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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문집 4

녹문집 4

  • 임성주
  • |
  • 한국고전번역원
  • |
  • 2018-12-20 출간
  • |
  • 440페이지
  • |
  • 152 X 225 mm
  • |
  • ISBN 9788928405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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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녹문(鹿門) 임성주(1711~1788)의 바탕은 가족

녹문 임성주(任聖周)는 함흥 판관을 지낸 노은(老隱) 임적(任適)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 임명주(任命周), 동생 청천(靑川) 임경주(任敬周), 운호(雲湖) 임정주(任靖周), 여동생 윤지당(允摯堂)은 모두 이름난 성리학자이다. 특히나 윤지당은 여성 성리학자로, 가정에서 여성으로서의 본분을 다하면서도 심성을 수양하고 성리학의 이치를 터득하여 조선시대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문 삶을 지향하였다. 이들 가족은 모두 학문에 열정적이었고, 경사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며 서로 발전해 나갔다. 이러한 과정과 내용들은 모두 각자의 문집에 잘 담겨 있다. 녹문은 성리학사에서 서경덕, 이황, 이이, 기정진, 이진상과 함께 ‘조선 성리학 6대가’로 불리지만, 난해한 문집이 번역되지 않아 연구자들의 접근이 어려웠는데 이번 번역서 출간을 계기로 그에 대한 연구가 심도 있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임정주는 청산 현감(靑山縣監)으로 재직하던 1794년에서 1796년 사이에 부친의 《노은집(老隱集)》, 임경주의 《청천자고(靑川子稿)》, 임성주의 《녹문집》, 여류문인인 누이의 《윤지당유고(允摯堂遺稿)》를 간행하여 가족들의 유문을 정리하였다. 임정주의 문집 또한 그의 사후에 《운호집(雲湖集)》으로 간행되었는데, 한 집안에서 이렇듯 많은 문집이 간행된 사실은 놀랍고 대단한 일이라 하겠다.
녹문은 1727년 17세 때 도암(陶庵) 이재(李縡)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였는데, 과거(科擧)보다는 위기(爲己)의 학문을 닦는 것을 목표로 하였고, 평생 도암을 스승이자 정신적 지주로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주위의 청을 뿌리칠 수 없어 22세인 1733년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하여 〈귀신(鬼神)에 대한 대책문〉으로 합격하였다.
녹문의 관직 활동은 크게 세자(世子)의 시강(侍講)과 지방 관리, 두 가지로 구분된다. 사도세자(思悼世子) 및 정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세자 시절의 교육을 맡았는데, 처음 1750년에 사도세자의 익위사 세마가 되었다. 그 뒤 1762년에 사도세자가 죽고 세손(世孫)이 세자로 책봉됨에 따라 녹문은 다시 동궁을 보위하는 직책을 제수받았다. 당시 대부분의 대신들이 번갈아 가며 녹문의 경학(經學)과 예학(禮學)과 학행(學行)이 뛰어난 것으로 천거하자, 영조가 세손을 교육하도록 한 것이었다.
그리고 녹문은 대부분 지방관으로 벼슬 생활을 하였는데, 1754년 가을에 임실 현감(任實縣監)으로 부임하여 정사를 돌보면서 보민청(補民廳)을 설치하여 난민(難民) 구호에 힘쓰고, 군자당(君子堂)을 설치하여 학문을 장려하고 풍속을 교화함으로써 학풍을 진작시켰다. 1756년에 둘째 형이 죽고 다음해에 셋째 형이 잇따라 죽자 녹문은 1758년에 공주의 녹문동으로 돌아와 학문에만 힘썼다.
이후 여러 벼슬을 지내고, 1774년(영조50) 녹문동으로 돌아와 성학(聖學)에 몰두하다가 1782년 봄에 온 집안이, 여동생 임윤지당(任允摯堂)이 있는 원주(原州)의 산호(山湖)로 이사해 지냈다. 그리고 5년 뒤 다시 녹문동으로 돌아와 1788년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후기를 살며 사유하고 탐구한 녹문의 사상과 철학은 문집인 《녹문집》에 실려 전하는데, 이를 통해 조선후기 성리학사에서 그의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다.
■ 장기간 진행된 호락논쟁을 정리하다
녹문이 살았던 시기의 정치?사회적 주요 특징을 정리하면, 예론(禮論)을 중심으로 한 당쟁의 격화, 호락논쟁의 전개, 실학의 형성이다. 이러한 시대 상황은 녹문의 생애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호락논쟁은 그의 철학적 문제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호락논쟁이란 무엇인가? 처음 이 논쟁은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에서 발생하였다. 한원진(韓元震)은 인물성(人物性)의 이(異)를 주장하고, 이간(李柬)은 인물성(人物性)의 동(同)을 주장하였다. 권상하는 한원진의 이론(異論)을 지지했으므로 이간은 권상하·한원진을 상대로 논변하였다.
인물성 동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개 낙하(洛下 : 지금의 서울 지방)에 살고 있었으므로 낙학(洛學) 또는 낙론(洛論)이라 불리게 되었고, 한원진의 인물성 이론에 찬동하는 사람들은 모두 호서(湖西 : 지금의 충청도 지방)에 살고 있었으므로 호학(湖學) 또는 호론(湖論)이라 칭하게 되었다.
인성과 물성이 같다고 주장하는 낙론은 대개 《중용》 경(經) 1장의 주희(朱熹) 주(註)의
“사람과 물(物)이 각각 그 부여된 바의 이(理)를 얻어서 건순오상(健順五常)의 덕(德)이 되었다.”에
근거해 인과 물이 모두 균등하게 오상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인성과 물성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호론은 대개 《맹자》 생지위성장(生之謂性章) 주의
“이(理)로써 말하면 인의예지(仁義禮智)의 품수(?受)가 어찌 물(物)이 얻은 바가 전(全)하리오?”에
근거해 사람은 오상의 온전함을 얻었지만 물(物)은 오상의 온전함을 얻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위의 두 구절뿐만이 아니고 인물성의 동이에 관해 주희는 여러 군데에서 어떤 때에는 인물성의 동을 주장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인물성의 이를 주장하였다.
이 논쟁은 기호학파(畿湖學派)에 속한 많은 학자들이 장기간에 걸쳐 깊이 있게 진행하였는데, 이러한 호락논쟁의 문제를 종합적으로 정리한 이가 임성주이다. 이 논쟁은 그 자체로도 매우 철학적이면서 사회정치적 의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현대의 학자들로부터 그다지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 독자적인 연구 끝에 인물성상이론으로 전환하다
녹문은, 성은 본래 하나이므로 기질지성(氣質之性)이 곧 본연지성(本然之性)이라고 보고 기질지성을 해명하는 데에 노력하였다. 녹문은 이(理)의 보편성만을 본성이라고 하고 현실의 구체적인 사물의 성을 기질지성이라고 하면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은 서로 분리되며, 현실의 구체적인 사물과 분리된 본연지성은 공허한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에 녹문은 ‘인물성동론’을 주장했던 초기의 관점을 버리고 독자적인 연구를 진행한 뒤 ‘인물성상이론’으로 전환한다.

