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 불안정, 소득 불평등, 부정부패, 혐오와 차별…
몸은 사회가 기록되는 살아 있는 보고서이자
그 자체로 정치적 공간이다!
이사회의 불평등은
우리 몸에 어떻게 새겨지는가
피로의 누적과 그로 인한 건강 이상 신호는 나의 나약함 때문일까? 산업재해는 개인의 부주의나 위험 행동 때문에 발생하는 것일까? 강남구와 금천구의 기대 수명이 10세나 차이 나는 것은 그저 우연에 불과한 일일까? 미세먼지에 대한 대응은 각자 마스크를 쓰고 공기청정기를 구매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흔히 건강하거나 건강하지 않은 것은 타고난 체질이거나 개인의 관리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각자가 건강 행동을 실천하고 첨단 서비스를 구매함으로써 건강해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진공 속 세상, 영화 속 세상이기에 모두가 그토록 자유롭고 합리적이며 조화로운 삶을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인가?”
<몸은 사회를 기록한다>는 우리의 건강이 ‘개인의 문제’이기보다는 동네/학교/일터에서의 불평등, 차별과 부패, 제도/기술/정치 등 사회 구조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파헤친다. 소진 증후군은 고용 불안과 관련 있으며 소득 불평등이 심한 사회일수록 더 많이 경험한다. 나이가 어리거나 비정규직 노동자가 산재에 취약한 것이 아니라, 산재 예방 자원에 제한적인 구조적 요인이 산재 취약성을 높인다. 지역 간 기대 수명이 10년씩이나 차이 나는 것은 자연적인 이유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개발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다. 국토 면적인 작은 한국에서조차 거주지와 지역의 사회 경제적 수준에 따라 미세먼지 농도가 다르고, 당연히 그 피해 또한 차별적으로 나타난다.
2014년부터 최근까지 ‘프레시안’에 연재된 시민건강연구소의 글타래를 모은 이 책은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군 이슈들을 중심으로 우리 몸이 사회를 어떻게 반영하는지 낱낱이 밝힌다. 젊은 연구자들로 꾸려진 12명의 필자가 평판 높은 국제 학술지에 발표된 논문을 대중이 이해하기 쉽게 풀어냈다. 과학적 연구 결과를 근거 삼아 사회, 문화, 정치, 경제적 요인들이 염증, 건강 행동, 주거 및 근로 환경, 보건 의료 서비스, 사회 정책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 건강에 영향을 끼치는지 조목조목 짚어냈다. 그 과정에서 부패, 민주주의, 투명성, 정치 같은 ‘추상적’ 요소가 몸이라는 ‘실재’에 어떻게 관여하는지가 명료하게 드러난다. 우리 몸은 ‘생물학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것이기에, 사회가 기록되는 살아 있는 보고서이자 그 자체로 정치적 공간이다.
이주민, 성 소수자의 아픔,
그들의 문제가 아닌 우리의 문제
“차별받는 이뿐만 아니라 차별하는 이도 아프다”
국내에서 열리는 퀴어 페스티발을 생각하면 성 소수자들의 퍼레이드보다 이를 반대하기 위해 모인 이들의 퍼포먼스가 먼저 떠오른다. 땡볕 아래서 부채춤을 추며 핏발 세워 동성애 반대를 외치는 저분들, 과연 괜찮을까? 이러한 궁금증에서 살펴본 미국 컴럼비아 대학교의 하첸블러 교수팀 연구 결과가 흥미롭다. 이성애자 2만 226명의 자료 분석으로 동성애에 대한 편견 수준과 사망 사이의 연관성을 분석한 결과, 동성애 편견 점수가 1점 올라갈 때마다 사망 위험이 2.9배 높아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편견과 혐오가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 건강에 해롭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이주민들이 처한 열악한 노동환경과 인권 유린, 차별 문제 또한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들에 대한 차별이 피해 당사자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2008년 미국 이민세관 단속국이 포스트빌에 위치한 육류가공처리공장을 기습 단속해 미등록 노동자 389명을 체포한 사건을 배경으로 한 미시간대 보건대학원 연구 결과는 의미심장하다. 이 사건은 임신 중인 라틴계 여성에게 스트레스를 유발해 저체중아 출산 위험을 증가시켰다. 주목할 부분은 이 단속이 단 한 개 사업장만으로 표적으로 했을 뿐인데도, 그 효과는 라틴계 주민 전체에 미쳤으며, 심지어 미국에서 태어난 라틴계 여성들, 즉 합법적 미국 시민들 사이에서도 부정적 영향이 관찰되었다는 점이다. 한국 또한 국내 거주 외국인 숫자가 이미 2백만 명을 돌파했다. 이제 외국인, 이주민이 없었던 사회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배제, 차별, 혐오로 우리 사회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차별받는 이들뿐만 아니라 차별하는 이들도 함께 위험에 놓인다. 성 소수자와 이주민의 문제를 더 이상 ‘그들’만의 문제로 여길 수 없는 이유다.
