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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그리움이다

집은 그리움이다

  • 최효찬
  • |
  • 인물과사상사
  • |
  • 2018-12-21 출간
  • |
  • 396페이지
  • |
  • 166 X 224 X 27 mm /780g
  • |
  • ISBN 9788959065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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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집을 위한 인문학
“집은 우리의 최초의 세계다”

집은 단순히 거주하는 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성장사와 함께하는 공간이다. 집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영혼을 따뜻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자취방에서 저 자취방으로, 이 빌라에서 저 빌라로, 이 아파트에서 저 아파트로 옮겨다니며 살아왔다. 한곳에서 오랫동안 거주하는 정주(定住)의 삶이 아니라 초원의 목동처럼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유목(遊牧)의 삶을 살아왔다. 인간의 성장사가 여러 집에서 살았던 흔적들을 모자이크하듯이 구성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우리는 유목민처럼 여러 집을 전전하면서 우리가 갖고 있던 삶의 기억들을 축적하지 못하고 흩날려버렸다. 집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도 모두 가뭇없이 사라졌다. 집이 사람들과 교류하는 공간이 되지 못했으며, 인문학의 향기가 피어나지 못했다. 그렇다면 21세기 노마드 시대에 정주의 삶은 가능한가? 또 인간에게 집은 무엇인가? 집은 인간의 영원한 노스탤지어인가?
프랑스 철학자인 가스통 바슐라르는 “집은 우리의 최초의 세계다. 그것은 정녕 하나의 우주다”라고 말했다. 바슐라르는 우리가 어머니의 자궁에 있을 때 무의식 속에 형성된 이미지로 어떤 공간에 감싸이듯이 집에서 안온함과 평화로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만큼 집은 인간의 성장에 크나큰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건축가 승효상은 “건축은 집을 짓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집은 하부구조이며 그 집 속에 담기는 우리들의 삶이 그 집과 더불어 건축이 된다”라고 말했다. ‘행복의 건축’이 되는 관건은 건축 이후에 그 집에 깃들어 살아가는 이들의 숙제라는 말이다. 집의 하드웨어는 시공사가 만들지만, 그 집을 완성시키는 몫은 그 집에 깃들어 사는 사람이라는 말과 같다.
인문학자인 최효찬과 한옥 건축가인 김장권이 함께 쓴 『집은 그리움이다』는 우리가 정말로 살고 싶은 집에 대한 이야기다. 최효찬은 결혼한 이후 지금까지 23년 동안 12번을 이사했고, 10번 이상을 아파트에서 살았다. 정확히 2년도 안 돼 한 번꼴로 이사를 한 셈이다. 그런데 최효찬은 아파트에서 오랫동안 살았지만, 그곳에서 살았던 기억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한다. 아파트는 땅이 아니라 허공에 공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인지 혹은 획일적인 공간 때문인지 몰라도 이사를 하면 그곳에서 살던 기억마저 덩달아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삶이 휘발유처럼 싹 날아가버린다는 것이다.
최효찬은 『집은 그리움이다』에서 “인간에게 집은 과연 무엇이며, 어떤 곳인가?”라고 묻는다. 집에는 그 집만의 고유한 이야기가 있다. 각기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집이라면 주인의 취향과 그 집을 지으면서 고심한 흔적들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마당의 꾸밈이나 대문의 위치에서도 그 집만의 고유한 풍경이 펼쳐져 있다. 다시 말해 집은 개인적인 취향이나 기호에 따라 개인의 의지로 짓거나 선택할 수 있는 주거 공간이어야 하며, 그 집에는 가족의 정과 추억과 그리움이 오롯이 쌓여야 한다.

우리에게 집은 무엇인가?

