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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치사상사 세트

중국정치사상사 세트

  • 류쩌화
  • |
  • 글항아리
  • |
  • 2019-02-08 출간
  • |
  • 4052페이지
  • |
  • 153 X 224 mm
  • |
  • ISBN 9788967355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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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각 권의 주요 내용]

제1권
선진

상商대의 정치 관념: 신우왕권神佑王權

갑골문이나 기타 상나라 대의 문자를 통해 우리는 중국 문자가 상대 후기에 이미 기본적으로 성숙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시기에는 후대 정치사상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약간의 개념이 출현했다. 첫째는 ‘덕德’이다. 은나라에서 덕에 대한 관념은 경천敬天, 존조尊祖 사상의 지배를 받았다. 그래서 덕은 무엇보다 먼저 종교적 관념이었다. 당연히 여기에는 인사人事도 포함되어 있다. 은나라 대에 이미 예禮 관념이 있었다. 신에게 바치는 단 술을 일컬어 예醴라고도 하며, 더 미루어 짐작건대 신을 받드는 일을 통틀어 예禮라 일컬었다. 그 외에 ‘인민 중시重民’와 ‘대중 부양畜衆’, 편안함을 구하지 말고無傲從康 게으르지 말 것無?怠, 법도를 바로 세움正法度 등의 관념이 살펴진다.
종교는 인류의 사유가 발전해간다는 징표의 하나다. 동시에 역사의 진행 과정에서 나타나는 우매함의 징표이기도 하다. ‘신’은 사람들 마음속에서 매우 숭고한 존재이지만, 사실 사람들이 초월적인 외부 힘을 믿으면 믿을수록 사람의 본성은 기형적인 형태가 되기 쉽다. 왕권은 신의 이름을 빌려 강화되었고 신의 이름을 빌림으로써 극단적으로 잔혹해졌다. 왕권이 신격화될수록 현실로부터 멀어졌으며 더욱 거리낌이 없어져갔다. 신격화의 결과 정책적인 조정의 여지를 자주 잃었다.

서주西周의 정치사상: 경천보민敬天保民과 천하왕유天下王有

주나라 정치 제도의 중요한 특징은 분봉제分封制와 종법제宗法制의 유기적 결합으로 주 천자天子를 호위하도록 한 것이다. 이는 정치와 윤리가 결합하는 데 근거를 제공하며 현실적인 기초가 되어준다. 주는 ‘작은 나라’로 ‘큰 나라’ 상을 깨부수었다. 이는 엄청난 사건으로 역사적으로는 천리와 인심에 순응한順天應人 ‘혁명’으로 불린다. 바로 이 ‘혁명’이 중국 고대 정치사상의 비조 주공周公을 배출했다.
새로 흥기한 최고 통치자도 자신을 위해 애써 신비적 외피를 둘러썼다. 그러나 그들은 현실을 직접 대면해야 했다. 냉정한 현실이 그들로 하여금 전혀 새로운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고, 이로써 인식론적 발전이 이루어졌다. 주공의 사상은 바로 이와 같은 변화의 산물이다.
주나라 사람들의 관념 가운데 천이나 상제는 지상신이며 일체의 현상을 결정하는 최후의 힘이었다. 이 시기에는 주 천자의 권력만이 하늘로부터 주어졌다. 제후 등의 권력은 하늘의 부여, 하늘의 보우天授天佑 등과는 아무런 관계가 생길 수 없었다. 춘추春秋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천명이 아래로 옮겨진다는 관념이 생겨났고 이로써 제후들도 천명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왕권 신수와 천자의 독존은 공생 관계다. 주왕은 ‘왕’이라는 칭호 외에 ‘천자’로도 불렸다. 국왕으로서 유일하고 독존적인 칭호는 ‘천자’였다. 현존하는 자료로 보면 문왕, 무왕 때는 아직 천자라 부르지 않았다. 주공이 등극했을 때도 왕이라 칭했을 뿐이다. 천자라는 명칭은 성왕 때 비로소 나타난다. 주 천자는 은나라 왕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여일인余(予)一人, 나 한 사람’이라 칭했다. 진시황秦始皇이 ‘짐朕’을 황제만이 독점하는 자기 칭호로 삼은 것은 바로 이 ‘여일인’이 발전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여일인’은 바로 군주 전제주의를 반영하고 있다.

춘추 시대의 정치사상: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의 전환

춘추春秋(기원전 770~기원전 476) 시대는 중국 역사상 보기 드문 대변동의 시기였다. 정치 형세의 변화는 주로 주周 천자의 영향력이 거의 없어지고 제후 및 경대부卿大夫들의 세력이 판을 치며, 가신家臣들의 활약과 민民의 지위 상승으로 나타났다. 주 천자의 통치자로서의 지위가 쇠약해진 뒤 크고 작은 몇몇 정치 중심이 형성되었다. 제후국 사이의 겸병 전쟁은 사회 여러 방면에서 관계의 대변화를 몰고 왔으며, 겸병의 결과 몇몇 대구역을 통일한 제후국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춘추 시대의 사회경제적 관계 또한 신속한 변화가 일어났다. 철기 사용과 우경牛耕의 확충은 사회적 생산력과 기술 면에서 청동기 시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게 해주었다. 사회적 생산력의 새로운 발전에 수반하여 사람들의 사회관계에도 거대한 변화가 생겨났다. 이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현상으로 나타났다. 1)토지 쟁탈전이 갈수록 격렬해져 토지의 소유, 점유, 사용 관계가 날로 다양화하는 추세를 보였다. 2)착취 방식이 서주西周의 ‘농지에 근거한 노동력籍田以力’으로부터 역역力役과 조세租稅로 변화했다. 가정 단위의 개별 생산 체제가 점차 보편화되었으며, 노예제도는 축소, 약화되어갔다. 3)공상업이 신속히 발전하면서 사영私營 공상업과 관영官營 공상업이 대등한 힘으로 경쟁하게 되었다.
사회 사상과 관념 또한 정치, 경제의 변화와 상부상조하면서 큰 변화를 일으켰다. 이 시기 정치사상은 다루는 문제가 갈수록 많아지면서 다양성이 특징적으로 드러났다. 그 경향과 발전 추세는 주로 서주의 천제天帝, 천자天子 관념의 울타리를 깨뜨리고 세속적이고 실제적이며 인간을 향해 전환되는 방향으로 나타났다. 지금까지의 자료로 보면 노자老子, 공자孔子 이전에 독립적이고 이론 체계를 갖춘 정치사상가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던 것 같다. 저자는 이 3장에서는 주로 사회 사조 및 몇몇 정치가의 사상을 논했다.

백가쟁명과 정치이성의 발전

제자백가의 쟁명은 정치이성의 발전을 대대적으로 촉진했는데, 이는 주로 다음 몇 가지 방면에서 드러난다.
첫째, 제자백가의 대부분은 정치를 인식과 파악이 가능한 대상으로 간주하고 신비주의가 정치에 간여하는 것을 배제 또는 약화시켰다. 백가를 개창했던 노자와 공자는 근본적으로 신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정치에 관해 논술할 때는 기본적으로 신을 한편에 따로 떼어놓았다. 공자의 “정치란 올바름이다”라는 말은 정치를 완전히 인간 행위 속의 일로 간주한 것이다.
둘째, 정치철학의 문제를 폭넓게 토론했다. 정치철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학계의 견해는 상당히 다르다. 우리가 보기에 정치에 관한 철학적 사고나, 철학적 방식을 사용해서 정치 문제를 사유하는 것 모두 정치철학이라 부를 수 있다. 다시 말해 정치철학이란 정치에 관한 거시 체계와 일반 규율에 대한 인식으로 정치 문제를 고도로 추상화한 것이다. 정치철학은 정치 이론의 대세에 영향을 끼친다. 정치철학의 깊이는 정치이성의 깊이의 지표가 된다.
셋째, 제자백가는 정치 운영의 규율과 기제를 폭넓게 논의했다. 정치란 지극히 복잡한 주·객관적 요소가 교차하는 운동 과정이다. 한번 계산이 틀리면 전체가 혼란스러워질 가능성이 있다. 제자백가는 정치에 영향을 주는 각종 요소를 일일이 분석했다. 자연에서 사회까지, 총체에서 국부까지, 군중에서 개인까지, 일반적 관념에서 개인의 품격과 기쁨, 싫어함까지 모든 것을 깊이 있게 토의했다.
넷째, 정치 노선과 정책을 여러 가지로 탐구하고 설계했다. 맹자는 인정仁政, 왕도王道의 실행을 승리의 근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비는 또 다른 결론을 얻었다.
다섯째, 제자백가는 통치자의 자기조절 문제를 폭넓게 토론했다. 토론의 중심은 군주의 품격과 어떻게 정확히 권력을 사용하고 정책 결정을 할 것인가였다. 제자백가 가운데 일부 원견, 탁견을 가진 사람은 외부
로부터 조절을 가하는 문제, 즉 이른바 성인의 ‘혁명革命’ 문제를 논의하기도 했다.