■ 당쟁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다
《녹문집》에는 예론에 대한 많은 의론이 실려 있다. 자세히 보면 녹문은 철저히 경전의 고증에 근거하여 자신의 예론을 주장하였다. 녹문은 소론(少論)의 중심 인물인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의 황극탕평설(皇極蕩平說)을 비판하였고, 또한 노론의 거두인 송시열과 한원진의 예론을 비판하였다.
녹문이 활동하던 당시 조정에는 예론을 중심으로 당파 간에 매우 살벌하고 날카로운 대립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소용돌이 속에서 1779년(정조3)에 정언 이양재(李亮載)가 녹문을 탄핵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정조는 근거가 없다고 하여 받아들이지 않아 당쟁의 화를 입지 않았다. 녹문이 당쟁의 화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순수한 학문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편견에 치우치거나 정치적 술수나 목적을 위하여 문장을 견강부회하였다면 한 번쯤 화를 당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녹문집》 번역의 의의
임성주의 철학은 조선 성리학사에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녹문 철학을 부분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그쳤기 때문에 그 학문적 의미와 유학사적 가치가 제대로 평가되지 않았다. 임성주가 성리학사의 우뚝 솟은 위치에 있었음에도 이제껏 그에 대한 문집이 제대로 번역된 적이 없었다. 이 책은 최초로 임성주의 문집을 완역한다는 점에서 일반 독자나 연구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녹문집》 번역본의 출판을 계기로 임성주의 철학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 조선 성리학 연구의 저변이 확대되기를 기대해 본다.


목차


일러두기ㆍ4

녹문집 제13권
잡저雜著
경의 經義
논어 기유년 論語 己酉ㆍ11
학이 學而ㆍ11
위정 爲政ㆍ26
재증 再證ㆍ35
팔일 八佾ㆍ43
중용 을묘년 中庸 乙卯ㆍ54
서 序ㆍ54
수장 首章ㆍ57
2장 二章ㆍ77
11장 十一章ㆍ78
12장 十二章ㆍ81
13장 十三章ㆍ90
15장 十五章ㆍ91
16장 十六章ㆍ91
17장 十七章ㆍ113
18장 十八章ㆍ114
20장 二十章ㆍ115
25장 二十五章ㆍ121
27장 二十七章ㆍ122

녹문집 제14권
잡저雜著
경의 經義
의례 신유년 임술년 儀禮 辛酉壬戌ㆍ129
상복 喪服ㆍ129
주역 임술년 계해년 周易 壬戌癸亥ㆍ193

녹문집 제15권
잡저雜著
경의 經義
상서 을유년 병술년 尙書 乙酉丙戌ㆍ237
요전 堯典ㆍ237
순전 舜典ㆍ244
대우모 大禹謨ㆍ261
고요모 皐陶謨ㆍ272
익직 益稷ㆍ277
우공 禹貢ㆍ282
오자지가 五子之歌ㆍ301
윤정 胤征ㆍ303
탕서 湯誓ㆍ304
중훼지고 仲ㆍ之誥ㆍ305
탕고 湯誥ㆍ306
이훈 伊訓ㆍ309
태갑 太甲ㆍ315
함유일덕 咸有一德ㆍ318
반경 盤庚ㆍ323
열명 說命ㆍ327
서백감려 西伯戡黎ㆍ334
미자 微子ㆍ334
태서 泰誓ㆍ335
목서 牧誓ㆍ337
무성 武成ㆍ338
홍범 洪範ㆍ338
여오 旅獒ㆍ350
금등 金ㆍㆍ353
대고 大誥ㆍ354
강고 康誥ㆍ354
주고 酒誥ㆍ355
소고 召誥ㆍ357
낙고 洛誥ㆍ360
다사 多士ㆍ361

녹문집 제16권
잡저雜著
경의 經義
대학 신축년 大學 辛丑ㆍ365
경 1장 經一章ㆍ365
전 수장 傳首章ㆍ391
전 2장 傳二章ㆍ392
전 3장 傳三章ㆍ395
보망장 補亡章ㆍ401
전 6장 傳六章ㆍ407
전 7장 傳七章ㆍ421
전 8장 傳八章ㆍ427
전 9장 傳九章ㆍ428
전 10장 傳十章ㆍ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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