대부분 우리는 아파트라는 공동 주거 단지에서 살아간다. 누에고치 집처럼 지어진 아파트는 그야말로 베드타운의 전형이다. 아파트는 모든 게 잘 갖추어져 있다. 우리는 아파트에 들어와 밥을 먹고 씻고 잠을 자면 된다. 다시 아침에 일어나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기에 최적화된 구조가 아파트다. 우리가 흔히 말할 때 홈(home)은 안식의 거처로서 가족의 정이 느껴지는 공간을 의미한다면, 하우스(house)는 건축물의 기능을 갖춘 공간으로서 집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아파트는 집을 홈이 아니라 하우스의 기능으로 전락시킨 상징적인 구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나라 아파트 주거 문화는 노동의 지속적인 재생산에 합리적인 주거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곳에는 우리의 기억이 축적될 수 없다.
데이비드 하비는 1972년 미국 신도시 세인트루이스의 프루이트-이고 주거 단지 폭파 철거를 모더니즘적 건축물의 상징적 죽음이라고 말했다. 하비는 프랑스 사회학자인 앙리 르페브르의 도시주의를 계승했는데, 르페브르는 주거 공간이 자본주의적 생산을 새로운 지역으로 확대시키는 하나의 주요한 상품으로 기능한다고 보았다. 또 자본주의는 오직 공간을 점령하고, 공간을 창조함으로써만 생존해왔다고 주장했다. 미국이 이미 50여 년 전에 거대한 아파트를 폭파한 것인데, 우리나라 신도시들도 언젠가 폭파되는 운명을 맞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전국에 우후죽순처럼 솟아나는 아파트 단지들이 수십 년 후에 사회적인 재앙이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는 이유다.
퇴계 이황은 고향에 집 다섯 채를 지었다. 퇴계는 단순히 집을 소유한 건축주가 아니라 집을 짓는 데 그의 성리학적 세계관을 집짓기에 적용시키고, 직접 설계도를 그리는 등 탁월한 안목을 보여주었다. 30세 때 지산와사를 짓고 자신이 거처하는 방을 선보당이라고 한 이후 46세 때 양진암, 49세 때 한서암, 50세 때 계상서당, 마지막으로 61세 때 정면 3칸, 측면 1칸의 아주 소박한 규모의 도산서당을 끝으로 기나긴 건축 여정을 마감했다. 퇴계의 집짓기에는 이상적인 집을 마련하려는 평생의 소원이 담겨 있었다. 퇴계는 땅을 구하고 집을 짓는 데 자신의 철학과 재산을 모두 투입했다. 자신의 마음에 드는 터를 구하고 그 기쁨을 시로 짓고 노래하고 이를 제자와 아들에게 보여주었다.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 따르면, 옛 선비들은 산수간에 집을 짓고 사는 게 이상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선비들은 별장을 마련하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결국 계획만 세우다 늙고 말았다는 것이다. 서유구는 76세 때 광여루를 짓기도 했다. 누각의 기문(記文)은 당시 최고의 문장가인 홍길주(洪吉周)에게 부탁했다. 여기서 3년 더 살다가 80세에 세상을 떠났다. 서유구는 임원(林圓)에서 우아하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했다. 서유구가 말하자고 하는 것은 전원에서 집을 짓고 행복한 삶을 꿈꾼다면 지금 당장 집을 지으라는 말이 아닐까 싶다.
생텍쥐페리는 늘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유년 시절로 돌아가려고 했다. 생텍쥐페리가 실종되기 전 마지막으로 비행한 곳도 유년 시절을 보낸 집 인근이었다. 생텍쥐페리는 4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귀족인 친척들의 저택에서 번갈아 더부살이를 했다. 그는 웅장하고 고색창연한 성(城)의 안팎에서 뛰놀며 토끼, 거북, 달팽이, 여우 같은 동물들을 키우며 길들일 수 있었다. 동물 길들이기는 그가 20대 후반에 조종사로 취직해 사하라 사막에서 근무할 때까지 이어졌다. 그는 영양이나 카멜레온, 사막의 작은 여우 등을 길동무로 삼고 길들이기도 했다. 그가 어머니와 보낸 유년 시절은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던 것 같다. 전쟁 중 생사를 넘나드는 상황에서도 유년 시절의 기억들을 끄집어내 마음의 평화를 얻으면서 힘겨운 나날을 버텨낼 수 있었다. 생텍쥐페리는 언제나 유년 시절을 보낸 집에 대한 그리움과 집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다산 정약용의 제자인 황상의 일속산방, 주자의 무이정사, 이언적의 독락당, 조식의 산천재, 김장생의 임리정, 송시열의 팔괘정, 정약용의 다산초당, 두보의 완화초당, 르코르뷔지에의 통나무 별장과 어머니의 집, 몽테뉴의 서재가 있는 집, 데카르트의 철학을 잉태한 집 등은 모두 집이 인간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 집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사상과 철학과 도덕을 짓고 살았다.