유가 윤리 중심의 정치사상

유가의 정치사상을 저자는 공자, 맹자, 순자를 통해서 보고 있다. 공자의 정치윤리 사상은 중화 민족, 특히 한족漢族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역사상 어느 시기에는 심지어 민족의 공통적 심리이면서 주요한 사유 방법을 구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공자의 학설이 자체적으로 전파되어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게 저자의 관점이다. 대부분은 봉건 통치자들이 부단히 교육을 강화하고 주입한 결과다.
맹자의 인정설은 실제보다 이상이 더 많다. 그의 이상은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좀 진부하게 보인다. 그가 짜낸 이상은 실현 가능성은 없었지만 현실과 대립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이상은 현실 생활을 고도로 추상화한 것이었다. 맹자의 이론은 한편으로 사람들에게 현실의 기본 관계를 인정하도록 이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이 현실의 기초 위에 아득한 이상 왕국의 깃발을 걸도록 하고 있다. 맹자의 이론은 개혁정신을 결핍하고 있음에도 부드러운 자기 개량의 기운으로 충만해 있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성악론과 인성개조론은 순자 정치사상의 이론적 기초다. 외부로부터의 개조와 스스로의 수신이 개조를 행하는 두 가지 길인데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 사상적 맥락에서 순자와 공, 맹이 다른 점은 공, 맹이 자신으로부터 타인에 이름을 강조한 데 비해 순자는 성인군자에 말미암은 개조의 진행을 강조한 데 있다. 성인군자란 바로 통치자이므로 이는 곧 통치와 억압적 질서가 침해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논증한 셈이다. 순자가 비록 수없이 위민爲民, 부민富民의 좋은 말을 거듭했지만 최종 목적은 역시 모두 통치자를 위한 착상이었다.

법가의 법法, 세勢, 술術 중심의 정치사상

법가 사이에 사승관계를 이야기한 사람은 극히 적지만 사상적으로 그들에게는 공통된 특징이 있는데, 주로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그들은 법의 작용을 특별히 강조한다. 법이야말로 나라를 다스리는 데 둘도 없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간단히 말하면 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일체를 법으로 처리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의 모든 행위규범을 입법의 형식으로 명확히 규정해야 하며, 법의 핵심 내용에 대해서 상세히 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둘째, 경전耕戰(일하면서 싸우기)을 창도했다. 법가는 특히 실력을 중시한다. 실력이야말로 사회 모순을 해결하는 기본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역사의 진행 과정을 분석하여 당시를 힘의 경쟁 시대라고 주장한다. 셋째, 군주 전제와 독재의 강화다. 그들은 선진 제자 가운데서 군주 전제주의 사상을 꼭대기까지 밀고 올라간 사람들이다. 철학적으로 법가는 도가의 기본 사상을 받아들였으며, 도와 군주를 일체화하고 있다. 권세는 반드시 독단獨斷 위에서 구현된다. 이른바 독단이란 최고와 최후의 결정권을 독자적으로 장악한다는 말이다. 법가는 진정으로 군주의 절대 통치를 실현하려면 정치적으로 일체를 지배해야 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생계 또한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넷째, 법가의 사회에 관한 기본 이론은 역사 진화설과 인성호리人性好利설이다. 법가 대다수의 인물은 사회 역사는 진화의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모든 전통은 현실적 수요 앞에서 검증을 받아야 하며, 그로써 취사를 결정지어야 한다. 그들의 구호는 “옛것을 흠모하지 않고, 지금에 미련을 두지 않으며, 시대와 더불어 변화하고 풍속과 더불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구호야말로 선진 제자 가운데 제일 박력 있으며, 최고로 생기 넘치고 혁명 정신이 풍부한 것으로 그 시대의 가장 강력한 목소리였다고 말할 수 있다. 다섯째, 법가가 정치적으로 사용한 가장 기본적인 개념과 범주는 주로 법法, 세勢, 술術, 형刑, 벌罰, 상賞, 이利, 공公, 사私, 경耕, 전戰 등이다. 이 개념과 범주는 법가 사상의 지주들로서, 저자는 이를 하나씩 깊이 있게 살펴보고 있다.

도가의 자연 본위 정치사상

도가의 자아의식은 유가, 묵가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유가, 묵가는 종사宗師가 있고 깃발이 있으며 스승 계보가 있다. 심지어 묵가처럼 일정한 조직이 있는 경우도 있다. 이 방면에 도가는 결함이 있다. 도가의 자아의식은 주로 다음 세 방면에서 나타난다.
첫째, 그들도 깃발과 종사를 세우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의 깃발과 종사는 바로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였다. 신도愼到, 전병, 접자, 환연環淵 등이 “모두 황로의 도와 덕에 관한 학술을 배워 그 취지를 풀어 밝혔다”고 한다. 황로를 존중했으므로 전한前漢 초에 도가 자체를 황로의 말씀이라 부르기도 했다. 둘째, 사유 방식이나 사용 범주 및 개념이 기본적으로 일치했다. 셋째, 일정한 스승 계보師承 관계가 있다. 노자의 제자로는 『장자』의 기록에 의하면 백거柏矩, 경상초庚桑楚, 양자거陽子居가 있다. 양주楊朱, 장자 및 전병과 같은 제나라 직하학궁의 도가들도 모두 제자가 있었다. 전병의 제자는 1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사승이 있음으로써 학파의 자아의식을 강화할 수 있었다.
도가가 도가로 불리는 까닭 가운데 가장 중요한 근거는 바로 그들이 모두 ‘도’를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도’의 내용이 지극히 넓고 복잡하기 때문에 분석 과정에서 수많은 이견이 있어 하나로 절충할 수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층차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우주와 사물의 근원을 대표한다. 다음 몇 가지 층차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우주와 사물의 근원을 대표한다. 둘째, 도는 때로 사물의 총규율을 가리킨다. 셋째, 구체적인 규율을 가리킨다. 즉 자연을 나타내기도 하며 인간사를 가리킬 수도 있다. 도가의 ‘도’는 일정한 내용을 나타내는 것 외에 방법론상의 의미가 더욱 중요해 보인다. ‘도’는 사람들에게 사물의 본질이나 상호 관계, 규율 및 사람들이 이러한 관계 및 규율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분석하고 연구하도록 유도한다. 도의 관점에 따르면 어떠한 구체적 사물도 영구불변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변화한다. 어떤 사물도 고립된 존재가 아니며, 복잡한 관계망 속에 놓여 있다. 이와 같은 방법론이 사람들에게 주는 깨우침은 확실히 구체적인 논술보다 더 의미가 있다.

묵자의 겸애론과 상동의 이원정치론

묵자 정치사상의 사회적 경향성은 무엇인가? 학계의 견해는 다양하다. 혹자는 노예주 계급의 입장에 섰다고 말하고, 혹자는 노동 농민, 수공업자의 대표라고 말하며, 혹자는 민주주의자 또는 공상적 사회주의자라고 말한다. 시대와의 관계를 논할 때도 어떤 사람은 급진적이라 주장하고, 어떤 사람은 타협적이라 주장하며, 어떤 사람은 보수 심지어는 반동이라고 주장한다. 묵자의 정치적 경향성을 확정하고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 사회계층에 대한 묵자의 태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농민에 대한 왕공대인, 사군자의 통치와 착취는 필요한 것일 뿐 아니라 합리적이라고 말했다. 이는 그의 ‘분업종사分事’론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묵자는 왕공대인, 사군자는 전문적으로 통치와 착취에 종사하는 사람들이고, 농민은 생산 노동에 종사하며 전자를 공양할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전자가 후자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전자는 노동생산에 참가하지 않아야 한다. 묵자는 말한다. “의가 정치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정치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반드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정치한다.”
묵자의 기본 주장은 “위아래의 조화”(『묵자』 「절장하」)다. 농부에 대한 왕공대인 등의 압제가 너무 심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포악한 왕’이다. ‘아랫사람’들이 ‘윗사람’에게 반항해서는 안 되는데, 일단 일어나 반항했다면 통치자는 “음란 포학하고 혼란을 조장하는 도적”이 되니 죽여도 무방하다. 그래서 후기 묵가들은 “도적을 죽일 뿐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는 황당한 논의를 전개했다. 묵자의 ‘조화’론은 통치자에게 적당히 양보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으나 중요한 것은 역시 ‘윗사람’에 대한 ‘아랫사람’의 조화다. ‘위’가 주이고, ‘아래’는 종이다. “위에서는 정치를 하고, 아래에서는 [그것으로] 풍속을 삼는다.” “위에서 정치를 바꾸면 백성은 교화 내용을 바꾼다.” 그는 사회 개혁의 희망을 완전히 ‘위에서 정치를 바꾸는’ 데 기탁하고 있다. 묵자의 정치적 경향성은 주로 특권이 없던 ‘작은 집안’, 특히 사 부류의 요구를 반영했다고 말할 수 있다.

