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서점대상 2위
<주간분슌>
‘미스터리 베스트10’ 2017 2위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발굴한 사와야 서점의 ‘사와베스’ 2018 1위 등 다수 수상
평범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등에 진 어느 천재의 장대한 싸움
의문의 사체, 승부의 세계, 고흐의
해바라기로 엮어낸 감성 미스터리
《미생》을 통해 국내에서 바둑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던 것처럼, 최근
일본에서 불고 있는 ‘일본 장기 붐’에 막강 화력을 보탠
소설이 있다. 바로 서점대상 2위에 오르며 미디어와 대중에게
주목을 받은 《반상의 해바라기》이다.
《반상의 해바라기》는 2015년부터 한 신문 사이트에서 연재를 시작한
작품으로, 장기판이나 바둑판을 뜻하는 ‘반상’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 장기의 장기말이 살인사건을 풀 수 있는 단서로 등장한다. 하지만 단순히 살인범의 정체를 밝히는 미스터리라기보다는 그 수사 과정을 통해 살인에 얽혀 있는 여러 인물들이
오랜 시간 품고 있던 애증과 거스를 수 없는 숙명을 묵직하게 다루는 소설이다. 이 20여 년에 걸쳐 일어나는 방대한 인간 드라마는 가벼운 판타지나 연애 미스터리,
혹은 가슴 따뜻해지는 소소한 힐링 드라마 등 최근의 일본 소설 트렌드와는 거리가 멀어 오히려 주목을 받고 있다. 가족의 갈등, 살인사건, 업보
등이 거장 마츠모토 세이초의 《모래 그릇》을 연상시키는 《반상의 해바라기》는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후, 첫
페이지를 읽기 시작했을 때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강렬한 여운을 줄 것이다.
600만 엔 가치의 장기말과 함께 묻힌 사체가 발견됐다!
산속에서 우연히 발견된 사체. 그 옆에는 명인이 만든 희귀한 장기말이
함께 묻혀 있었다. 괴팍한 베테랑 형사 이시바와 한때 프로 장기기사를 꿈꿨던 신입 형사 사노가 콤비를
이뤄 이 사건을 수사한다. 명인이 남긴 장기말은 총 7벌. 두 사람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각 장기말의 위치를 추적한다. 장기말이
워낙 오래된 것이라 위치 파악에 난항을 겪는다.
한편, 가라사와는 자신이 쓰레기더미에 내놓는 장기 잡지 과월호를 신문
배달 소년 게이스케가 항상 빼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에게 주말마다 장기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게이스케가
도박에 빠져 사는 아빠에게 학대를 당하고 있다는 알게 된 가라사와는 게이스케의 천부적인 장기 재능을 살려주기 위해 프로 장기 기사의 길을 권한다. 하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결국 게이스케는 장기를 그만두고 평범하게 대학 입시를 치르게 된다.
수사 시작 4개월 후, 이시바와
사노는 장기말 단서를 바탕으로 전국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장기 대회장으로 향한다. 그곳에는 ‘불꽃의 기사’라고 불리는 천재 장기 기사가 있다. 대중이 열광하는 이 천재는 정말로 그들이 찾는 살인범일까.
