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과 부여의 국통을 이은 중국대륙 동북방의 위대한 대제국,
고구려 역사와 강역의 부활을 꿈꾸다.
‘삼국사기 유리창을 깨다’ 시리즈 고구려편이다.
고구려는 광활한 중국대륙 동북방을 지배한 우리의 역사이다. 광대한 영토를 개척한 광개토왕, 중국의 수와 당을 물리친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양만춘의 안시성 전투는 우리 역사의 자부심이다. 철갑을 두른 고구려 무사, 그 진취적인 기상은 항상 우리 가슴속에 살아 숨 쉰다. 그렇지만 반세기 이상 남과 북으로 갈리어 대치하다보니 고구려 강역인 대륙의 동북방은 아예 잊혀진 땅이 되었다.
‘고구려 역사는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고구려본기> 기록을 읽다보면 분통이 터진다. 우리의 역사인지 아니면 중국의 역사인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다. 삼국사기는 중국사서의 기록을 상당 부분 인용한다. 또한 인용한 부분에 대해서는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인용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예를 들어 하나의 전쟁장면이 있다고 하자. 삼국사기는 중국이 승리한 경우에는 중국의 장수 이름, 동원된 병력, 전쟁 진행상황 등을 상세하게 잘도 기록해 놓았다. 그러나 고구려의 승리는 단지 중국을 이겼다는 정도이다. 장수 이름도 없고 어떻게 승리하게 된 것인지 실체가 모호하다. 어찌 이를 고구려의 역사기록이라 할 수 있는가?’(서문)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기록은 중국사서 기록을 무분별하게 차용한다. 그래서 고구려 역사가 우리의 시각이 아닌 중국의 시각으로 서술된 점이 적잖다. 이는 고구려를 중국의 옛 지방정권으로 규정한 동북공정의 논리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 이로 인해 중국은 고구려 역사뿐 아니라 압록강 이북의 고구려 문화유산을 모두 자신들의 소유로 만든다. 이 슬픈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고구려 역사를 우리의 시각으로 재해석하여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
<고구려본기>는 중국 한의 ‘낙랑군 한반도 평양설’의 근거를 제공한다. 이는 김부식의 역사통찰 부족으로 인해 만들어진 역사이다. 이를 일제가 철저히 악용하여 식민사학을 만들고 또한 조선병합의 역사적 근거로 활용한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는 고구려 역사를 기록하면서 뜬금없이 한무제가 설치한 한사군의 낙랑군을 평양에다 갖다놓는다. 그러다 보니 나머지 현도군, 진번군, 임둔군도 자연스레 한반도 북쪽지역에 펼쳐진다. 중국사서는 한사군의 위치를 중국 동북방지역으로 기록하는데도 삼국사기는 극구 부정한다. 일본은 이를 왜곡하고 철저히 악용한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우리 역사가 중국의 식민지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대못을 박는다. 조선병합의 역사적 근거라고 주장하는 「타율성론」의 허구이다. 이병도는 한술 더 떠 중국의 만리장성이 황해도까지 뻗쳐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일본은 고구려의 최초 건국 장소는 물론 고구려의 수도를 모두 첩첩산중인 압록강 중류지역의 중국 길림성 집안현 일대에다 몰아넣는다. 이는 마치 대한민국 수도가 강원도
평창 정도에 있는 꼴이다. 이 모든 허구의 역사는 삼국사기의 모호한 기록에서 비롯한다. 어찌 식민사관과 동북공정을 탓만 할 수 있겠는가?’ (서문)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저지른 고구려 역사 왜곡은 실로 가관이다. 특히 고구려 최초 도읍인 홀승골성의 잘못된 비정은 광대한 고구려 강역을 처음부터 싹둑 잘라낸다. 삼국사기는 요하 서쪽의 의무려산(요녕성 북진 서쪽)에 소재한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압록강 중류지역의 오녀산성(길림성 환인)으로 비정하여 고구려의 강역을 광활한 대륙 동북방이 아닌 동쪽 변방으로 축소시킨 만행을 저지른다. 안타깝게도 일제의 근거 없는 비정이 오늘날까지도 버젓이 우리의 역사 이해를 지배한다. 참고로 고구려는 홀승골성(요녕성 의무려산) → 위나암성(요녕성 북진) → 환도성(요녕성 해성) → 평양성(요녕성 요양) → 국내성(길림성 집안) → 평양성(평양 대성구역) → 장안성(평양 중심지역)으로 수도를 옮기며 역사의 부침을 겪는다. 고구려 수도 이동의 역사는 방대한 대륙 동북방 영토를 손실해가는 과정이다. 또한 우리민족의 영토가 한반도라는 협소한 공간에 갇히게 만든 안타까운 장면이다.
이 책은 고구려 건국에서 멸망까지 총 11장으로 구성하고 있다. 각 장별로 역대 왕의 치적과 잘못 그리고 중요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고구려본기> 기록을 중심으로 삼국사기가 정사로 자리매김하며 탈락한 고구려사략(남당필사본)과 중국사서 기록을 비교해가며 옳고 그름의 시비를 따져 고구려 역사를 새롭게 정립한다. 시조 기록을 정리한 추모신화는 단순히 고구려 건국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고조선의 맥을 이은 북부여 역사 180년을 압축하여 포함시킨 것이다. 태조왕의 아버지 재사는 왕력에서 빠진 신명왕이다. 신명왕은 삼국사기가 외면한 안타까운 역사의 희생양이다. 고국원왕의 국내성 천도를 한반도시대의 개막으로 이해한다. 결코 아니다. 국내성 천도는 중국대륙 동북방을 손실한 아픈 역사이다. 《광개토왕릉비》는 광개토왕이 정복군주임을 증명하는 상징적 유물이다. 그러나 비문기록에 나오는 광개토왕의 정복활동 내용이 삼국사기 기록에는 일체 나오지 않는다. 삼국사기는 광개토왕이 무슨 연유로 광개토의 시호를 받게 되었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영양왕은 진정한 수성군주이다. 한 이후 중국대륙을 통일한 수의 쓰나미 공격을 모두 막아낸다. 영양왕은 중국왕조의 명줄을 끊는 전대미문의 역사를 만든다.
고구려는 고조선과 부여의 국통을 이은 중국대륙 동북방의 위대한 대제국이며 우리의 소중한 역사유산이다. 이제는 삼국사기가 남긴 모호한 기록과 틀에서 벗어나 고구려 역사를 재정립하여 새롭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당연히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제의 식민사관이 쳐놓은 덫을 걷어내고 고구려 역사를 부활시켜야 한다. 역사는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면 역사가 될 수 없다. 먼 훗날 저 광활한 대륙의 땅을 되찾는 미래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