“나는 33번을 이사했다”

최효찬은 고향집을 떠난 이후 고등학생 시절을 보낸 경남 진주 옥봉남동과 상대동의 자취방, 대학생 시절을 보낸 서울 개화동과 등촌동과 창천동과 연희동의 자취방, 창천동과 대신동의 하숙집, 대학 졸업 이후 대신동의 월세방, 신혼 생활을 시작한 경기도 고양시 화정동의 아파트, 생애 첫 번째 내 집인 경기도 고양시 일산의 빌라, 두 번째 내 집인 서울 강서구 가양동의 아파트, 경기도 고양시 일산의 아파트를 거쳐 서울 홍은동과 은평구의 아파트, 은평한옥마을에 집을 짓고 채효당에 깃들기까지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이제까지 최효찬은 무려 32번이나 집을 옮겨다녔다. 그리고 2017년 7월 입주한 채효당은 고향집을 떠난 이후 33번째 맞은 집이다.
최효찬의 고향집은 불행하게도 1987년 합천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되었다. 고향집이 존재하지 않는다. 고향에 가면 합천호 그 어디쯤에 있다고 상상만 할 뿐 이제는 사진으로밖에 볼 수 없다. 고향집은 합천 황강 지천이 있던 옥계초등학교 바로 옆에 있었다. 아버지가 지은 이 고향집은 안채와 사랑채, 잠실 등 4채로 구성되어 있었고 좌우로 남새밭이 있었다. 잠실 앞쪽에 작은 가게가 있었고, 안채 뒤쪽과 집 앞쪽, 남새밭에는 감나무가 일곱 그루 정도 있었다. 마당에 배나무도 두 그루 있었다. 마당 앞에는 탱자나무가 울타리를 치고 있었고, 남새밭에는 구기자나무가 울타리 삼아 심어져 있었고, 초피나무와 감나무도 있었다.
최효찬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고향집을 떠나 진주로 나간다. 옥봉남동의 단칸방에 누나와 형과 함께 살았는데, 이 집이 고향집을 떠난 이후 첫 번째 집이다. 누나는 공장에서 야간과 주간을 번갈아 근무하면서 두 남동생의 뒷바라지를 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3남매가 자취 생활을 한 것인데, 누나가 어떻게 남동생들과 한 방에서 잠을 자고 생활했을지 상상할 수가 없다.
대학에 진학한 최효찬은 자취방 한 칸 얻을 돈이 없는 고학생이었다. 도봉구 안방학동에 있는 고등학교 친구의 큰 형님 집에 잠시 친구와 한방을 쓰기로 했는데, 이 집이 고향집을 떠난 이후 다섯 번째 집이다. 이곳에서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2개월 동안 얹혀살다가 북아현동에 있는 인우학사에 들어간다. 기숙사비가 부담되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 비용은 몰래 과외를 해서 마련했다. 이후 친척집에서 ‘입주 과외’를 했는데, 중학교 3학년인 친척의 큰아들을 턱걸이로 고입 연합고사에 합격시켰다.
개화동 자취방은 고향집을 떠난 이후 여덟 번째 집인데, 서울 생활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처음으로 ‘나만의 방’을 갖게 되었다. 이 집은 월세가 5만 원이었다. 이 방에서 바라다본 김포공항의 활주로 불빛들은 더 넓은 세상을 동경하던 최효찬에게 그 세상으로 가는 관문이기도 했다. 그 불빛들을 보고 있으면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듯해서 희망에 부풀기도 했다.
군대에 갔다 온 이후 대학교에 복학하고 나서는 전셋집과 하숙집을 전전했다. 등촌동 단층집, 창천동 2층 옥탑방, 연희동 빌라, 연남동 단독주택, 그리고 네 군데의 하숙집, 원룸 전세, 이문동 자취방, 고향집을 떠난 이후 20번째 집이자 결혼하기 전 마지막으로 살았던 자취방까지 최효찬은 유목민처럼 어느 한곳에 정주하지 못하고 여러 집을 전전하며 살았다.
최효찬은 경기도 고양시 화정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고향집을 떠난 이후 21번째 집이다. 그것도 대출을 받아 겨우 전세금을 마련해 신혼살림을 차린 것이다. 그리고 새천년이 시작된 해에 입주한 경기도 일산의 빌라는 고향집을 떠난 이후 24번째 집이자, 생애 처음으로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룬 집이다. 이 집에서 살 때 아들은 눈만 뜨면 놀이터에 나가 아내가 밥 먹자고 외칠 때까지 또래 아이들과 놀았다.
아내의 과외 때문에 이사를 했는데, 대형 평수의 복층 빌라에 전세로 입주했다. 다시 전세살이가 시작되었다. 이 집은 고향집을 떠난 이후 25번째 집이다. 그 후 단독주택에서 살고 싶은 생각에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으로 이사하고, 아파트로 빌라로 다시 아파트로, 서울의 아파트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은평뉴타운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최효찬은 결혼한 이후에 12번을 이사했는데, 전세 기간인 2년마다 집을 옮긴 것이다. 그리고 결혼한 지 22년 만인 2017년에 서울 은평한옥마을에 채효당을 지었다. 채효당은 최효찬이 고향집을 떠난 이후 33번째 집이다.