현재와 과거를 유연하게 오가며 헤집는 살인과 승부의 뜨거운 현장
《반상의 해바라기》는 24년의 차이를 둔 두 가지 이야기가 교차되어
진행된다. 형사들의 살인범 추적 상황의 현재 이야기와 불우한 천재 소년 게이스케의 성장담인 과거 이야기. 두 이야기의 축은 현재에서 만나기 위해 전혀 다른 속도감으로 흘러가야만 하는데, 작가 유즈키 유코는 그 다른 속도감을 매우 자연스럽게 한 작품에 녹여냈다. 그
안에서 사체의 신원과 범인의 정체, 장기말의 주인을 찾는 과정,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경위 등 미스터리 요소들이 하나씩 풀려나갈 때의 쾌감과 함께, 게이스케의 파란만장한 인생
굴곡, 아무 보상 없이 게이스케를 아들처럼 돌봐주는 가라사와 부부, 두
형사의 티격태격 ‘케미’, 작품 속 각 캐릭터들의 이해 관계와
우여곡절 가득한 개인사, 섬세한 심리 묘사가 더해지며 드라마가 풍성해진다. 그리고 그만큼 읽는 이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아무 접점이 없어 보이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진행될 때 생길 수 있는 산만함은커녕, 오히려 《반상의 해바라기》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드는 요소가 바로 ‘일본 장기’다. 게이스케는
장기에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는 소년이고, 그 재능을 키우기 위해 동네 아저씨인 가라사와가 장기를
가르친다. 프로 장기기사는 되지 못했지만 대학에 들어가서도 장기를 취미로 두게 되고, 그 와중에 내기 장기 여행을 떠나게 되는 등 게이스케와 관련해 장기를 두는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한다. 작가가 한국어판 서문에서 말했듯이 ‘장기는 두뇌의 격투기’인 만큼 치열한 두뇌 싸움과 장고가 거듭되는 종목인데, 작가는 이런
장기 대국 장면들을 긴장감 넘치게 표현했다. 이 부분에서 일본 장기를 모르는 독자들이 최대한 쉽게 상황과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 번역가의 노력이 돋보인다. 또 더 재미있는 책 읽기를 위해 관련 설명
등도 책 뒷부분에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일본 장기가 등장했던 기존의 만화와 소설들처럼, 일본 장기가
중요한 소재이나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부분은 아니기에 장기를 몰라도 작품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작품
속에서 반상은 인생의 승부가 펼쳐지는 곳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게이스케의 갈등과 고통의 상징인
해바라기가 ‘피는’ 공간이라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반상의 해바라기》 속 반상을 통해 그 박진감과 승패의 묘를 느끼고, 주인공의
고뇌를 함께 할 수 있다.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들이 펼쳐내는 강렬한 아날로그 수사극
작가 유즈키 유코는 주로 강한 남자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를 집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번 작품에서도 생생한 남자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항상 제멋대로에, 마음 내키는 대로 하면서도 실력은 있어서 밑에서부터 차근차근 올라간 형사 이시바, 옆에 있으면 피해서 멀리 돌아갈 것 같은 도박장기사 도묘, 아이를
학대하고 마지막까지 그 아이의 인생을 착취하려고 하는 게이스케의 아버지 요이치 등. 날 것 같은 대사와
행동 묘사를 통해 이들은 작품 안에서 생명력을 얻고, 그 생생함이 독자들에게 전달되면서 작품 후반부에
드러나는 비밀과 진실이 더욱 파괴력을 갖게 된다. 이런 강한 캐릭터들이 얽혀 있는 와중에, 없어도 큰 지장이 없는 소소한 캐릭터들의 리얼한 대사와 상황, 표정
등이 변주처럼 삽입되어 밸런스를 맞추고 있다.
여기에 《반상의 해바라기》만이 가진 독특한 분위기는 그 ‘아날로그함’에 있다. 이 작품은 시대적 배경이 70년대부터 90년대 사이다. 스마트폰으로
장소 검색하고, 초정밀 과학 수사와 속도 수사가 가능한 지금과 달리,
극 중 형사 이시바와 사노는 발로 뛴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장기말의 주인을 찾기에 여념이
없다. 일일이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사람들과 대면하고, 증언과 증거를 수집한다. 디지털 시대의 정확함, 치밀함, 빠름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에 반해 20세기가 줄 수 있는 우직함과 집요함, 끈기가
아날로그 감성을 타고 작품 전반에 흐른다.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가’라는 것만으로 이미 작가의 역량을 가늠할 수 있고, 서점대상
2위 수상작이라는 사실은 이 작품이 대중성과 작품성을 겸비했다는 것을 보증한다. 하지만 굳이 그런 타이틀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반상의 해바라기》는 작가가 자신의 장점을 유감없이 발휘해 완성한
장대하고 중후한 드라마이자, 유즈키 유코라는 작가의 역량을 증명한 역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