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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 루이알튀세르
  • |
  • 오월의봄
  • |
  • 2018-11-21 출간
  • |
  • 228페이지
  • |
  • 135 X 210 X 17 mm /294g
  • |
  • ISBN 9791187373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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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그람시는 목욕물과 함께 아이까지 내다버리며……”

알튀세르의 그람시 비판을 세부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먼저 우리는 ‘유로공산주의’라는 노선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람시의 사상은 그 유로공산주의의 철학적 뿌리로 제시되었으며, 이탈리아는 물론 스페인, 영국, 일본, 미국 등 다수의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헤게모니를 획득한 바 있다. 다른 한편으로, 1976년 프랑스 공산당이 유로공산주의 노선에 입각해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을 포기하기로 했을 때 알튀세르가 이에 맞서 공개적으로 투쟁했다는 사실 역시 익히 알려져 있다. 알튀세르의 여러 유고집 중 하나인 《무엇을 할 것인가?》는 알튀세르의 바로 그 투쟁의 폭과 깊이를 매우 잘 보여준다.
이처럼 알튀세르는 그람시의 사상이 그 자신의 바람대로 전 세계의 대중에게 광범위하게 침투하고 있는 정세 속에서 정치는 물론 역사에 관한 그의 논의가 실제로 무엇을 겨냥하는지를 상세히 검토하고 싶어 한다. 알튀세르가 보기에 그람시는 ‘절대적 역사주의’ 혹은 ‘절대적 경험주의’라는 빈약한 함정 속에 빠져 있다. 절대적 경험주의는 구체적인 것에 대한 인식을 철학적 ‘이론’의 단순한 ‘적용’으로 개념화하는 심각한 위험을 피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분명한 이점을 갖지만, 그만큼이나 결정적인 이론적 취약점 또한 드러낸다. 구체적인 것이 역사적인 것이라고 제시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것이 항상 변화한다는 점을 전제해야 하는데, 그것은 결국 역사를 단순한 변화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역사를 단순한 변화로 간주할 때 우리는 어떠한 함정에 빠지게 될까?
위와 같이 절대적 경험주의에 기초한 절대적 역사주의는 역사에 존재하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구조들 혹은 그 구조들이 그 구조들에 영향을 미치는 변화들 아래에서 오랜 기간 지속된다는 점을 결정적으로 놓치고 있다. 마르크스가 언급했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라는 하나의 안정적인 구조를 말이다. 마르크스는 이 안정적 구조가 스스로를 영속화하는 수단으로 적대적 항들의 변화를 생산하는 조건을 필요로 한다는 점, 즉 안정적 구조와 변화의 유기적 관계를 이미 탁월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구체적 변화’를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것은 결국 안정적 구조에 대한 이해라 할 수 있다.
흔히 그람시는 상부구조의 이론가로 매우 잘 알려져 있다. 하부구조의 한 요소로 선언되었던 ‘생산력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스탈린주의적 정책이 진행되었던 시대에 그람시는 상부구조와 국가의 역할, 그리고 스탈린주의적 정치에 대항하는 정치의 역할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그람시의 상부구조론을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바라본다. 알튀세르는 그람시가 하부구조에 어떠한 분석도 할애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상부구조에 천착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그람시에게서 역사유물론은 말소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람시가 상부구조의 현상들, 즉 국가와 이데올로기에 제대로 관심을 쏟은 첫 번째 이론가였다는 사실은 한편으로 그가 하부구조를 철저히 버려둠으로써 상부구조를 하부구조와 맺는 유기적 관계 속에서 성찰하지 않았다는 점을 말해준다. 따라서 그람시는 국가, 법, 이데올로기들이 ‘있다’는 사실은 말할 수 있었지만 그것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어졌고, 왜 여기에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답하지 못했다. 이런 분석은 ‘사태나 사물이 원래 그러하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는 역사주의, 즉 하나의 경험주의이다.
이뿐만 아니라 그람시는 생산양식이라는 마르크스주의적 개념을 ‘역사적 블록’이라는 개념으로 대체하려는 경향을 보여준다. 생산양식이 두 계급 사이의 근본적인 적대가 작동하는 장소인 생산관계에 의해 정의되는 것과 달리, 그람시의 ‘역사적 블록’은 ‘윤리적이고 역사적인 통일체’라는 완전히 다른 무엇을 환기한다. 그람시는 국가를 ‘유기적 지식인들’을 통해 ‘인민’에게 행사되는 헤게모니에 의해 통합된 윤리적 총체성으로 사고된 역사적 블록으로 개념화했지만, 이 인민들을 윤리적 국가의 ‘시민’으로 만드는 관념들과 실천들을 주입할 때 특정한 폭력이 행해진다는 점은 포착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 이런 관념적이고 이상적인 국가 형상에는 계급과 계급투쟁에 관한 것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모든 것이 상부구조로 환원될 뿐이다.
이러한 난점은 국가와 시민사회를 구분하는 데에서 한층 더 심화되어 나타난다. 그람시는 공적인 연합체인 국가와 달리 시민사회를 국가 바깥에 존재하는 사적 연합체들 전체로 제시하며 표면적으로 국가와 시민사회를 구분지었다. 이 사적 연합체들은 공적이지 않고, 법/권리의 관점에서 국가와 그 어떤 관계도 맺고 있지 않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사적 연합체인 시민사회를 ‘헤게모니적 장치들’로 형언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 장치들의 구조라든지 기능에 대해 그 무엇도 말해주지 않는다. 마치 ‘우산은 비 내릴 때 쓰는 물건’이라는 (아무런 지식도 제공하지 않는) 동어반복처럼, 그람시는 ‘이 장치들이 헤게모니적’이라고 이야기한다. 헤게모니적인 것의 원인이 무엇인지, 헤게모니가 어떻게 보증되고 수용되는지 따위가 언급되지 않는다면 결국 헤게모니에 대해 말해진 것은 하나도 없다. 이렇듯 그람시는 헤게모니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묘사의 층위에 머무르고 있다. 나아가 그람시가 보고 있는 국가의 두 가지 계기, 즉 국가에는 힘/강제/폭력/독재라는 계기와 다른 한편 헤게모니/동의/일치라는 계기가 존재한다는 인식에는 다음과 같은 모순이 존재한다. 헤게모니라는 계기가 가리키는 것은 결국 시민사회인데, 국가 바깥의 사적 연합체로 사고된 시민사회가 어떻게 국가의 한 계기가 될 수 있는지는 짚어내지 않는 것이다. 국가의 본질적 계기 하나가 국가 외부의 존재라는 형태를 취한다는 점에 대해 그람시는 어떠한 성찰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람시는 여전히 마르크스와 레닌과의 관계를 완전히 끝내지 못했다. 그는 국가가 지배계급의 손에 쥐어진 도구이기도 하다는 점, 그리고 강제적 힘과 헤게모니에 대한 문제의식 뒤편에서 국가라는 수단에 의해 행사되는 계급독재라는 질문이 제기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계급독재에 대해 말하는 대신, 헤게모니 개념이 그 대체물 역할을 수행하도록 만드는 쪽을 택했다. 시민사회가 국가의 바깥에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국가와 연결되고, 결국에는 국가 전체를 포괄하는 데에까지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주지한다면, 우리는 그람시가 결국 국가 자체를 하나의 헤게모니 현상으로 대체하는 데 이른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알튀세르가 여러 번 지적했듯 그람시는 헤게모니(즉 그것의 동력)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그람시에게서 국가의 계기 중 하나였던 힘은 그 자체로 헤게모니(지배계급에 의해 획득된 동의) 속으로 흡수되고, 이 힘은 모든 사람들의 일부분이 되어 비가시적이 되어버린다. 여기에서 알튀세르는 국가에 분명 존재하지만 비가시적이 되어버린 이 힘을 그렇게 ‘비가시적으로’ 작동시키는 수많은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의 존재를 언급함으로써, 그람시에게서 결정적으로 빠져 있는 것이 ‘이데올로기론’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그람시가 그토록 침묵했던 헤게모니적 장치들의 헤게모니적 효과의 원인이 해명되기 위해서는 결정적으로 이데올로기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람시인가 마키마벨리인가

