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 미묘한 인간의 속내를 존재의 맛으로 승화시킨 소설
이 소설은
윤재룡 작가가 두 번째로 엮은 소설집으로, 체험의 인식을 바탕으로 소설의 형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흥미롭게 전개된다. 또한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우리 역사에 대한 서술이 독자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단편 다섯 편과 중편 한 편으로 엮은 이 소설집은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치열한 몸짓의 산물이다.
「요지경 인생」은 헬스장에서 벌어지는 인간 군상의 관계와 그 관계의 모호성에서 피어나는 요지경 인생을 재미있게 그리고 있다. 아침이면 정수기 앞에 몰려들어 일회용 믹스커피를 타서 마시며 잡담을 늘어놓는 정경은, 우리 인생의 단면을 예리하게 잘라내어 보여주면서도 인간의 속내를 명쾌하게 보여준다. 「부처님 손바닥」은 살을 부대끼며 같이 살아온 부부의 관계를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끌어가는 솜씨가 부부의 맛깔스런 대화와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 읽는 즐거움을 주고 있다. 아내의 속내를 알아보기 위해 택시기사를 통해 벌이는 남편의 수작을 읽으면서, 우리네 인생이 한편으로는 아직도 살만하다는 묘한 안도감과 웃음을 머금게 하는 소설이다. 「바람이 머물다 간 자리」는 늙어가는 육체, 그 육체는 과연 무엇을 향하는지 묻고 있다. 사랑의 굴레 속에서 나이 듦과 함께 소멸해가는 육체의 본성, 그 분명한 사실성으로 인간의 육체와 본성을 들여다보는 서글픈 이야기이다. 「내 안의 너」는 양양이 고향인 두 여자의 우정과 사랑이 특유의 지방 사투리 속에서 아름답게 피어나는 작품이다. 고향을 지키고 있는 정숙은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선희를 데리고 고향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어릴 적 추억에 빠져든다. 그러다가 둘은 선희의 첫 사랑인 정수를 찾아가는데 암에 걸려 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작품 곳곳에 배어있는 토속성이 정답고도 아련하게 다가와 독자들을 고향과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만든다. 「황금색 자라 스프」는 문장 하나하나 체험적 삶이 치열하게 녹아있는 작품이다. 프랑스에서 제정한 ‘메리뜨 아그리꼴’ 상을 수상한 K호텔 조리사 이상덕의 파란만장한 삶과 음식에 관한 이야기가 인상 깊어 마치 맛있게 차린 음식상 앞에 앉아 있는 것 같은 만족감을 느끼게 한다. 행간 행간에 배어있는 이상덕의 눈물과 땀이 그가 만든 멋진 음식과 조화를 이루는 장면은 뭉클한 감동으로 독자들의 가슴을 촉촉하게 적신다. 중편 「남양군도」는 제 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부터 태평양 전쟁 때 까지 일본 지배하에 있던 남양군도에 강제 징용당한 우리 선조들의 굴곡진 삶의 현장을 다루고 있다. 정석의 아버지는 큰돈을 벌게 해준다는 일본인의 말에 속에 남양군도로 간 형님의 흔적을 찾아가는 것을 원으로 삼지만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신다. 정석은 아버지의 유훈인 큰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남양군도로 떠난다. 그곳에서 이곳저곳 흩어진 조선인들의 유적을 찾아다니면서,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죽어갔지만 역사마저 비껴간 그들의 아픈 삶을 치열하게 파고든다.
이처럼 윤재룡 작가의 소설집 『바람이 머물다 간 자리』는 다양한 레시피로 만들어지는 음식처럼 복잡 미묘한 인간의 속내를 존재의 맛으로 승화시킨 값진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