명가 정명실正名實의 정치사상

전국 시대에는 변론의 풍토가 생겨났다. 제자백가는 학설을 세워 논박하고, 술사術士들은 종횡으로 갈리고 합하고 하면서 모두 도도한 웅변을 보여주었다. 명가는 바로 그때 전문적으로 변론을 일삼음으로써 이름을 떨쳤다. 순자는 변론하는 사람들을 성인 변론가, 군자 변론가, 소인 변론가로 나누었다. 그는 명가를 소인 변론가에 편입시켰다. 명가는 늦게 일어나 대체로 전국 중기 이후에 형성되었다. 그러나 명학의 발흥은 아주 오랜 연원이 있다. 위로 등석자鄧析子의 ‘형명刑名’론, 노자의 ‘무명無名’론, 공자의 ‘정명正名’론 그리고 묵자墨子의 ‘여명予名’론까지 소급할 수 있다. 바로 그들이 명칭변론名辯 사조의 선구를 이루었다. 등석鄧析은 형명刑名을 중시하고 소송 변론에 정통했다. 혜시惠施, 공손룡公孫龍은 괴기 담론을 좋아하고 정치에 힘을 쏟았다. 명가가 보기에 물리物理와 인정人情은 서로 통하므로 ‘물질 분석’은 결국 역시 치인으로 귀결한다. 『한서』 「예문지」는 명가가 예관禮官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논육가요지論六家要旨」는 명가가 도가, 유가, 법가, 묵가, 음양가와 한가지로 방법은 달라도 목적은 모두 왕권주의라고 주장한다. 사마담과 반고는 명가 정치의 기본 경향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었다. 다만 명가의 사유 방법에 비판을 제기했을 뿐이다. 명가의 일부 사상 명제에는 모종의 부정적 정신이 함유되어 있다. 이를테면 혜시가 제기한 “하늘은 땅보다 낮으며, 산과 연못보다 평평하다”는 명제는 유가에서 규정하는 ‘하늘은 높고 땅은 낮다天尊地卑’와 첨예하게 대립한다. 이는 혜시의 ‘일체의 존엄을 없앤다去尊’는 사상을 반영하는 사유로 명가 내에서 대표성이 있다. 명가의 정치 경향은 비교적 복잡하다. 한편으로 그들은 “정치에 힘쓰는” 사람들로 기본 정치 경향은 사마담, 반고가 말한 것처럼 왕권주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이성
은 왕왕 왕권주의의 울타리를 넘어 시대를 초월하는 사상의 불꽃으로 번쩍이기도 했는데 그 과학 정신은 왕권주의가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것이 명가가 빨리 망한 근본적인 원인 가운데 하나다.

음양가의 천인배합을 특징으로 한 도식화된 정치사상

음양陰陽, 오행五行이 두 개의 철학 개념으로 자리 잡은 것은 늦게 잡아도 춘추 시대의 일이다. 발생 시기에 대해서는 학자 간 의견이 다양하다. 일찍 잡는 사람은 시기가 상商대에 이르고, 늦게 잡은 사람은 춘추를 말하니 상하 편차가 1000년에 가깝다.
맨 처음 음양은 햇볕의 향배를 가리켰다. 해를 향하면 양이고, 해를 등지면 음이다. 이것을 나중에 사상가들이 빌려 쓰면서 두 가지의 대립하고 상호 성쇠하는 물질 역량과 그에 상응하는 현상을 표시하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일체 사물이 모두 음과 양 두 측면으로 구성되었으며, 음양의 대립 투쟁으로 말미암아 사물의 운동 변화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오행이 가리키는 것은 물水, 불火, 나무木, 쇠金, 흙土이다. 고대 사상가들은 이 다섯 가지 요소를 만물을 구성하는 원소로 여겼다. 초기 사람들은 오직 이 다섯 가지를 생활에서 잠깐도 떨어져서는 안 되는 필수품으로 보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행을 단순한 원소설로 두는 데 만족하지 못하고, 갈수록 관심을 오행과 만물의 관계 및 오행 간의 관계 쪽으로 전향해 갔다. 그리하여 오행은 그 개체 대상으로부터 떨어져 갈수록 멀어지고 갈수록 추상화되었고 사물 간의 관계를 연구하는 것이 점차 오행설의 주요 특징이 되기에 이르렀다.
음양오행학파는 천인화해가 인류 생존의 기본적 보증이며 선결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일체의 정치 활동은 천인화해의 실현을 보장할 수 있을 뿐 그것을 파괴할 수는 없다. 이것은 농업 경제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다. 그들은 애써 사물 간의 관계를 탐구했으며, 종류 구분 방식을 통해 사물을 꿰어 이으려 했으며, 이를 빌려 사물 간의 연계 사슬을 파악했다. 이와 같은 탐구 중에는 탁월한 견해도 있고 헛소리도 있다. 그 시대에는 이를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들의 정치 양식화에 관한 견해가 비록 기계적인 점을 면하지는 못했지만 기본 정신만은 높이 살 만하다.

『관자管子』의 각 학파 정치사상의 융합

『관자管子』는 일찍이 선진 시대에 쓰인 책으로 당시 상당히 광범하게 유포되어 있었다. 『관자』가 한 권의 논문 모음집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다. 다만 매 편의 저술 시기가 언제냐에 대한 학자 간의 견해차가 매우 크다. 가장 이른 일부 편은 춘추 시대 관중管仲의 저작이거나 관중의 어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가장 늦은 일부 편은 왕망王莽 시대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관자』는 대단히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사상이 지극히 풍부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풍모를 광범하게 기록하고 있다. 법가 학파의 저작은 『관자』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나 각 편의 풍격, 기질이 모두 일치한 것은 아니다. 다수의 편이 비교적 평화롭게 문제를 논술하고 있으며, 이론적으로 도가, 유가와 정도만 다르게 서로 융합하고 있다. 도가의 저작은 『관자』 내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저작들은 도가의 극단적 자연주의 경향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통치를 주장하며 도와 법, 예, 의를 유기적으로 하나로 결합시킨다.
『관자』 경중편은 ‘경중’이라는 개념을 광범하게 사용하고 있다. 이 개념은 각기 다른 편의 여러 곳에서 각기 다른 함의를 지닌다. 그것들을 귀납해보면 주로 다음 세 방면의 의의를 지닌다. 첫째, 경중은 사물을 관찰하는 일종의 방법을 가리킨다. 하나의 방법이므로 여러 가지 영역에 이용할 수 있다. 저자들은 경제, 정치, 군사, 문화, 도덕, 역사 등 각 방면의 문제를 광범하게 토론한다. 둘째, 경중은 또 제도나 법령 규정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셋째, ‘경중’이란 말은 위 두 가지 함의를 갖는 것 외에 주로 시장, 상품 유통, 화폐, 재정, 물가 방면의 이론 및 관련된 정책과 조치를 가리킨다. 경중 여러 편의 특징은 바로 여기에 있다. 전국 시대에는 상업이 급속히 발전하여 상업적 이윤이 다른 업종의 이윤보다 월등히 높았다. 경중가들은 봉건국가의 입장에서 당시의 주요 상업 활동을 독점하라고 주장한다. 경중가들이 추진한 상업 교역은 생산의 발전과 상품 교환의 번영을 촉진하지 못한다. 그들은 권력을 이용해 가치 규율을 훼손함으로써 무용지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경중가들은 경제 관계를 특별히 중시한 듯하다. 그러나 사실을 따져보면 그들은 정치 폭력의 작용을 더욱 중시했다. 그들의 이 이론은 봉건전제주의를 경제생활 과정에 관철시킨 것으로 봉건전제주의 발전을 대대적으로 촉진했다.
인식론적으로 볼 때 경중가들은 일군의 천재적 인물들이다. 그들의 경제생활에 대한 고찰과 인식은 당시로서는 가장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입각점과 역사 발전은 서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여씨춘추呂氏春秋』의 모든 것을 수용한 정치사상

『관자』와 『여씨춘추』는 제자백가가 종합하는 추세를 대표하는 두 가지 상이한 작동 방식이다. 『관자』는 저자들이 자유롭게 쟁명하면서 자주적으로 내용과 논리에서 종합을 진행한 작품이고, 『여씨춘추』는 정치가가 행정의 방식을 이용하여 외재적인 종합을 진행한 작품이다.
『여씨춘추』를 볼 때 여불위는 전략을 구비한 정치가다. 그는 제자백가의 문파적 견해에 갇혀 있지 않고 그들 위에 높이 앉아 정치적 수요에서 출발하여 쓸 만한 것을 골라 이용했다. 하나의 학설을 주창하거나 사상가가 되면 보통 자신이 믿는 이론과 논리에 제한되어 특정 견해에 갇히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는 사상가의 결점이기도 하지만 이따금 특징이나 장점이 되기도 한다. 수많은 상황에서 이와 같지 않으면 한 사상이 철저히 해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정치가가 되면 기계적으로 사상가들이 설계한 데에 따라서 일을 처리해서는 안 되며 반드시 선택이 요구된다. 선진 제자들 상호 간에 논쟁이 치열하여 물과 불처럼 서로를 용납하지 못했으나, 사실 그것은 자신의 사상을 세속 군주와 관련짓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군주를 위해 계책을 바친 것이었다. 여불위는 이 점을 분명하게 간파하고 있었기에 문파 간 견해를 넘어서 많은 논의를 폭넓게 채택했던 것이다. 진秦, 한漢 이후 봉건 통치자들은 명분상 비록 유가를 존숭했으나 실제로 간 것은 여불위의 길이었다. 여불위의 결함은 선명한 기치가 없이 잡박하여 주체가 없다는 데 있다.
진나라의 현실적 상황으로 볼 때 여불위는 『여씨춘추』의 편집과 공포를 통하여 진나라가 유지해온 존법尊法 사상 노선을 바꾸고자 했다. 이 의도는 대단히 일리가 있으며 진나라의 통일에 유리한 것이었다고 말해야 마땅하다. 특히 진나라 통일 후 건국방략으로써 더욱 중요한 것이었다. 진시황은 비록 영웅적 지략을 갖춘 자이기는 하지만, 법가 이론에 갇혀 여불위처럼 모든 것을 수용하는 도량이 부족했다. 그 결과 일을 극단으로 몰고 가버렸다. 그가 만일 『여씨춘추』의 일부 견해를 수용했다면 진나라는 어쩌면 그렇게 단명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제자백가의 정치 문화 총론