노마드 시대에 정주의 삶을 꿈꾸다

최효찬이 북한산 자락에 한옥을 짓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은평한옥마을 부지 바로 인근 아파트에 살고 있어 이곳을 매일 산책하다시피 했는데, 2014년 10월 초 미분양 공고를 보고 땅을 매입한 것이 계기였다. 땅을 구입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지만, 아내와 상의를 하고 나서 무턱대고 계약을 했다.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닌데도 어떻게 하면 장만할 수 있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2015년 9월 초 북촌HRC의 김장권 대표를 만나 설계를 맡기고, 1년 후인 2016년 9월 구청의 심의를 마쳤다. 설계도는 수정을 5번 정도 거치면서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크게 바뀌었고 평수도 45평으로 늘어났다. 2층과 지하층에 대한 생각도 덧붙여지면서 욕심이 커지기도 했고 다시 줄어들기도 했다.
2016년 10월 터파기 공사를 시작했다. 10월부터 12월까지 기초공사를 하고 겨울철에 공사를 중단한 후 2017년 2월 말에 다시 목구조 공사에 들어갔다. 3월 초에 상량식을 했고 기와 공사, 내부 수장재 공사 등을 거쳐 2017년 11월에 준공 승인이 났다. 계획상 준공은 5월이었는데 6개월 정도 공사가 연장되었다. 그 기간에는 하자 등을 발견하고 보완했다. 이렇게 해서 은평한옥마을에 지상 2층의 채효당을 짓게 되었다.
김장권 대표는 채효당을 지을 때 이렇게 말했다. “작지만 큰집, 차돌처럼 단단한 집, 바늘 한 곳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알찬 집, 군자의 향기가 피어나는 집, 단아하면서도 기품이 있는 집, 누구나 머물고 싶은 집이 될 겁니다.” 최효찬도 김장권 대표에게 “집이 무겁지 않아 편안하고, 만만하지만 가볍지 않고 단단한 느낌의 집, 시골집의 정겨움이 묻어나오는 집”이면 만족한다고 말했다. 집을 짓는 일은 인생에서 의미 있고 즐거운 일이다. 집을 짓는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삶에서 가장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집짓기는 과한 것은 덜어내고 부족한 것은 보완하는 지지(知止)의 과정이다. 이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면 집이 인간을 지배할 수도 있다. 한껏 욕심을 부리면 집이 너무 무겁고 육중해서 인간을 억누르는 괴물이 되고 만다.
최효찬 가족은 채효당을 정주의 공간으로 삼으려고 한다. 도시에서 정주의 삶을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개발이나 직장으로 인한 이사 등으로 한곳에 머물러 살기란 좀체 힘들다. 그래도 최효찬 부부는 아들에 이어 그 후손들도 세대를 이어 채효당에서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인간관계의 단절은 갈수록 더욱 심해질 것인데, 그 이유는 우리 사회의 주거 문화가 아파트가 대세라는 데서 충분히 물증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김장권 대표가 지은 한옥 이야기 : 살고 싶은 집을 짓는다는 것

