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이탈리아 미래파가 던진 충격파
파스타를 추방하라!
자동차, 비행기, 속도, 전기, 알루미늄, 가벼움, 전쟁을 찬양하는 선언문을 발표하며 1900년대 초 출현한 미래주의는 이탈리아의 불가역적 현대화를 염원하며 예술 분야의 혁신을 주도했다. 특히 회화와 조각, 건축 분야에서 미래주의만의 독창성과 새로움으로 주목받았다.
정치 세력으로도 짧은 기간 활동했으나 1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파시즘 정권과 긴밀한 공조 관계를 유지할 뿐 직접 세력화를 시도하지는 않았으며 예술 활동에 집중했다. 미래파에게 예술은 곧 삶이었고, 삶 역시 예술적이어야 했다. 삶과 예술이 완전히 일치를 이루어 현대화되는 것, 그것이 미래파가 생각하는 혁명이었다.
하지만 산업화에 늦었고 과거의 무게는 무거웠던 이탈리아의 변화는 더뎠다. 20년 뒤, 미래파의 수장 마리네티는 다시 한 번 구시대적 논리를 뒤엎을 충격파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마리네티는 예술과 삶의 총체적 변혁을 이뤄낼 매개체로 ‘요리’를 선택하고, 화가 필리아와 함께 1930년 <미래주의 요리 선언>을 발표한다.
“파스타는 비관주의와 과거에 대한 집착을 부추긴다”
미래파는 매해 수 개의 선언문을 내놓으며 대중에게 끊임없이 존재감을 보였다. 개중에는 미래주의적 장난감, 의복에 관한 것도 있었으니, ‘요리’에 관한 선언을 발표한 것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어떤 선언보다 더 급진적이었다.
전통을 맹렬히 공격하고 구체제를 전복하려 했던 미래파에게 ‘정통’을 강조하는 이탈리아의 요리 세계는 적폐나 다름없었다. 그 주적은 ‘파스타’였다. <요리 선언>은 현대적 삶에 적합한 식생활을 정립하기 위한 첫 번째 과제로 “이탈리아의 괴기한 미식 종료인 파스타의 퇴출”을 내세웠다. “빵이나 쌀과 달리, 파스타는 씹지 않고 삼키는 음식이다. 이런 전분 바탕의 음식은 입에서 침으로 대부분을 소화시켜야 하는데 파스타는 그대로 넘어가니 췌장과 간이 소화를 맡는다. 그 탓에 장기의 균형이 깨지고 노곤함, 비관주의, 과거의 집착으로 인한 망향적 무력감이나 중립주의에 시달리게 된다”(31쪽)는 것이 이유였다.
전에 없던 것을 창조한 미래파
기술과 요리, 예술과 요리의 종합을 시도하다
<요리 선언>에서 마리네티는 영양을 알약으로 채울 수 있게 되면 노동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어 한층 고상한 저녁 식사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 외에도 오감을 자극하는 식사법을 강조하며 향, 음악, 시를 활용할 것을 당부했다. 마지막에는 먹을 수 있는 음식인지 의심케 할 뿐 아니라 너무나 생경한 이름의 요리를 선보였다. ‘화성 소스를 곁들인 태양 광선의 알라스카 연어’라든가 ‘금성 소스의 로자산 누른도요’, 또는 ‘고기 조각’과 ‘적도+북극’이 그것이다.(33-34쪽)
‘파스타를 추방한다’는 파격도 모자라, 듣도 보도 못한 음식이 소개된 <요리 선언>은 즉각 이탈리아 전역을 들썩였다. 이 책에는 <요리 선언> 이후의 격렬했던 반응을 다룬 당시 신문 기사들과 논평의 원문이 인용되어 있어 1930년대의 당혹스러움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볼베어링을 넣은 닭고기 요리 팝니다
미래주의 음식점 ‘거룩한 미각’
하지만 미래파는 굴하지 않고 1931년 3월 8일 ‘거룩한 미각’이라는 이름의 미래주의 음식점을 토리노에 열었다. 음식점의 인테리어는 화가 필리아와 건축가 디울게로프가 맡았는데, 대체 불가능한 가벼움으로 미래주의자들을 사로잡았던 알루미늄이 대거 쓰였다.
