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에로티시즘’인가?
그동안 이상의 시를 에로티시즘의 관점에서 바라본 논의는 있었지만, 이러한 논의들은 단편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다. 저자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에로티시즘’을 전면에 내세워 이상의 시작품들을 세밀하게 분석한다. 에로티시즘은 무엇을 지칭하는가? 이 책에서 말하는 에로티시즘은 남성 화자와 여성의 몰입과 충돌의 순간들, 화자의 광기적 분열과 여성을 향한 비정상적 수용 등의 육체적.정신적 활동까지를 포함한다.
이 책에는 에로티시즘을 비롯하여 남녀의 치열한 애정 관계를 면밀히 해석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론들이 제시된다. 조르주 바따이유, 장 보드리야르, 디디에 앙지외, 마르셀 모스, 카를 로젠크란츠, 에바 일루즈 등의 논의는 이 글의 해석을 뒷받침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책의 1장은 지금까지 진행된 이상 문학의 연구를 정리하고, 다양한 이론가들의 논의를 소개하고 있다. 2장은 전근대-근대 이데올로기의 혼류 속에서 복합적이고 혼란스러운 의식의 흐름을 보여주는 화자의 내면에 주목한다. 또한 이 장에서는 ‘아내’와 ‘매춘 여성’에 대한 이상의 태도를 살피고 있다. 3장은 남성 화자와 여성의 그로테스크한 몸 이미지를 통해 남녀의 유혹과 생식의 욕망이 어떠한 방식으로 드러나는지를 다루고 있다. 4장은 남녀의 증여 문제가 애정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밝히고, 여성을 다양한 형태로 변신시키는 화자의 시선을 추적하고 있다. 5장은 에로티시즘을 매개로 한 이상의 자기 인식이 어떠하였는지에 대한 저자의 생각으로 채워져 있다.
이상은 파국의 관계로부터 극단의 절망을 건져 올린다. 찢어진 세계가 찢어진 자아를 찾아내 결합한 것처럼, 외부로부터 소진된 여성은 병들고 무능한 화자와 자석처럼 붙어 있다. 이들은 치유할 수 없는 ‘無病’을 앓는 존재들이다. 이상은 서로의 병듦을 목격하면서 위태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화자와 여성을 끈질기게 형상화한다. 이 세계에 태어나면서부터 앓게 되는 존재의 절망과 고독은 근원적이기 때문에 치유가 불가능하며 따라서 존재는 언제나 위독할 수밖에 없다. <이상 시의 비극적 에로티시즘>은 이상의 비극적 자기 인식을 통해 근원적으로 ‘위독’한 존재의 절망과 고독을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