모성 페널티, 젠더 폭력, 낙태금지법, 여학생 수난사…
여성 연구자가 특히 주목한 ‘2등 시민’의 몸
여러 필자가 몇 해에 걸쳐 연재한 글을 책으로 묶는 과정에서 시민건강연구소의 김명희 상임연구원이 모든 글을 다듬고 새로 정리했다. 뿐만 아니라 여성 연구자로서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사회적 위치와 현실이 어떻게 신체에 드러나는지 주목하고 날카로운 논평을 더했다.
여성의 교육 수준이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다고는 하나, 결혼과 출산 이후 급격히 떨어지는 여성의 노동시장 참가율을 확인할 수 있는 그 유명한 ‘M자 곡선’은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 현상이다. 여성들의 학력이 높아져도 결혼, 출산, 육아에 따른 모성 페널티를 여전히 감수해야 하는 한국 사회에서 일하는 엄마의 건강을 향상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여성 친화적 일자리’가 아니라, 차별 없는 ‘안정적 일자리’임을 강조한다. 한편, 스마트폰, 초소형 카메라, 소셜미디어 등의 기술이 어떻게 젠더 폭력을 촉진하는지 탐색한다. 모바일 기술을 활용한 스토킹 문제를 다룬 논문을 소개하면서 “기술에는 항상 밝은 측면과 어두운 측면이 공존하며, 무엇을 우세하게 만들 것인가는 기술 자체가 아니라 사회적 힘에 달려 있”음을 얘기한다.
그런가 하면, 보건학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학술지에 실린 논문은 낙태죄를 둘러싼 한국의 격론을 명쾌하게 정리해준다. 노르웨이에서 자가 투여도 가능한 간단하고 안전한 내과적 임신중절 서비스가 제공된 뒤, 임신중절 비율은 오히려 줄었다. 김명희 연구원은 임신중절을 법으로 금지하는데다가 외과적 시술에만 의존하는 한국에서 임신중절로 인한 건강 피해, 위법 행위로 인한 처벌, 임신 지속으로 야기된 결과는 오롯이 여성의 몫이라면서, “인간의 임신이 여성만의 단성생식으로도 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된 바 없음을 생각한다면, 이는 상당히 괴이한 일”이라고 꼬집는다. 여성의 차별적 현실은 성인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성적 괴롭힘이 월경 장애를 일으킨다는 이탈리아 로미토 교수팀 연구와 더불어 최근 연이은 여학생들의 폭로로 드러난 교사들의 성적 괴롭힘 실태를 열거하면서, “대한민국에서 여학생으로 산다는 것은 일종의 극한 직업 체험”이라는 뼈 있는 논평을 내놨다.
감정이입을 넘어 이성적 공감으로
건강 불평등은 필연적인 것도, 해결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이 책의 글들은 전반적으로 건조하다. 필자들이 일상화된 차별, 부패, 불평등에 무뎌져서가 아니다. 분노와 슬픔만으로는 변화를 만들어내는 데 한계가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2015년 터키 해안가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시리아 꼬마 쿠르디에 그토록 가슴 아파했던 이들과 2018년 제주에 들어온 예멘 난민에 극도의 혐오를 드러내는 이들은 다른 이들인가? 교통사고로 크게 다치고도 출근 종용을 받은 집배원의 자살에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이들과, ‘총알 배송’ ‘당일 배송’을 반기고 배송이 조금이라도 지연되면 불평불만을 터뜨리는 이들은 따로 존재하는가? “사회적 불의와 불평등에 대한 분노, 빼앗긴 자들에 대한 깊은 감정이입만큼이나, 냉정한 분석과 대안, 서로 다른 자리에서의 이성적 공감이 문제 해결에 중요”하다.
책의 말미에서는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된 지 불과 4년 만에 사망률이 33% 증가, 남성의 기대 수명이 63.8세에서 57.7세로 줄어든 사례를 들어,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들이 우리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그리고 매우 직접적으로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건강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이며,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를 포함하는 복지의 최전선이다. “사회가 어떠한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건강은 빠르게 개선될 수도 악화될 수도 있고, 건강 불평등 또한 단기간에 심해질 수도 완화될 수도 있다.” 이 책을 통해 많은 이들이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의 중요성, 건강 불평등 문제의 심각성을 이해하고, ‘시민의 힘’을 기르는 데 동참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