하夏, 상商, 서주西周 왕조는 기본적으로 신의 세계다. 춘추에서 시작하여 신의 지위는 차츰 하락하고 인간의 지위가 점차 상승한다. 노자와 공자는 인문 사상 발전 과정에서의 두 거두다. 이들은 중국 역사상 사유방식이 전환하게 된 징표다. 두 사람은 종전의 산발적 인문 사상을 이론으로 상승시켰다. 노자는 사람을 자연으로 되돌렸으며, 공자는 사람을 사회로 되돌렸다. 이로써 중국 역사상 인문 사상의 기초가 다져졌다. 전국 시대 제자백가의 발전을 거쳐 인문 사상은 중국 전통문화의 주류가 되었으며 정치사상의 기초를 이루었다. 중국 전통적 인문 사상은 주로 다음 몇 가지 방면으로 요약된다.
첫째, 인간과 신의 관계에서 인간이 먼저이고 신은 나중이라고 주창한다. 중국 고대 사상사에서 소수를 제외한 사상가의 절대다수 모두 신을 묘당에서 내쫓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은 사람이 더욱 중요하며 사람의 필요와 정신에 따라 신을 개조하기도 한다. 민정으로 천명을 알고, 인간이 먼저이고 신은 나중이며,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고, 신의 도에 따라 가르침을 설정하는 등의 여러 사상은 인문 사상의 신 관념에 대한 개조와 수정인 동시에 정치사상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둘째,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상호 간 화해를 주장하고, 자연은 인류의 행복을 위해 쓰여야 한다고 주창한다. 사람은 어디서 왔는가? 서주 이전에는 신의 산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가, 음양가, 『역경』의 출현은 이와 같은 인식을 바꾸었다. 그들은 여러 각도에서 하나의 공통된 견해를 빚어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은 자연의 산물이며 인간은 자연적 존재라는 것이었다. 『장자』 「지북유知北游」 편은 “사람의 생명은 기가 모인 것이다. 모이면 생명이 되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말한다. 사람이 자연적 존재임은 인문 사상의 이론적 기초다.
셋째, 인간의 사회생활 속에서 인성을 강조하고 그 인성을 기초로 사회적 인간관계의 원칙을 연역 판단한다. 전통 사상은 인성 문제를 깊이 있게 탐구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의 사회성과 자연성의 관계 문제, 즉 생리적 본능, 물질적 수요와 사회관계 및 사회적 이데올로기와의 관계 문제다. 인성 문제는 정치사상의 중요한 이론적 근거다.
넷째, 사람들이 자아를 추구하는 과정은 주로 성인이 되기 위한 과정이지 신이 되기 위한 과정이 아니다. 즉 자아수양과 완성을 통하여 성인聖人, 현인, 인인仁人, 대장부, 성인成人, 군자가 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은 도덕적 모범이다. 성인이 되는 것은 최대한도의 자아실현을 힘써 추구하고, 자신의 주관적 능동성과 집념을 충분히 발휘하는 추구 과정에서 사회의 모든 아름다움을 일신에 집중시켜 하나의 초인으로 상승하는 것을 말한다.
다섯째, 자연과 사회, 인간 자신을 인식의 대상과 실천의 대상으로 삼는다. 현실 생활을 인식과 실천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인문 사상을 위한 광활한 길이 개척된 것이다.
그렇다면 전통 인문 사상의 사유 방식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자주 이야기하는 천인합일 사상이다. 즉 자연, 사회, 인간을 하나의 화해적 통일체로 보는 것이다. 이 통일은 자연의 인간화, 사회화 및 인간과 사회의 자연화를 통해 도달한다. 이를 자연의 인간화 및 인간의 자연화라고 간단히 부를 수 있다. 자연의 인간화와 인간의 자연화 관념 가운데는 일부 합리적, 심지어는 과학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천, 지, 인의 대일통 가운데서 군주는 위아래를 연결시키고 만물을 원만히 소통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상술한 인문 사상은 근대 인문 사상과는 원칙적으로 구분이 되는데, 그것이 안내한 것은 군주 전제이지 민주가 아니었다.

제2권
진한위진남북조

진시황秦始皇의 제왕전제 사상

진시황은 바람 부는 대로 풀대가 쓰러지듯 무력으로 산동의 여섯 나라를 소멸시켰으며, 남으로 백월百越을 평정하고 북으로 흉노匈奴를 억눌러 공전의 통일 봉건 제국을 건립했다. 그런데 아스라이 높고 광대하여 사람들의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었던 진秦 제국은 불과 15년을 생존했을 뿐 민중 반항의 불꽃 아래 사라져버렸다. 진 왕조의 대대적 흥기와 대대적 몰락은 후인들에게 끝없는 사유의 과제를 남겼다. 진시황은 법가 사상의 지도 아래 승리를 얻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진의 멸망 또한 법가에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 아닌가? 후대 유가들은 대부분 이 견해를 고수하는데 사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진시황은 처음 사상 문화적으로 법가를 위주로 하되 다른 학파의 사상학설을 두루 병용하는 방법을 채택했다. 따라서 음양가, 유가, 도가, 종교 신학 모두 일정한 지위를 갖고 있었다. 진시황도 처음에는 유가를 배척하지 않았다. 박사관은 주로 유생들로 충당했다. 유생박사들은 의정議政에 참여했다. 여러 사상의 병존은 진 제국의 통치를 유지하는 데 유리했을 것이다.
그런데 동시에 진시황의 극단적인 전제권력 욕망과 모순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분서焚書는 사상의 자유에 타격을 주기 위함이다. 당시 각종 유파, 특히 유가는 진시황의 정치 행위에 사사건건 쉬지 않고 흠집을 들춰내고 있었다. 진시황이 태워버린 것은 단순히 책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축적되어온 지식이었으며, 사람들의 사유의 자유였다. 분서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으므로 이듬해에 이를 핑계로 갱유坑儒를 단행했다.
진 왕조는 이론적 사유를 질식시켜버린 시대다. 이론적 사유에 대한 멸시는 곧 야만의 횡행에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진 왕조 전체 관료 체계의 야만화는 왕조 멸망의 원인 가운데 하나다. 진 왕조의 빠른 멸망은 법가가 초래한 악명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군주 전제 제도에 대한 법가의 설계와 이론이 진 왕조의 멸망과 더불어 포기되지는 않았다. 한漢나라는 진나라 제도의 실질을 계승했다. 이는 법가의 정치 이론이 실질적으로 여전히 효과가 있었음을 설명해준다.

한 초 사상가들의 한 제국 정치에 대한 설계

한초 정치사상은 대체로 한편으론 통치자들이 황로黃老 사상을 분명하게 제창하면서 유가의 가르침으로 보조를 삼고 암암리에 법가를 응용하는 짜임새였다. 다른 한편으론 도가, 유가, 법가가 서로의 잘못을 들춰내어 공격하고 투쟁했다.
육가陸賈는 12편의 상주문을 묶은 『신어新語』를 지어 유방 및 한초의 통치자들에게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반고班固는 육가의 『신어』, 소하蕭何의 ‘율령律令’, 한신韓信의 ‘군법軍法’, 장창張蒼의 ‘장정章程’, 숙손통叔孫通의 ‘예의禮儀’를 한나라 천하를 결정지은 5대 지주로 열거했다. 이중 넷은 주로 제도적 결정을 논한 것이고 『신어』만 정치사상을 논하고 있다. 사상의 영역에서 『신어』가 한대에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이로써 알 수 있다. 육가는 인류 역사와 물질문화가 모순 속에서 진보하며, 형벌과 예의도 모순 가운데 생겨나고 시대가 달라짐에 따라 새로운 발견과 발명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육가는 옛날을 중시하고 현재를 경시하는 관점을 비판했다. 이런 관점은 “보이는 바에 담담하고 들은 바에 달가워하며, 겉모습에 현혹되어 중정中情을 잃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정치 관념으로 볼 때 육가에게는 인의와 무위가 기본적으로 서로 중첩되어 있다. 육가의 무위론은 확실히 도가적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나 그가 묘사하는 사회적 관계와 사회 관념은 도가와 또 상당히 거리가 멀다. 대체로 존귀한 자를 존중하고 가까운 사람과 친하며, 신하는 충성하고 자식은 효도하며, 상하에 차례가 있으며, 늙은이는 편안하고 어린애는 보살펴지며, 예의를 준수하는 등 유가가 설계한 기묘한 경지로 볼 수 있겠다. 그의 무위는 또 다른 형식의 유위다. 육가는 유학, 특히 순자의 학을 제창했다. 그리고 도가와 법가를 종합하여 두루 취했으며 역사를 통찰하여 현실에 맞대면했다. 깊이가 있으면서도 공허하지 않았다. 저자는 “자신은 계속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활동했지만, 논의는 오히려 대범하고 개방적이었다. 개성이 있으면서 권세에 아부하는 말이 적으니 참으로 대단하다”면서 육가를 높이 평가한다.