한옥은 시대상과 문화적 사고가 반영되고, 그곳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 사람들의 생활이 변화하듯이 그들과 함께 변해야 한다. 한옥이 과거의 역사적 실례(實例)가 아닌 현대에도 유효한 쓰임을 발견할 수 있는 하나의 전통이어야 하는 것이다. 한옥에 변화를 주고 변화를 주지 말아야 하는 기준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다. 한옥이 진정 사람에 대한 배려가 있는 공간이라면, 시대와 문화와 함께 변화해가는 공간이어야 마땅하다.
한옥은 어디 갔다 온 것이 아니라 우리가 버리고 내버려두고 옆에 두지 않고 함께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기에 그 이전의 모습으로 그냥 그곳에서 서 있었던 것뿐이다. 이제 우리가 그곳으로 들어가 생활할 수 있도록 변화를 주어야 할 것은 변화를 주어 한옥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치유와 재생을 통해 한옥으로 들어가야 한다. 한편으로 우리 건축인 한옥은 우리 삶이 변화함에 따라 얼마만큼 변화했는가? 과거의 집인 한옥이 현재에도 유효하고 미래의 집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김장권 대표가 200여 채의 한옥을 지으면서 항상 품고 있던 질문이다.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 있는 #200은 ‘들어가고 싶은 집, 살고 싶은 집’이라는 콘셉트로 지은 집이다. 한옥이 갖고 있는 형태적 완성도를 유지하면서 한옥의 단점인 단열과 수납공간의 부족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한옥이 현재에 맞는 자유로운 형태와 기능 변화를 할 수 있게 해서 다양한 쓰임으로 사용해도 불편함이 없이 언제나 ‘살고 싶은 집’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리고 도시형 한옥이 갖는 부족한 공간을 보완하기 위해 처마선 안쪽에 머리벽장을 만들고, 대청 뒤쪽은 지하 계단실과 작은 마당을 만들어 마당과 대청, 뒷마당이 단절되지 않고 소통할 수 있도록 했다. #200은 2013년 올해의 한옥상과 2016년 서울시 우수 한옥에 선정되었다.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 있는 일우재는 ‘하루도 넉넉하고 햇살도 넉넉한 집’이라는 콘셉트로 지은 집이다. 두 부부와 두 아이가 함께 사랑하며 정답게 살아갈 집, 소박하고 정이 가고, 이웃과 정담을 나누며 도심 속에서 자연을 즐기며 살고 싶은 집으로 만들었다. 작지만 부족함이 없고, 많지 않지만 넉넉한 집으로 말이다. 그런 소망을 담아 마당 가득히 햇살이 넉넉하고 집안 가득히 하루가 넉넉하기를 바랐다. 또 마당은 협소하고 건물은 낡아 보기에도 남루하고 옹색한 1927년에 지어진 집이 현재에도 유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과거의 유효한 집에서 현재에도 유효한 집으로 거듭나기 위해 한옥을 현대적 방식으로 치유하고 재생하려고 했다. 전통과 현대를 잇기 위해 고민하고 사람과 집 사이의 교감을 담아내려고 했다.
서울시 은평구 진관동이 있는 채효당은 ‘세상에서 가장 큰 집’이라는 콘셉트로 지은 집이다. 채효당을 계획할 때 가장 오랜 시간 고민한 것은 작은 대지의 공간을 과거와 이어지는 현재와 미래의 삶을 담는 유효한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은평한옥마을에서 가장 작은 40평 면적의 대지에 2층 한옥을 통해 우리 삶에 일상의 건축으로 한옥이 자신의 몫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채효당은 작은 대지에서는 꿈꿀 수 없었던 한옥을 안채, 별채, 사랑채 등의 공간 구분을 통해 기능과 역할을 부여했다.
채효당은 한옥의 가구법(架構法)으로 건축되었지만, 현재와 미래에도 여전히 유효한 공간으로 오래된 집이 갖고 있는 축적과 자기 성찰을 반영했다. 낮추기와 작음으로 겸손과 의연함을 갖추도록 크기와 높이가 아닌 깊이의 켜를 통해 한옥의 품격을 유지했다. 또 다양한 수납과 형태로 시대성을 담아내려고 했다. 지하층은 가족이 화합하면서 다양한 모임을 할 수 있는 별채 공간으로, 1층은 안방, 자녀방, 주방, 대청 등 안채 공간으로, 2층은 서재와 손님방, 소청 등 사랑채 공간으로 계획했다. 그렇게 해서 작은 한옥이 마을 만들기와 도시 재생에서 다양한 역할을 하고 다양한 쓰임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채효당은 2018년 대한민국 목조건축대전 본상과 2018년 서울시 우수 한옥에 선정되었다.