절대적 역사주의를 겨냥해 그람시 사상의 거대한 공백 지대를 짚어낸 알튀세르는 궁극적으로 그람시를 마키아벨리와 대조함으로써 그 사상의 취약점을 선명히 부각시킨다. 그람시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 혹은 그람시 사상의 중요한 출발점이 마키아벨리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람시는 마키아벨리가 주창했던 새로운 군주의 모습에서 당대에 필요했던 노동계급에 기반을 둔 혁명 정당의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그람시가 그의 스승인 마키아벨리에 비해 사상적으로 한참 빈약하다고 꼬집는다. 마키아벨리와 달리 그람시는 국가 안의 헤게모니에 대해 힘(군대)이 취하는 우위를 주장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람시가 헤게모니에 대한 힘의 우위를 간파하지 못했던 이유는 그가 힘을 생산적이고 비옥한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고, 따라서 힘이 헤게모니의 효과를 ‘생산’할 수 있는 장소로서의 전략(시민들을 군대에 통합시킴으로써 정치적으로 교육하기)이 될 수 있다는 점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힘이라는 것을 난폭하고 벌거벗은 것으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사자의 힘만을 떠올렸던 그는 결코 여우(간지, 즉 이성 전체가 가장할 수 있는 힘에 달려 있다는 점에서 인간보다 더욱 지적인 짐승)의 힘, 즉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다.
마키아벨리는 그람시와는 대조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하지 않았다는 것이 알튀세르의 평가이다. 다시 말해 마키아벨리는 ‘헤게모니적 장치들’을 제대로 작동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변했고, 그럼으로써 이데올로기론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헤게모니를 그저 헤게모니의 효과들로만 정의하는 것은 하나의 동어반복에 그칠 뿐이므로 그 효과가 아닌 ‘동력’을 정확히 밝혀내야 한다는 것을 마키아벨리는 알고 있었다. 국가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이데올로기’로 헤게모니를 정의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알튀세르는 이렇듯 마키아벨리가 국가의 기능이 지니는 한 측면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개념으로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라는 개념에 이르는 길을 처음으로 개척했다고 평가한다. 마키아벨리는 이데올로기를 국가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사고했을 뿐 아니라, 나아가 이데올로기의 물질성까지 정확히 간파해냈다. 그는 이데올로기가 ‘관념들’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물질성, 즉 이데올로기를 실현하는 ‘장치들’의 물질성이라는 점을 정교하게 보여주었다. 이데올로기의 힘은 분명 사자의 힘이 아니라 여우의 힘이며, 이 힘의 핵심은 물리적 폭력이든 가장이든 이를 만들어내기 위해 사자의 힘을 분별력 있게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 국가권력을 사자의 힘과 여우의 힘이라는 이중의 능력을 갖춘 것으로 사고했다는 것이 마키아벨리를 그람시와 구분짓는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유로공산주의와 그람시