한漢제국의 정치 대일통과 독존유술獨尊儒術

한漢 제국은 몇십 년의 발전을 거쳐 중앙 집권적 군주 전제 정치 체제를 날로 공고히 했다. 그런데 정치에 대한 인식 수준에선 오히려 이런 체제에 맞지 않는, 예컨대 도가의 황로黃老 무위 사상 등과 같은 현상이 존재하고 있었다. 군주 전제하의 통치자에게 있어 정치적 실천은 그에 상응하는 이론 지침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맹목적’이고 ‘혼란스러운’ 상태에 빠지게 되므로 제국의 정치 체제에 맞는 이상적 정치 양식을 찾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한대 유학자들이 제창한 ‘대일통大一統’ 사상은 그렇게 제왕들의 마음에 와닿았으며, 동중서董仲舒의 건의와 한漢 무제武帝의 인가를 거쳐 유학은 마침내 일존一尊으로 정해졌다. 이는 한대 정치사상 발전 과정상 일대 사건인 동시에 중국 고대 정치사상과 문화 발전의 이정표가 되었다. 이로써 유가 사상은 차츰 상승하여 중국 전통 사상 문화의 주체가 되었으며, 그 영향력과 의의는 지극히 심원한 것이었다. 한대 정치사상의 발전으로만 본다면 존유尊儒는 한 초엽 이래 유가들의 신흥 제국에 대한 정치설계가 궤도에 들어섰음을 뜻한다. 그 후 일부 쟁론과 반박이 있었으며 ‘한 왕실 제도’의 정수가 순수한 유학이 아니라 ‘패도覇道와 왕도王道가 뒤섞인 것’이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유학이 제국의 정치적 지도 사상이 되었다. 그리고 한漢 원제元帝의 대대적인 홍보를 통해 마침내 유학은 정치사상 영역에서 주도적 지위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이 책은 『공양전』을 자세히 분석함으로써 이 시기의 정치사상을 다룬다. 정치사상의 각도에서 볼 때 『공양전』의 이론 구조는 명료하다. 왕권 ‘대일통’이야말로 그 가운데를 관통하는 이론의 기본선이다. 등급 원칙, 군신 관계, 군통 승계 및 화이 구별은 이 기본선이 각기 다른 측면을 향해 깊어지고 발전한 것인데, 이론상으로 국가형식, 통치 계급의 권력 점유와 분배 및 민족 관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등 문제를 해결하여 주었다. 전문 저자의 기본 사유는 시종 단일 권력이 주재하는 일통천하를 어떻게 건립하고 공고히 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있다. 이에 근거하면 왜 『공양전』의 운명이 그 자매편인 『곡량전』과 『좌전』보다 우월할 수 있었는지, 전한에서 후대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정치적 지위를 차지했는지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다.
한 무제가 유학을 숭상하고 오경박사를 둔 이래 『공양전』은 가장 먼저 정치적 신분을 취득한 유가 경전 가운데 하나다. 다른 학파도 외롭지는 않아서 효제孝帝, 선제宣帝 시대에는 ‘곡량의 『춘추』’를 세웠고, 평제平帝 때에는 “다시 좌씨의 『춘추』를 세웠으나,” 정치적 영향과 실제 정치 지위로 볼 때 『곡량전』과 『좌전』이 『공양전』과 필적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그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바로 『공양전』의 ‘대일통’ 정치사상 체계에 있다.
한대 공양학파의 진일보한 탐구와 일정한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대일통’ 사상은 점차 사람들의 마음 깊숙이 자리 잡아갔다. 기나긴 중국 고대사회에서 『공양전』의 기본 이론은 각양각색의 학설 또는 사조와 서로 융합하면서 시종 군권의 일통천하를 옹호하는 데 사상적으로 주도적인 작용을 했다.

유가 정치 관념의 경전화와 사회의식화

한 무제의 유가 학술만을 존중하고獨尊儒術 시험을 치러 선비를 선발開科取士하는 제도는 사인士人 대다수가 유가 서적을 읽고 벼슬길에 나아가도록 이끈 동시에 유가 학술을 정치의 한 구성 요소로 바꾸어놓았다. 이는 매우 분명한 두 가지 잘못된 결과를 가져왔다. 하나는 청淸나라 사람 방포方苞의 말대로 “유가의 앞길은 확 트였지만 그 도는 망했다”1는 것이다. 방포의 말은 지나친 절대화이긴 하지만 대체로 수긍이 간다. 대다수 유생이 유학을 ‘도’로 추구하지 않고 벼슬길에 나아가는 문고리로 여기게 되었고, 유가 학술은 독존적 지위에 놓인 동시에 금고禁錮를 당해 학술 문화적 독립성과 초월성을 잃게 되었다. 둘째, 유술이 사회와 인간을 규제하는 이론적 원칙이 되었다. 이 원칙은 지고, 지성至聖한 것으로 사회 모든 분야 위에 드높이 걸렸다. 사회 역사의 자연스러운 발전은 일거에 유가 경전과 원칙의 부산물로 바뀌었다. 그리하여 이론이 실천보다 높고, 원칙이 생활보다 높은 유가 교조주의가 전 사회에 가득 차게 되었다. 유학적 사유 방식의 형성이야말로 중화 민족의 최대 재난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경전을 존중하여 경전을 읽고, 성인을 대신하여 주장을 세워 수많은 사람을 ‘경經’으로 먹고사는 벌레로 만들었다. 그러나 어떻게 ‘먹을’ 것인가에 대해 다양한 논의가 생기는 것 또한 면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경학내에 다양화, 다원화 운동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는 처음 독존유술을 실행한 자들이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사상 다원화 규율의 변형된 표현이라고 해야겠다.

군권君權 합법성 이론과 군권 조절론

한漢대 정치사상의 기본 특징 가운데 하나는 정치 이론의 실제 정치적 가치와 효력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 제국에 유리하기만 하면 어떤 학설이든 통치자의 주목을 받았는데, 이론이 정치를 위해 봉사했으며 사상가들은 제왕을 위한 난제를 해결하려 한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한대 제왕은 중요한 한 가지 문제에 직면했는데, 이론적으로 군권의 지상성과 신성성을 강화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실행 가능한 정치 조절 능력을 군권에 부여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한대 정치사상 영역에서는 두 가지 이론 사조가 함께 짜이는 현상이 나타났다. 한편으로 사상가와 정치가들은 천天, 성聖, 도道 등 정신적 권위를 이용하여 군권의 합법성을 위해 논증했다. 천, 성, 도 등 여러 신성한 명예를 왕관 위에 덧씌웠으며 군권을 인식론적으로 다양한 권위의 집합체로 만들어 전체 사회의 군권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높이려 했다. 다른 한편으로 사람들은 또한 천, 성, 도의 권위를 이용해 군권을 제약하려 들었는데, 일반 정치 원
칙과 이론상의 허구적 권위를 운용해 군주가 정치적으로 정상적인 행위를 하도록 보장하고자 했다. 이 이론 현상의 표층을 보면 천, 성, 도, 왕이 통일되기도 하고 서로 어긋나기도 했으나, 심층 의미에서 보면 정반 두 방면에서 군주 정치의 여러 가지 가능성을 논증해주었으며, 군권의 절대성을 강화하고 한 왕실 천하의 영원한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심후하고도 굳건한 이론 기초를 만들어주었다.

전한 후기 정치 조정 사조와 왕망王莽의 복고개제復古改制 사상

전한 제국은 100여 년간 발전하다가 원제元帝, 성제成帝, 애제哀帝, 평제平帝 대에 이르러 급속히 쇠락의 길을 걷는다. 첨예한 빈부 대립과 통치 집단 내부의 권력 분쟁이 얽히면서 식자층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한漢 왕실을 구원해 지켜내야 한다는 입장으로 모순에 가득 찬 사회와 정치 현상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으며, 통치자 내부 및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의 일련의 정치적 조정이 필요함을 제기함으로써 막다른 길목에 들어선 제국의 구원을 구상했다. 융성했던 제국이 몰락해감에 따라 통치자들의 권력의식은 ‘영명永命’의 추구로부터 ‘갱명更命’에 희망을 거는 쪽의 발전 과정을 거친다. 갱명 사조는 비폭력적인 권력의 경질을 인정하여, 헤어날 길이 없음에도 창칼을 움직이고 싶어하지 않은 전한 통치자들에게 한 가닥 살길을 열어주었다. 이러한 사조를 등에 업고 왕망王莽은 기회를 틈타 한 왕실을 대신한 신新 왕조를 세웠다. 왕망은 여론 조작과 권력 획득 음모에 대단히 능했으나 제도 개혁을 통한 치국 방면엔 몹시도 평범했다. 서주西周의 정치 양식을 재현하겠다는 믿음이야말로 개중 나은 정치적 선택이었다. 일방적 소망이었던 이 복고적 이상주의는 신 왕실의 단명을 예정한 것이었다.