목차

프롤로그 - 6

제1장 집에 대한 그리움
집은 어떤 곳인가? - 17
영원한 집은 어디에 있는가? - 22
오두막집에서 행복 찾기 - 28
작은 집을 짓다 - 34
영혼이 따뜻해지는 집 - 39
외가에 대하여 - 45
고택, 그 오래된 미래 - 51
나바렝스에 살고 싶다 - 56

제2장 집을 위한 인문학
그리움이 완성되어 집이 되면 - 65
이황, 이상향을 짓다 - 71
철학으로 짓는 집 - 78
산수간에 집을 짓고 - 85
두보의 집은 어디인가? - 90
르코르뷔지에의 작은 집 - 96
생텍쥐페리의 유년의 집 - 101
몽테뉴의 서재가 있는 집 - 107
데카르트의 철학을 잉태한 집 - 114

제3장 나의 집 순례기
나는 33번을 이사했다 - 123
기억 속의 영원한 고향집 - 129
3남매가 살았던 자취방의 기억들 - 138
무작정 상경과 얹혀살기 - 143
지상에서 가장 큰 방 - 148
전셋집과 하숙집에 대한 추억 - 155
전세로 신혼 생활을 시작하다 - 163
내 집을 마련하다 - 169
다시 전세살이를 하다 - 175
단독주택에 살다 - 179
빌라와 아파트에 살다 - 186
다시 내 집을 마련하다 - 191
다시 아파트에 살다 - 197
정주의 꿈을 꾸다 - 201

제4장 집을 짓다

토지를 매입하다 - 216
자금을 마련하다 - 219
집을 설계하다 - 222
땅을 측량하다 - 252
설계도를 심의받다 - 256
시공을 맡기다 - 260
착공을 하다 - 263
당호를 짓다 - 268
상량식을 하다 - 273
기와를 얹다 - 277
창문을 달다 - 281
보일러를 놓다 - 284
도배와 장판을 하다 - 287
현판식을 하다 - 290
책을 버리다 - 293
대문을 놓다 - 296
담장을 두르다 - 301
준공검사를 받다 - 305
건축물대장을 받다 - 308

제5장 내가 만든 한옥 이야기
관훈재 : 보전과 발전을 동시에 품다 - 318
#200 : 들어가고 싶은 집, 살고 싶은 집 - 330
일우재 : 하루도 넉넉하고 햇살도 넉넉한 집 - 342
일연재와 교월당 : 자연을 닮은 집, 달빛이 밝은 집 - 354
건명원 : 사람이 나무를 키우고 나무가 사람을 키우는 집 - 366
채효당 : 세상에서 가장 큰 집 - 378

에필로그 - 390
참고문헌 - 394

저자소개

최효찬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비교문학) 학위를 받았다. 17년간 『경향신문』 기자로 일하다 2006년 신문사를 그만두고 전업작가로 살고 있다. 현재 연세대학교 미디어아트연구소 전문연구원이자 자녀경영연구소 소장이다. 2015년에는 한국수필가협회가 주최한 수필 신인상 공모에 당선되어 수필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작가이자 칼럼니스트로 삼성경제연구소 SERI CEO에서 ‘명문가의 위대한 유산’을 주제로 강의를 하며 우리 사회의 리더들에게서 큰 호응을 얻었다. 2011년 독특하고 열정적인 글쓰기로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가 선정한 ‘한국의 저자 300인’에 선정되었다. 

저서로는 우리나라와 세계 명문가의 자녀교육과 독서교육 비법을 명쾌하게 분석해 베스트셀러가 된 『5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 『5백년 명문가의 독서교육』, 『5백년 명문가, 지속경영의 비밀』, 『세계 명문가의 자녀교육』, 『세계 명문가의 독서교육』, 『세계 명문가의 공부 습관』, 『현대 명문가의 자녀교육』, 『세계 명문학교 1% 인재들의 공부법』, 『세상을 뒤흔든 위인들의 좋은 습관』 등이 있다. 

 

그 외 『나에게 돌아오는 시간』, 『서울대 권장도서로 인문고전 100선 읽기』, 『지금 실천하는 인문학』, 『최효찬의 아들을 위한 성장 여행』, 『마흔, 인문학을 만나라』, 『잠자기 전 30분 독서』, 『한국의 메모 달인들』, 『하이퍼리얼 쇼크』, 『장 보드리야르』, 『일상의 공간과 미디어』, 『테러리즘과 미디어』 등이 있다. 


김장권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고려대학교 건축학과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그 후 건축과 관계되지 않는 사업은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본격적으로 한옥을 짓기 시작한 지 20년이 넘었다. 북촌HRC 대표로 한옥 리모델링, 신축 설계, 시공회사를 운영하고 있으며, 서울시 은평한옥마을 건축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금까지 200여 채의 한옥을 건축했으며, 한옥 건축가들이 사찰 위주로 짓는 데 반해 대부분 가정집을 리모델링하거나 신축해왔다. 

