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유(韓愈, 768~824)는 당나라의 문인, 사상가, 정치가이다. 사상적으로는 문무주공이래 공자, 맹자로 이어지는 유가의 도통을 확립하였으며, 도가와 불가의 폐해를 지적하여 유가가 지도적 사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안사의 난 이후 피폐한 민생을 수습하고 안정된 정치를 부흥하려고 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적극 노력하였지만, 여러 당파로 갈려 온갖 참언과 비방으로 어지러운 정치현실 속에서 많은 좌절을 겪었다. 불골을 장안에 봉헌하는 문제에 대해 간언을 하다가 죽을 뻔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그의 정치적 강직함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문학적으로는 육조 이래로 수식과 형식을 추구하는 문학 작풍을 타파하고 고문의 질박하고 진정한 작풍을 되살리려는 노력을 하였다. 한유는 한문寒門 출신으로서 오로지 학문적 문학적 실력으로 정관계에 진출해야 했기 때문에, 문학혁신을 매개로 하여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이를 규합하고, 아울러 학문적 탁월함을 바탕으로 자신의 세력을 형성하고자 하였다. 이로 인해 막부 생활을 할 때부터 한유를 중심으로 많은 문인들이 모였으며, 문학적 교유를 통해 하나의 문학적 조류를 형성하였다.
한유는 비단 중문학에서만 그 위상이 높은 것이 아니었다. 한국의 여러 문인들 역시 그의 시를 모범으로 여기며 본받고자 하였다. 예컨대 고려 후기 최자崔滋가 지은 ≪보한집補閑集≫의 서문에 따르면 “시를 배우는 자는 율시에 대해서는 두보로 체격을 삼아야 하고, 악부시에 대해서는 이백으로 체격을 삼아야 하며, 고시에 대해서는 한유와 소식으로 체격을 삼아야 한다. 문장에 있어서는 모든 문체가 한유의 문장에 갖추어져 있다. 숙독하고 깊이 생각하면 그 체격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學詩者, 對律句體子美, 樂章體太白, 古詩體韓蘇, 若文辭, 則各體皆備於韓文, 熟讀深思, 可得其體.)”라고 하여 두보, 이백과 더불어 반드시 배우고 익혀야 할 시인으로 한유를 언급하였다.
≪韓昌黎詩繫年集釋≫(錢仲聯, 世界書局, 1961년)을 저본으로 하였고, ≪韓愈全集校注≫(屈守元·常思春, 四川大學出版社, 1996년) 등 여러 주석서를 참고하였으며, 한유의 시 세계의 다양한 면모를 파악할 수 있도록 전체 424수 중에서 63제 64수를 선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