후한 전기 참위화讖緯化한 경학 정치관과 회의론

경학의 참위화는 후한 전기 정치사상의 주류였다.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가 “천하에 도참圖讖을 선포함”으로부터 신비주의적 참위경설讖緯經說은 정식으로 관방의 인정을 받아 갈수록 광범하게 유행했다. 참위학은 전한前漢이래의 음양오행, 천인감응, 천인합일 사유 방법이 극단적으로 표현된 형식이다. 그 핵심은 왕권 신격화에 있었다. 신, 자연, 인간의 일체화를 통해 논리는 황당하나 주장은 분명한 정치 신화를 엮어냈다. 이런 상황 아래 참위학과 금고문今古文경학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고, 황제의 어전에서 결정이 남으로써 참위가 나중에 윗자리를 차지하게 되더니 거의 경학 정통의 위치를 점했다. 황당무계한 날조된 정치 신화가 정치권력의 인정을 거쳐 진리로 바뀐 것이다. 천지신명과 성인귀신에 대한 사람들의 숭배와 미신이 온 세상을 뒤덮고 후한 사회 전체를 풍미하던 바로 그 무렵 왕충王充이 당당히 걸어 나와 심대한 일격을 가했다. 그는 후한 말의 정치적 성찰과 위진魏晉 현학玄學의 발흥을 위한 회의론과 비판론의 선구가 되었다.
중국 고대 정치사상사에서 『논형』의 지위와 작용은 주로 두 가지 방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이단적 사조에 대한 영향이고, 둘째는 통치사상에 대한 영향이다. 『논형』은 경직되고 폐쇄적이고 썩어빠진 경학에 강력한 충격을 주었으며, 천인감응, 참위부서 및 각종 미신 숭배에 대한 폭로와 비판을 행했다. 그리하여 가라앉아 있던 사상계에 신선하고 강한 바람을 불어넣어줌으로써 경학을 떠나도록 분위기를 이끌었다. 왕충이 후한의 관방철학을 비판했고, 이성을 가지고 신학을 청소하려고 시도했지만 역시 통치 사상의 기본 방향을 건드린 적은 없다. 역사 발전의 시각에서 볼 때 천도자연론은 천인감응론을 약화시켰는데, 이것이 바로 양한 경학으로부터 송명 리학으로 통치 사상의 이론 형태가 발전해간 기본적인 추세였다. 왕충은 바로 이러한 이론 형태 조정의 선구자였다. 한 명의 사상가로서 왕충은 감히 공개적으로 황제가 정한 사상에 도전했으며, 신성불가침한 봉건 시대의 각종 권위를 감히 비난했다. 그 자체로 왕충은 대단히 중요한 인식론적 가치가 있으며 정치적 의의가 있다.

후한 후기의 명교名敎와 정치 반성 사조

후한의 통치자들은 전한의 효치孝治 전통을 계승하여 강상명교綱常名敎를 극력 제창, 선양했다. 공자를 존중하고 ‘효제염정孝悌廉正’을 장려하는 방향으로 정치를 이끌어감으로써 유가의 전통적 예법 제도와 윤상도덕에 전체 사회가 찬동하도록 조종했다. 이를 기화로 후한 왕조의 정치 질서를 공고히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명교를 중시한 결과, 선비들이 미명이나 최고의 명예를 얻기 위하여 “부화교회浮華交會” 즉 겉치레를 하고 화려하게 수식하며 당을 지어 교제하는 행위를 하고, 서로를 표방함으로써 이름과 실질이 자주 어긋나 후한 후기 명교의 위기를 초래했다. 이 위기는 환관, 외척, 사대부 등 이익 집단 사이에 복잡하게 얽힌 권력 투쟁과 맞물려 갈수록 심화되었다. 이를 걱정하며 사대부 집단은 서로를 “품평하고, 공경대신들을 논평하고, 정치를 재단했으며,” ‘청의淸議’라는 여론으로 정치에 간여하면서 자신들의 정치적 요구와 희망 사항을 전달했다. 그리고 왕부王符, 중장통仲長通을 비롯한 지식인들은 시대적 폐단에 깊이 있는 반성과 비판을 가했다. 그들은 조정의 기강을 다시 바로잡고자 여러 설계를 했지만 결국 뒤집힐 후한의 운명은 막아볼 방법은 없었다.

초기 도교와 『태평경太平經』의 정치사상

도교는 중국 땅에서 생기고 자란 종교다. 도교는 유교, 불교와 더불어 전통문화 체계 내에 삼각 정립의 형세를 이루며 봉건 통치자들의 중요한 통치 도구가 되었고 사회에 대단히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도교는 후한 후기에 만들어져 오랜 세월 동안 민간에서 유행하다가 차츰 교파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초기 도교엔 양대 교파가 있었다. 하나는 동부 지역에서 장각張角에 의해 창립된 태평도太平道이고, 다른 하나는 파촉巴蜀 지역에서 장릉張陵에 의해 창립된 오두미도五斗米道다. 양대 교파에는 모두 자신들이 받드는 경전이 따로 있었다. 태평도는 『태평경』을 경전으로 삼았고, 오두미도는 『노자』를 경전으로 삼았으며 『노자』를 해설하고 주석하는 과정에서 『노자상이주老子想爾注』라는 책이 만들어져 오두미도의 비전이 되었다. 이 시기엔 또 양기養氣, 연단煉丹을 내용으로 하는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가 출현하기도 했다. 『태평경』 『노자상이주』 『주역참동계』는 초기 도교 경전의 대표작들이다. 초기 도교의 기본 이론과 내용은 매우 잡박하다. 선진 이래의 각종 사상적 성분을 뒤섞어 비교적 조잡한 종교적 신학 사상 체계를 형성했다.
여러 현학자의 명교-자연 관계에 대한 견해는 서로 큰 차이가 난다. 명교와 자연과의 통일을 주장했다 하더라도 정통 유학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유학에 대한 수정이자 배반이었다. 현학은 시작하자마자 정통 유학의 공격을 받았다. 심지어 걸, 주보다도 죄가 큰 천고의 죄인으로 취급되기도 했다. 현학이 사상적 혼란을 조정하여 공자 학설을 침몰시키고 있으니 죽여 없애도 그 죄가 소멸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하안何晏은 하안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고 학식이 넓고 깊었으며 위魏 명제明帝 때 ‘부화교회浮華交會’ 즉 화려한 겉치레 교류 회합의 우두머리 가운데 하나였다. 여기에 참가한 사람으로는 하후현夏侯玄, 순찬荀粲, 등양鄧?, 부하傅?, 이풍李?, 왕광王廣 등과 나이가 훨씬 더 어렸던 왕필, 종회鍾會 등이 있었다. 그들은 사상의 자유를 추구했다. 각자의 견해는 달랐으나 전체적인 경향으로 볼 때 대체로 한나라 유학의 속박을 깨뜨리거나 유학을 수정하는 방향으로 사유를 전개했으며,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노자를 찬양
했다.
곽상은 위진 현학의 집대성자다. 그의 『장자주』(이하 인용문은 편명만 명기함)는 오랫동안 장자 주석의 권위를 인정받았으며, 그의 ‘내성외왕’의 도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토론 주제이자 추구하는 목표가 되었으니 그 영향이 크지 않다고 할 수 없다.