2008년 제1회 한국 내셔널트러스트 한옥전에 ‘현우재(玄遇齋)’가 선정되었고, 2009년 유네스코 아시아 태평양 문화유산 보존상 디자인·시공 부문(UNESCO ASIA-PACIFIC HERITAGE AWARD Designers, General Contractors)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 2011년 대한민국 한옥 공모전 준공 부문 올해의 한옥 대상에 ‘가회동 L주택’, 2012년 대한민국 한옥 공모전 건축 부문 올해의 한옥상에 ‘관훈재’, 2013년 대한민국 한옥 공모전 건축 부문 올해의 한옥상에 ‘#200’이 선정되어 3년 연속 한옥상을 수상했다. 

 

2015년 대한민국 목조건축대전 준공 부문 본상에 ‘일연재와 교월당’, 2018년 대한민국 목조건축대전 준공 부문 본상에 ‘채효당’이 선정되었다. 그 외 주요 작품으로 일우재·만경재·안헌(이상 주택), 건명원(교육기관), 알서림(화랑), e-믿음치과(현대 한옥 치과 1호), 와노和の(일식집), 샤떼뉴(레스토랑), 소담·융(이상 카페), GS홈쇼핑 복합문화센터 등을 건축했다.

도서소개

책 속으로
 

헤세에게 방랑은 그의 삶이 되었고 문학이 되었다. 그는 방랑의 정신을 문학에 투영했다. 그는 『방랑』에 소개한 「찬란한 세계」라는 시에서 “완만하게 굽어진 달빛 속의 하얀 길……나는 영원히 그곳을 나의 집으로 삼으리라”고 다짐한다. 그러고 보면 집을 떠나는 것도 인간에게는 근원적인 행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헤세는 집에서도 본질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지만, 집을 떠남으로써 경계를 허물며 더 본질적인 문학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과연 집은 무엇일까?’ 「영원한 집은 어디에 있는가?」 - p.27

 

“아버지가 경성과 같은 타관에 가서 몇 날이고 몇 달이고 돌아오지 않는 밤이면 예닐곱 살 백석은 여우난골이라는 깊은 산골의 짐승 소리와 바람 소리에 놀라 어머니가 깔아놓은 이불 속으로 자지러들곤 했다.” 시인 백석의 평전을 쓴 안도현 시인은 백석의 어린 시절 풍경을 이렇게 묘사한다. 누구나 한 번쯤 이런 경험을 해보았을 것이다. 천둥이 치고 폭풍우가 내리는 여름날 밤이나 눈보라가 매섭게 치는 겨울밤 혼자 방 안에 있다면 말이다. 우리는 아파트 주거 문화에 길들여지면서 인디언 소년처럼 따뜻한 영혼을 죄다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따뜻한 영혼을 키울 수 있었던 인디언 소년은 이 지상 어디에서 만날 수 있을까? 「영혼이 따뜻해지는 집」 - p.44

 

황상은 어린 제자였지만 스승과 은자의 삶에 이심전심으로 통했던 것이다. 황상은 스승의 염원을 담아 “구름과 안개 노을이 포근히 덮어 가려주고, 가는 대나무숲과 향기 짙은 꽃들이 푸름과 향기를 실어주는 곳”에 은자의 거처를 마련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겨 시골 소년에서 훌륭한 시인으로 성장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일속산방에 살며 부패한 사회를 고발하는 풍자의 다산 시풍을 계승하고, 『치원유고(梔園遺稿)』라는 문집을 남겼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인연이며 삶이런가. 「그리움이 완성되어 집이 되면」 - p.68

 

생텍쥐페리가 어머니와 보낸 유년 시절은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던 것 같다. 유년 시절은 부모와 자녀가 얼마나 아름다운 기억을 공유하느냐에 따라 부모와 자녀 사이의 유대감이 결정된다고 한다. 생텍쥐페리는 전쟁 중 생사를 넘나드는 상황에서도 유년 시절의 기억들을 끄집어내 마음의 평화를 얻으면서 힘겨운 나날을 버텨낼 수 있었다. 생텍쥐페리는 언제나 유년 시절을 보낸 집에 대한 그리움과 집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생텍쥐페리의 유년의 집」 - p.105

 