알튀세르는 유로공산주의 전략의 역설에 대해 설명한다. 유로공산주의 전략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이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유로공산주의가 스스로의 고유한 이론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역설이 드러난다. 구체적 분석 없이 이론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결국 유로공산주의는 고유한 이론을 갖지 못한 채 다른 이론들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그 다른 이론 중 하나가 바로 그람시의 사상이다.
그람시는 유로공산주의로 하여금 국가권력의 쟁취를 전면적 공격의 결과로서, 즉 모든 법을 위반하고 민주주의를 무시하는 인민의 폭력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시민사회의 정복을 목표로 하는 ‘진지전’의 결과로서 사고할 수 있게 한다. 민주주의적 법에 가해지는 폭력을 전제하는 전면적 공격과 달리 시민사회에 대한 정복은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듯’ ‘벽돌을 하나하나 쌓아가듯’ 위치를 하나하나 점해가는 식으로 행해진다. 이러한 점진적 ‘전진’은 그 어떤 폭력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기존 법, 즉 기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따라 정복이 이루어지는 것을 가능케 한다.
하지만 이처럼 폭력 없이 동일한 수단으로 시민사회를 정복함으로써 국가를 충분히 정복할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알튀세르는 바로 여기에서 헤게모니에 관한 그람시의 이론의 실체를 확인한다. 그의 이론은 어느 한 국가의 ‘헤게모니의 한 계기’로서 ‘시민사회’에 관한 이론이 아니라, 헤게모니로서 국가에 관한 이론,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헤게모니라는 통념을 통해 국가라는 통념까지도 대체하는 이론이다. 알튀세르는 결과적으로 그람시가 계급독재와 국가라는 두 가지 계기를 헤게모니라는 통념 속으로 욱여넣는다고 지적한다. 한 사회 안에서 전개되는 계급투쟁과 관련해서, 그리고 국가가 바로 그 계급들의 분할을 재생산하는 특수한 도구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과 관련해서, 그람시는 계급과 계급투쟁 모두를 말소한다. 대신 자신이 ‘헤게모니 투쟁’이라고 부르는 것, 그러니까 지배계급의 헤게모니와 피지배계급의 헤게모니 사이의 투쟁이라고 부르는 것만이 존재한다. 계급투쟁이 헤게모니 투쟁으로 사고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국가 자체가 지배계급의 헤게모니로 흡수된다는 점에서 국가라는 질문은 실천적, 이론적으로 비워진다.
궁극적으로 이는 국가의 정복이라는 질문을 시민사회의 정복이라는 질문으로 환원시킴으로써 국가라는 질문 자체를 제기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알튀세르가 보기에 그람시는 이렇게 하나의 현실을 또 하나의 현실로 환원하고, 하나의 질문을 또 하나의 질문으로 대체하는 것에 굴복했던 것이다. 그중 가장 심각한 것이 바로 국가를 시민사회로 환원, 대체한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가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그람시에게서 국가는 헤게모니의 현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정말로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질문될 수도 없다는 것.


목차


편집자 노트 ㆍ 7

1장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무엇 11
2장 안토니오 그람시의 절대적 경험주의 53
3장 그람시인가 마키아벨리인가? 119
4장 그람시, 유로공산주의, 계급독재 151

미주 ㆍ 162
옮긴이 해제 ㆍ 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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