한 말 위진 시대 명법名法, 명리名理 사조와 현학玄學의 정치사상

양한의 통치자들은 유가의 강상명교綱常名敎로 천하를 다스렸다. 그러나 한말 명교의 쇠락은 한대 경학을 담체로 삼았던 효치孝治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음을 드러낸 것이었다. 사상적 혼란과 정치적 동요가 서로 영향을 미쳤다. 이런 상황 아래 정치사상 영역에선 두 가지의 강력한 사조가 출현했다. 하나는 명실名實 논쟁과 재성才性 논변이 하나로 융합된 명법名法 사조였다. 한말의 사상가 및 정치가들은 법제, 형명의 학문을 다시 주워들고 분열과 전란의 와중에 강제로 통치 질서를 회복코자 했으며 국부적인 정치 안정을 실현하기도 했다. 또 하나는 명교와 자연 관계 분석을 주된 사유방법으로 하는 현학玄學 사조였다. 현학자들은 도교를 유가에 끌어들였는데, 입으로는 오묘하고 요원한 이야기들을 했으나 실제론 정치 철학의 위치에서 명교의 합리성에 대한 재인식을 진행했다. 그 가운데 완적阮籍, 혜강?康을 우두머리로 하는 죽림竹林 명사들은 정치에 대한 전통적 인식의 웅덩이를 뛰어넘어 진부한 양한의 경학적 사유에 ‘괴이하고 허망한怪誕’ 청신한 바람을 주입했으나 끝내는 압살당했다. 현학은 끝내 진晉 대의 통치자들에게 명교의 합리성을 논증해주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다.
현학의 정치사상과 양한의 정치사상은 크게 다른데 주로 다음 몇 가지 측면에서 잘 드러나 있다.
첫째, 현학은 전통 정치 철학이 소홀히 다룬 문제, 즉 정치사상의 합리적 기초와 원칙들을 논의하는 데 치중했다. 양한과 달리 현학은 구체적인 문제는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 어떻게 관직을 설치하고 구분할 것인지, 어떻게 관리를 관찰하고 임용할 것인지, 어떻게 인사 고과와 공적 평가를 할 것인지 등을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명한 이치로 여겼던 일련의 개념들, 예컨대 성인, 도, 명교와 도의 관계, 인위와 자연 등의 토론에 치중한다. 둘째, 구체적인 정치 문제에 대한 관점을 보면 위진 현학 또한 특수한 점들이 있다. 존군尊君 문제를 보자. 현학은 군주의 지위와 작용을 십분 존중한 듯이 보인다. 군주를 도에 비유하는가 하면, 인간 세계의 종극宗極, 유일자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러한 종극이 성립하는 이유를 ‘정靜’ ‘무위’ 등의 특징을 갖춘 사람으로서의 군주를 설명하는 이론에서 가져오고 있다. 이는 오히려 현실 정치에서 군주의 작용을 낮추어 보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 이 시기엔 무위 정치를 강조했다. 거의 모든 현학자가 무위 정치의 실행을 주장한다. 군주는 정치의 실제 움직임에 적게 간섭하고, 관리는 업무 성과로 능력 여부의 표준을 삼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점 또한 양한 시기와 크게 달랐다. 그건 확실히 이 시기 군권이 쇠락하고 명문거족이 흥기한 것과 지대한 관계가 있다.

양진兩晉 남북조 시기 정치사상의 다원적 발전

한말 삼국三國 이래 정치 분열 및 사회 동요는 한대 경학에 심대한 충격을 가했다. 정치사상 영역에서 유학 독존의 통일된 국면은 더 이상 유지하기 힘들어졌으며, 유가, 현학, 불교, 도교 등 여러 학설이 상호 경쟁하며 병존하는 다원화 추세를 드러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 문화의 다원적 발전이란 표상의 뒷면에 또 다른 경향이 존재하고 있었다. 서진으로부터 남조의 송, 제, 양, 진에 이르기까지 한대 경학의 정치적 가치 주체와 몇몇 정치 원칙이 여전히 전승되어 내려오면서 양한 정치사상의 발전과 심층적 차원의 동질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경향은 양한 주공周公, 공자의 도가 정치적 분열과 문화적 다원이라는 특수한 역사 조건하에서 여전히 자신을 유지하고 면면히 연속되어 수隋, 당唐 시대 유학의 진흥과 3교의 합일을 보장해주고 그에 필요한 전제 조건을 마련해주었다.
양진 및 남조 시기 유가 정치사상의 전승은 덕치, 인정, 절검, 화이론 등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핵심은 한대 유가의 둥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 시기 유가 사상의 역사적 지위는 세상의 주목을 끈 현학이나 불교, 도교에 크게 못 미쳤다. 그러나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은 선양, 예제, 군신, 법제 등 문제에 대한 토론에 참여했던 사람이 모두 통치 집단의 중요한 구성원이거나 군주 본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유가 사상 및 그 정치 원칙들이 여전히 통치 계급들에 의해 치국평천하의 기본 방침이자 정책 근거로 받들어지고 있었다는 표시다. 바로 이 점에서 그것들이 한, 당 유가 정치사상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교량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제3권
수당송원명청

수당 황제들의 성숙하고 완비된 군도론

제3권은 수당 시대부터 다룬다. 강성했던 수隋와 화려했던 당唐은 중국 봉건사회의 전성시대였다. 진시황이 황제 제도를 확립한 이래 봉건 전제주의 중앙 집권 정치 체제는 800여 년에 걸친 장구한 비바람의 역정과 곡절의 변천을 겪으면서 제도적, 이론적으로 날로 성숙하며 완비되었다.
581년 수 왕조가 건립되었다. 이어서 양梁나라를 멸하고 진陳나라를 평정하여 589년에 통일천하를 실현했으며 위진魏晉 이래 근 400년을 지속해온 분열 국면을 끝장냈다. 머지않아 천하 대란이 일어나 강력한 수나라가 멸망하고 이李씨 당나라로 대체되었다. 당 초의 여러 황제가 정치에 온힘을 기울임으로써 사회, 경제, 문화는 다시없을 번영을 이루게 되었다. 당 중엽 이후 사회 모순이 날로 격화되었고, 755년 안사安史의 난을 전환점으로 당 왕조는 극성기를 지나 쇠락했으며 번진藩鎭의 할거로 차츰 오대십국의 분열 국면에 접어들었다.
수당과 양송兩宋은 고대 정치사상 발전의 중요한 단계다. 선진 사상의 특징을 발단, 분화, 쟁명爭鳴이라 하고, 양한과 위진 남북조 사상계의 주요 경관을 일존一尊, 다원, 융합의 상호 작동이라고 한다면, 수당과 양송 사상 발전의 전체 추세는 종합, 심화, 겸용兼容이었다고 하겠다. 수당 시기에도 다원과 쟁명은 여전히 사상 문화의 영역에서 사람의 의지에 의해 바뀌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정치사상의 각도에서 본다면 수많은 중대한 이론 문제가 결론을 얻고 심화되었다. 유교, 불교, 도교의 이론 형태가 모두 심각한 변화를 통해 수많은 사상문화적 성과를 얻게 되었다는 것은 대부분 인정하는 바다. 수당 여러 황제의 군도론君道論은 바로 이와 같은 사상 문화 발전의 큰 추세 가운데 첫 번째로 중대한 성과다.

수당 시기 불교와 도교의 정치사상

유, 도, 불 3교는 중국 전통문화의 3대 지주다. 수당 이래 3교의 교차와 통섭이 고대 문화의 전체를 구성했다. 유, 도, 불 3교가 이데올로기 영역에서 지배적 지위를 다투며 끊임없이 갈등하고 부딪힌 것은 수당 사상사의 뚜렷한 특징 가운데 하나다. 3교의 충돌은 위진魏晉 시대에 시작되어 남북조 시대에 성행하다가 당나라 때 3교가 병립하는 국면을 연출했다. 봉건 왕조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문화 정책을 시행했기 때문에 3교는 각자의 장점을 발휘하여 셋으로 나뉘어 정립의 형세를 띰으로써 백중을 가리기 어려웠다. 서로 배척하고 침투하는 과정에서 3교의 학설이 모두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며 각자의 이론 형태에 심각한 변화가 생긴 것도 수당 사상사의 특징 중 하나다. 불교와 도교가 수당의 문화생활, 사회생활 및 정치 생활에 끼친 영향은 그 정도가 절대로 유가에 못 미치지 않았다. 사상 문화상 3교가 하나로 귀결됨으로써 전통문화의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

수당 유학의 부흥과 정치 철학의 새로운 변화

수당 시기 유학의 이론 형태에 중대한 조정과 개조가 일어났다. 일찍이 양한 시기에 통치 지위를 차지했던 유학은 위진 이래 현학, 불교, 도교 등 몇 가지 강대한 사상 체계의 충격을 받고 일시적으로 쇠락하는 형세를 보였다. 수나라와 당나라의 정치적 통일로 경제는 번영하고 문화가 발달하면서 유학 진흥의 계기와 조건이 만들어졌다. 수당 교체기에 유학은 중대한 일부 이론 문제를 돌파했다. 당나라 중기 이후 유학은 3교 항쟁을 거치면서 차츰 피동적 위치에서 주동적 위치로 바뀌었으며 일련의 이론적 성과도 얻었다. 유학은 끊임없는 자아 조정과 개조를 통해 쇠미한 상태에서 부흥을 향해 치달았다.
수당 시기 최고 통치자들의 대대적인 지지야말로 유학이 부흥하게 된 정치적 전제였다. 3교 가운데 유학은 줄곧 남다른 정치적 우세를 누렸다. 특정한 시기 혹은 제왕은 유학을 충분히 중시하지 않았을 수도, 돌아볼 여가가 없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유학의 정치적 지위는 부정된 적이 없었고, 불교나 도교처럼 시시로 압제와 타격을 받은 적은 더더욱 없었다.