‘거룩한 미각’이 최초로 준비한 미래주의 정찬은 ‘직관적인 전채’부터 ‘햇살 수프’, ‘최강 정력’, ‘치킨 피아트’ 등 열네 가지 요리로 구성되었다. 당연히 파스타의 자리는 없었다. 이후 미래파는 볼로냐, 파리, 노바라 등지에서 미래주의 연회 퍼포먼스를 이어갔다. 너무나 새로워서 두려울 정도였던 이 연회에 수많은 사람이 참가했으며, 몇몇 기자가 자세한 후기를 남겼는데, 이 역시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기계 문명을 ‘맛보기’ 위해 볼베어링을 넣은 닭고기 요리인 ‘치킨 피아트’를 과연 사람들은 먹을 수 있었을까?
완전히 새로운 요리 세계의 탄생
먹는 이의 입맛을 고려했다면 미래주의 음식은 이렇게까지 ‘괴식’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래파는 음식을 고안 할 때, 식재료의 색과 형태, 향의 새로움을 먼저 생각했다. 또한 가볍고 민첩한 신체를 만드는 것이 현대적 인간의 덕목이라고 주장하며 ‘푸짐함’에 열광하는 식문화를 비난하며 적게 먹는 것을 강조했다.
이탈리아 미래파의 성격에는 마리네티라는 특출한 인물의 개성이 강하게 투영되었는데, 미래주의 요리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난다. 미래주의 후기에 마리네티는 <감촉주의 선언>을 발표할 정도로 ‘촉각’에 유난한 관심을 쏟았다. 입에 닿기 전 음식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최초의 감각은 ‘촉감’이라고 생각한 그는 나이프와 포크를 쓰지 않는 식사법을 제안하는가 하면, 왼손으로는 다양한 천 쪼가리를 이어 붙인 일명 ‘촉각기’를 문지르고 오른손으로는 음식으로 집어 먹게 하는 방법을 고안하는 등 자기만의 예술 논리를 이탈리아 식문화에 투과했다.(114쪽) 그렇게 단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요리 세계를 탄생시켰다.
단어 하나에까지 미래주의 가치 투영
89가지 미래주의 음식 제조법 소개
이 책에는 미래주의 음식 89가지에 대한 제조법(formula)도 실려 있다. 레시피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제조법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을 비롯해, 마리네티는 영어 또는 프랑스어로 통용되던 단어들을 이탈리아어로 바꾸어 쓰거나 아예 미래주의 용어를 새롭게 만들어 썼다. 그 대표적인 예가 ‘리스타비반데’(listavivande)로 ‘메뉴’를 대체하는 용어이다. 띄어쓰기조차 무시한 이 단어는 ‘음식 목록’ 정도로 직역된다. 이 책에서만 독특하게 쓰인 용어들은 책 후반부 “미래주의 요리 소사전”에 정리되어 있다.
전통을 조롱하며 오로지 현대화를 향해 질주했던
후기 미래파의 대표작
알려진 대로 미래주의는 이탈리아 파시즘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이 책에도 분명히 파시스트의 이상이 곳곳에 녹아 있다. 이탈리아 전통 음식에 그토록 반감을 표하면서도 해외 음식을 맹목적으로 즐기는 사람들에 대해서 비난을 감추지 않았던 미래파는 “해외병 환자를 규탄한다”(64쪽)는 성명서를 통해 이를 명확히 드러낸 바 있다.
한편, 1930년대에는 통용되었다지만 ‘검둥이’라는 인종차별적 용어를 사용한 점, 여성에 대한 혐오와 경멸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점 등은 오늘날 독자들에게는 불편한 대목일 것이다.
이러한 한계 속에서도 모든 규율과 위계에 저항해온 미래파의 예술 정신은 이후 등장한 미술 사조에 큰 영향을 미치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덧붙이는 말
이 책 곳곳에 단어와 단어 사이에 쉼표가 빠진 문장이 있다. 이는 ‘구두점을 사용하지 않는다’라는 마리네티 특유의 문학 기술인 ‘자유언어’의 원칙이 반영된 것이다. 이탈리아 원서에 적용된 부분에 한해 해당 원칙을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