치 그들이 서로 대화하는 듯 보이게 했다. 탈무드의 관용적 표현 중 하나가 “랍비 A가 랍비 B의 이름으로 말한다”인데, 이것은 선대의 위대한 랍비의 입을 빌려 그가 만일 지금 살아있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라는 의미다. 시공을 초월한 이러한 서술은 탈무드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랍비가 여전히 살아서 지금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고 느끼게 해준다.
신은 디테일에 있다
종교와 율법에 관련된 수많은 낯선 전문용어들도 어려움을 더하지만, 탈무드 독자들을 무엇보다 당혹스럽게 만드는 특징은 따로 있다. 탈무드를 처음 펼치며 우리는 이제부터 인간 존재의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들에 대한 심오하고 철학적이고 숭고한 지혜의 말들을 배우리라 기대한다. 하지만 탈무드가 실제로 다루는 것은 아주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문제들이다. ‘안식일에 집에 어떤 물건을 들이고 낼 수 있는가?’ ‘황소가 다른 동물을 뿔로 들이받아 해쳤을 때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여자가 월경이 끝난 후 다시 부부관계를 하기까지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가?’ 거대한 주제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예상하던 우리는 이내 ‘이게 다야?’라며 실망하고 만다.
하지만 탈무드의 랍비들은 구체적인 것을 통해 일반적인 것을, 특수한 것을 통해 보편적인 것을, 소우주를 통해 대우주를 말하려 한다. 그들은 평범한 일상의 세부에서 신을 발견하려 한다. 따라서 우리가 그들의 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책의 저자들이 누누이 강조하는 ‘개념적 접근법’을 따라야 한다. 탈무드는 자주 종교적 의례의 외피를 쓰고 율법적 언어로 이야기되지만, 그 행간에서 우리는 랍비들이 세계를 바라보고 이해하려 한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 손가락이 아니라 그것이 가리키는 달을 보듯, 우리는 탈무드를 읽으며 랍비들이 무엇을 말했느냐가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질문하고 생각하고 문제에 접근했느냐를 배워야 한다.
사실, 탈무드에는 문제에 대한 정답이란 없으며, 모든 페이지는 이의 제기의 연속이다. 제시된 모든 주장은 도전받고 비판받으며, 어떠한 것도 당연시되지 않는다. 심지어 신에게 맞서며 “왜?”라고 묻고 “아니요!”라고 반론하는 것이 우리의 권리이자 의무로 간주된다. 저자들은 이 책의 독자에게도 마찬가지의 경건한 불경을 권한다. 탈무드 원문이 우리에게 어떤 삶의 교훈, 도덕적 의무를 권할 때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그 교훈이 원문에서 도출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결론인가? 그것을 지금 여기의 문제들에 적용할 수 있는가? 우리가 처한 특정한 상황에 대해 랍비들은 뭐라고 이야기할 것인가? 그렇게 행간의 의미를 곱씹으며 수면 아래로 침잠할 때 우리는 탈무드의 바다가 간직한 진정한 보물을 발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