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진 리스 (Jean Rhys, 1890~1979)
“예리한 통찰력과 약자에 대한 애정으로, 낡은 세계 위에 거침없이 펜을 휘두르는 작가.”(포드 매덕스 포드)
영연방 도미니카의 수도 로조에서 태어난 진 리스는 웨일스인 아버지와 스코틀랜드계 크리오요 어머니를 둔, 소위 백인 지배계급이었으나, 인종 간 위계와 갈등을 목격하며 서구의 백인 남성 중심 체제에 비판적 시각을 갖게 된다. 열일곱 살에 영국으로 건너가 퍼스 여학교에 진학하지만 외지인에다 영어 억양이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당하고, 배우가 되고자 들어간 왕립연극학교도 언어 문제로 중도에 그만두는 등 주류 사회에 통합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 결혼 후 유럽 각지를 돌아다닐 때에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으므로 어찌 보면 그녀의 생애 전체가 인종과 성과 계급의 문제가 중첩된 이방인의 삶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가 사망하고 집안이 기울면서 코러스 걸, 마네킹, 누드모델 등을 전전하던 리스는 경제적으로 의지했던 연인과 헤어지고 아이를 낙태하다가 죽을 고비를 넘기는 등 큰 사건을 연이어 겪은 뒤 글을 쓰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에 들어선 것은 첫 남편이 불법적인 일에 연루되어 체포된 무렵이었다. 포드 매덕스 포드의 도움으로 《트랜스애틀랜틱 리뷰》에 단편 몇 편을 발표한 그녀는 1927년 소설집 『왼쪽 둑』을 시작으로 식민주의와 여성 문제에 천착한 작품들을 잇달아 내놓았다. 특히 사회적 통념에 갇혀 가난과 멸시를 견디며 살아가는 여성들을 탁월하게 그렸는데, 이는 대부분 순탄치 않았던 리스 자신의 삶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녀가 다룬 주제나 모더니즘적 기법들은 출간 당시에는 대중에게 큰 호응을 얻지 못했으나, 『한밤이여, 안녕』(1939)이 BBC 방송으로 각색되면서 19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재평가를 받는다. 이어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에서 영감을 얻은 1966년 작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가 “19세기 걸작을 비틀어 20세기의 걸작을 탄생시켰다”는 찬사를 받으며 작가로서 절정기를 맞았다. 서인도제도와 유럽 양쪽에 걸친 독특한 정체성에 기반한 진 리스의 작품들은 오늘날 탈식민주의와 페미니즘의 측면에서 많은 비평가들의 연구 대상이 되고 있으며, 여성의 억압된 성과 욕망, 실패와 고독을 집요하게 묘사한 단편들은 ‘20세기 영국 최고의 단편’으로 꼽힌다. 89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평생 의욕적으로 창작에 매진했던 그녀는 문학적 공로를 인정받아 1978년 대영제국훈장(CBE)을 받았다.
역자 정소영
영문학자, 번역가. 용인대학교 영어과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폭력적인 미국의 세기』 『핵 벼랑을 걷다』 『십자가 위의 악마』 『일곱 박공의 집』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