이 난로방이 바로 데카르트의 철학이 잉태된 곳이다. 그는 시골의 작은 난로방에서 ‘계시의 날’을 경험했다면서 앞으로 자기 혼자의 힘으로 새로운 기초 위에 학문을 세우려고 결심한다. 이날 밤 그는 세 가지 꿈을 꾸고 나서 신이 자신에게 진리의 성령을 보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철학 전체를 홀로 새롭게 하는 소명을 부여받았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것을 일생 중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여겼다. 그는 감격에 넘쳐 이탈리아 중부 지방인 로레토(Loreto)의 성모수녀원을 순례하고 서언(誓言)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즉, 난로방에서 성령 체험을 한 후 과학자가 아닌 철학자의 길을 가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데카르트의 철학을 잉태한 집」 - p.116

 

이문열은 단편소설 「다시 사라진 것들을 위하여」에서 사라진 것들로 화전, 채미, 서리, 천렵(川獵) 등을 꼽는다. 이 중에서 서리나 천렵은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 남아 있다. 특히 천렵은 아버지와 형들과 함께 횃불을 들고 밤에 물고기를 잡으러 강가에 갔기에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문열의 소설에서처럼 수천 년을 이어오던 문화는 갑자기 단절되었고 사라져갔다. “혹은 취직을 해서 혹은 결혼으로 한 번 그들이 사라져버리자 뒤를 이을 세대는 없었다.” 이 소설에서처럼 정말로 감쪽같이 사라져갔다. 아버지도 사라져갔고 집도 사라져갔고 문화도 사라져갔다. 사람들도 사라져갔다. 「기억 속의 영원한 고향집」 - p.129~130

 

유목민처럼 정주하지 못하고 여러 집을 전전하다 보니 이상한 규칙이 생겼다. 지금까지 내가 살던 집 혹은 방을 방문한 친구들은 친구의 인연으로 이어져오고 있다는 점이다. 내 고향집이나 고교 시절과 대학 시절의 자취방이나 하숙집에 온 친구들은 많은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히 만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집은 인연의 끈이 이어지는 출발지가 아닌가 싶다. 「전셋집과 하숙집에 대한 추억」 - p.162

 

설계를 하면서 수없이 많은 집을 짓고 부수는 과정을 거쳤다. 잠을 잘 때에도 평면도가 눈에 아른거렸다. 처음 당구를 배우는 사람이 잘 때도 당구공이 눈에 보인다는 말처럼 말이다. 지하와 지상 1층으로 하려다 지상 1층과 2층으로, 다시 지하 6평, 지상 1층 18평, 2층 8평 정도로 하려고 했다. 그리고 다시 지하와 2층을 확장해 지하를 두 배로 늘려 20평 정도로 하고 지상 2층도 12평 정도로 늘렸다. 결국 지하에는 커다란 시청각실과 가족실과 드레스룸까지 생겼고, 2층에는 서재에 게스트방도 갖추게 되었다. 「집을 설계하다」 - p.246

 

채효당 현판을 달고 오래전에 내가 사두었던 풍경을 달았다. 풍경은 밤에도 늘 깨어 있는 물고기가 머리를 부딪혀 종을 울리는데, 그렇게 깨어 있는 집이 되기를 염원했다. 육중한 종소리가 마음을 잔잔하게 깨어나게 해주는 것 같았다. 풍경소리가 새집을 더욱 생기 있고 행복이 가득한 집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풍경과 함께 현판을 달고 나니 우리 집이 마침내 완성된 듯한 느낌마저 든다. 이에 천지 기운이 감돌면서 호흡을 시작한 집이 된 것 같다. 집의 나쁜 기운이 있다면 풍경소리가 모두 몰아내줄 테다. 「현판식을 하다」 - p.292

 

 

집짓기가 욕망의 집짓기여서는 안 될 것 같다. 나는 다행히 설계와 시공 과정에서 이 욕망의 집짓기에서 짐을 몇 개쯤 내려놓을 수 있었다. 집짓기에서 욕망이 앞서면 집은 괴물이 된다. 달리 말하자면 집에 사는 사람이 집의 무게와 기세에 눌려 허우적거리게 된다. 너무 큰 옷을 입은 것처럼 말이다. 이제 집짓기를 끝내고 보니 집짓기에는 욕망까지 곁들여 있는 것 같다. 이 깨달음은 대부분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알게 되는데, 나는 그런 시행착오를 많이 겪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는 시공 과정에서 건축가와 건축주의 신뢰 관계가 형성되었기에 가능한 게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건축물대장을 받다」-p.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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