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진종의 창시자이자,
타력신앙을 극도로 몰고 감으로써 매우 독창적인 정토사상을 전개한
일본 불교의 대표적 사상가인 신란에 대한 연구서
우리나라의 정토신앙은 삼국시대 이래로 지금까지 민간신앙이나 대중 불교의 차원에서는 불교 하면 ‘나무아미타불’을 연상할 정도로 널리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정토불교가 한 번도 독자적인 종파로 성립된 일이 없으며, 사상 면에서도 통일신라를 전후로 하여 원효(元曉), 경흥(憬興), 법위(法位), 현일(玄一) 등 쟁쟁한 정토사상가들이 출현했지만, 오로지 정토신앙에만 정진한 사람은 없었다. 더군다나 그 이후로는 이렇다 할 만한 사상적 또는 교학적 발전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일본 불교는 매우 대조적이다. 정토신앙을 주로 하는 정토진종(淨土眞宗)이나 정토종(淨土宗)은 여타 대승불교에 대해 배타적이리만큼 명확히 구별되는 독자적 사상과 조직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 불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정토진종의 창시자 신란은 타력신앙을 극도로 몰고 감으로써 매우 독창적인 정토사상을 전개한 일본 불교의 대표적 사상가이며, 그의 사상은 실로 정토사상의 극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은 주로 신란의 사상에 초점을 맞춘 연구서이다. 정토종의 창시자인 호넨과 그의 제자로서 스승을 능가하여 일본 불교의 최대 종파를 형성하게 된 정토진종을 창시한 신란의 사상을 이해함으로써 일본의 정토신앙과 사상은 물론이요 일본 불교 전반의 특성을 이해하는 역점을 두고 있다.
신란은 일본 사상의 가장 좋은 면을 대표한다. 인간 실존의 문제를 안고 고민하고 씨름하는 그의 진지성과 정직성, 전통적 불교와 신도(神道)의 종교성이 지니고 있는 강한 현세성과의 명확한 단절, 개인의 구원을 향한 강렬한 열정, 그리고 그가 세운 신앙공동체의 평등주의적 성격과 그의 인간적 겸손 등은 모두 인류 전체를 위한 항구적이고 보편적 가치를 지닌 신란 사상의 면모들이다.
신란 정토사상의 가장 새로운 특징은 무엇보다도 악인정기설(惡人正機說 : 악인이야말로 아미타불이 그의 서원을 통해 구제하고자 한 대상이라는 설)과 ‘초월’ 문제와 직결되는 ‘부정(否定)의 논리’에 있다. 신란 사상의 해석에서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그의 정토사상이 얼마만큼 전통적인 대승불교의 존재론적 시각에서 해석되어야 할 것인가 또는 신란의 타력사상이 얼마만큼 상대와 절대, 예토와 정토, 생사와 열반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대승적 세계관을 보유하고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현대 일본의 신란 해석가들은 일반적으로 신란의 정토사상과 공(空)사상에 의해 대표되는 대승의 존재론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또한 선불교적 시각으로 신란의 사상을 해석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특히 현대인이 거부감을 지니고 있는 내세적 정토 구원관을 의식한 듯 ‘바로 지금 여기 생사의 세계에서 구원이 가능하다’는 신란의 사상을 마치 신란이 말하는 신앙이 선불교에서 말하는 깨침과 마찬가지인 양 해석하려는 잘못된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해석의 문제점은 그것이 단순히 신란의 사상을 왜곡할 뿐만 아니라 ‘부정의 논리’를 약화시키며, 현세에서 도달할 수 있는 구원에 관한 신란의 가르침이 분명히 지니고 있는 변증법적 긴장(존재론적, 윤리적)의 구조를 해체시킨다는 데 있다. 신란에게는 인간의 신앙이 제 아무리 깊다 해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결코 정토가 될 수 없으며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인간 죄악의 문제는 결코 완전히 해결될 수 없다.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
저자에게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단순히 학문적 관심의 대상 이상이다. 두 종교가 인류의 가장 위대한 정신적 유산으로 사회ㆍ문화ㆍ인종의 장벽을 넘어서서 모든 인간을 화합과 구원으로 이끌 수 있는 힘을 지닌 종교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사용하고 있는 현격한 언어와 개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양자가 궁극적 진리의 차원에서는 만날 수 있다는 기대와 가정을 가지고 연구에 임해 왔다. 특히 신란과 같이 철저한 타력신앙을 내세움으로써 여러 면에서 놀라우리만큼 그리스도교 신앙에 근접하고 있는 경우 단순한 학문적인 비교연구의 차원을 넘어서서 ‘진리’의 문제가 피할 수 없이 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