당말오대唐末五代의 정치사상: 군주 정치에 대한 반성과 균평均平 이상의 동경

당나라 말년 정치는 부패하고 사회 모순이 전면적으로 격화되었다. 제왕은 하나같이 황당했으며 국고는 고갈되었다. 통치 계급 내부의 분쟁도 그치지 않았다. 번진藩鎭에선 영웅들이 할거하며 서로를 공격했고, 환관이 발호하여 제멋대로 생살을 주도했다. 남아南衙1의 조신들과 북사北司 환관 사이의 다툼이 물과 불처럼 위세가 등등했으며 조신들 사이 붕당 간 다툼 또한 분분히 발생했다. 국방은 텅 비어 이민족들이 침입함으로써 전쟁도 빈번히 일어났다. 토지 겸병 또한 엄중하여 “부자들은 전답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으나 빈자들은 송곳 꽂을 땅도 없었다”. 관리들은 부패하고 세금은 가혹하여 민중의 생활은 도탄에 빠졌다.
정치가 어두울수록 사회적 폐단은 확연히 드러나는 법이다.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지닌 여러 계급과 계층의 인물들이 성찰과 비판의 태도를 견지한 채 사회와 정치를 자세히 살펴보면서 일련의 사조를 형성했다. 성찰과 비판은 사회적 폐단을 없애줄 구세의 길을 찾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상 사회에 대한 사람들의 동경과 구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북송 시기 정치 개혁, 왕권 강화의 정치사상

송나라는 위로 수나라와 당나라를 이어받아 아래로 명나라와 청나라의 문을 열었다. 역사 발전 과정으로 볼 때 중국 봉건사회는 이로부터 가장 융성한 시대에서 차츰 말기로 진입했다. 송대에 중앙 집권은 한층 더 강화되었고 소작 제도가 보편적으로 시행되었으며 상공업이 크게 발전했다. 자연과학 및 각종 학술 사상 또한 장족의 발전을 했다. 송 왕조는 안팎으로 궁지에 몰리고 빈약하기 이를 데 없는 왕조였으며 수많은 골치 아픈 정치적 난제를 안고 있었다.
정치 개혁과 왕권 강화는 북송 정치사에서 가장 주목을 끈 현상이었다. 태조와 태종은 구 정치 체제를 개혁했으며 인종仁宗은 ‘경력신정慶曆新政’을 행했다. 신종神宗은 ‘희풍신법熙?新法’을 실시했고 철종 또한 ‘원우경화元祐更化’를 단행했는데 모두 중대한 정치적 조치였다. 이러한 정치 변동을 둘러싸고 조야 상하 간 의론이 분분했으며 심지어 때로는 커다란 풍파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상황이 정치사상 영역을 활기차게 만들었으며 정치 사조가 잇달아 출현하면서 여러 학파를 탄생시켰다.

송대 리학의 정치 철학, 정치 가치, 정책 사상

리학理學은 북송에서 흥기하여 남송에서 성숙되었다. 사실상 리학은 남송 말기에 이미 통치 사상의 지위를 획득했다. 원 왕조로부터 청 왕조가 멸망하기까지 리학은 줄곧 봉건 왕조에 의해 관학官學으로 받들어지며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600~700년 동안이나 주도권을 장악했다. 리학은 봉건 통치 계급의 권위주의적 정치 이론의 바탕이었을 뿐만 아니라, 과거를 통한 인재 선발의 법정 표준으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발전에 직접 영향을 미쳤다. 리학은 송대 이래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정치적 사유 방식이며 전통문화의 대표자였다. 리학은 결국 유학 스스로가 내적으로 쌓아온 논리에 따라 부단히 변화하고 승화된 결과다. 위진 이래 유학은 본체, 규율, 방법, 인성 등 철학 문제 및 그것과 도덕, 정치와의 관계에 대해 깊이 있는 논의를 진행하여 차츰 심오한 철학적 사변을 갖춘 이론 체계를 구성해왔다. 리학은 이러한 사상의 변화, 발전 과정의 완성이고 총결산이다.

남송의 사공事功 사상과 등목鄧牧의 이단 사상

남송에서 리학 사조와 대등한 입장에서 대응한 것은 진량陳亮과 섭적葉適으로 대표되는 사공事功 즉 업적주의 사조다. 진량과 섭적 정치사상의 뚜렷한 특징은 실제를 지향하고 실천을 중시하며 사공을 제창하고, 심성을 둘러싼 공리공담에 반대하고, 농업과 상업의 상호 이익을 주장한 점이다. 그들은 강산을 가리키며 금金나라에 항거할 것을 애써 주장했다. 시대 정치를 평론하고 개혁을 창도했으며 사회 현실에 격렬한 비판을 가했다. 리학 사조에 대한 그들의 비평과 비난은 당시 사상계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송말원초 사회는 급격한 혼란에 빠졌으며 수많은 선비는 산림으로 숨어들었다. 그들은 현실을 비판하고 폭정을 폭로하며 이단 사상의 발전을 촉진했다. 등목鄧牧의 정치 이상은 일부 선비들의 소망을 반영하고 있는데, 격렬한 사회비판 사상으로 일정한 가치와 의의를 지니고 있다.

요遼, 서하西夏, 금金의 통치 사상

당 왕조의 멸망에서 원 왕조의 수립까지 300여 년 사이에 요遼(거란契丹), 서하西夏, 금金나라가 북부(동북과 서북을 포함한) 중국에서 앞뒤로 흥기했다. 그들은 피차간 대치하기도 하고 중원의 왕조와 대항하고 경쟁하기도 했던 독립 왕조들이다. 그 가운데 요나라와 금나라는 연이어 북방에 웅거하면서 광활한 강역을 지배하고 극성기를 누렸던 대제국이었다. 요, 서하, 금은 정치 문화의 변천 측면에서 어느 정도 공통된 특징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하나하나의 마상馬上 민족이 한漢 민족을 통치하는 과정에 점진적으로 중화의 예법을 받아들이게 되었음이 그렇다. 그들은 문명의 큰길을 향해 치달았다. 왕권이 부단히 강화되어감에 따라 요, 서하, 금 내부의 군신 간 구별도 날로 삼엄해졌다. 군주와 신하가 상대적으로 권력을 나눠 가졌으며, 서로를 제약했던 구체제의 요인들은 이로 인해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왕권은 또한 부패의 길을 향해 치도 했다. 그리하여 또 하나의 마상 민족이 굴기하여 앞의 것을 대신하고 (…) 역사는 반복하여 비슷한 윤회의 수레바퀴를 보여주었다. 여러 원인으로 요, 서하, 금의 통치자들은 체계적인 정치 논저를 남기지 않았다. 이론화한 정치사상 체계는 더더욱 형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의 치국 방략, 정책과 언행을 보면 일부 뛰어난 군주들은 정치 문제에 아주 깊이 있는 사고를 표명하기도 했다.

원元대 ‘용하변이用夏變夷’ 사조와 리학의 관학화

원 왕조는 몽고 귀족이 한족 통치 계급과 연합하여 건립한 봉건 왕조다. 북송과 남송 이래 북방 소수 민족이 연이어 흥기했다. 하夏, 요遼, 금金 왕조를 건립했던 당항, 거란, 여진족 등과 비교할 때 몽고족의 흥기는 비교적 늦었지만 세력은 가장 왕성했다. 남송 개희開禧 2년(1206) 성길사한成吉思汗(칭기즈칸)이 대몽고국大蒙古國을 건립하고 막북漠北을 통일하고는 신속히 외부로 확장했다. 남송 단평端平 원년(1234)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적극적으로 송나라를 도모했다. 남송 도종度宗 함순咸淳 7년(1271) 세조世祖 홀필렬忽必烈(쿠빌라이)이 원元 왕조를 건립하고 얼마 안 있어 남송은 멸망했다. 송원 교체기 화하華夏 전통의 유가 문화는 전대미문의 맹렬한 충격을 받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낙후한 북방 유목 문화와 고도로 발달한 중원 예악禮樂 문명은 격렬한 충돌, 대항을 거치면서 점차 조화와 융합의 과정으로 나아갔는데 이는 원대 정치사상의 발전에 매우 특수한 상황을 제공하게 되었다.

명대 통치자들의 전제집권 강화 정치사상

명明 태조太祖, 명 성조成祖, 장거정張居正을 대표로 하는 명대 통치자들은 중앙 집권과 전제를 강화하고 관리에 대한 통제와 안민安民을 동시에 주목하는 치국 방침을 받들었으며, 제왕의 권력을 한층 더 절대화했다. 절대 군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들은 중앙 집권 체제의 완성에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정치 이론의 건설 또한 중시하여 일련의 치국 사상을 마련했는데, 이는 명대 정치의 발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주의를 끄는 것은 절대 군권을 옹호하는 이 정치 이론이 군권君權을 조정하려는 전략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구준丘濬의 ‘제왕학帝王學’은 군권을 위한 활동 범위를 명확히 획정했으며, 최고 통치자들로부터 인가를 받았는데, 이는 명대의 통치 사상과 정치 사조를 이해하는 데 전형적인 재료를 제공해준다.

왕양명王陽明의 심학 및 그 후학들의 정치사상

원대 이래 정주학이 일세를 풍미했다. 그 철학, 정치론, 도덕관념이 인심에 깊이 파고들면서 거의 학계의 주류가 되었다. 명대 중엽에 이르러 이 국면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더니 학술계에 정주학을 비판하는 사조가 출현했다. 심학의 굴기는 일시에 폭넓은 인정을 받게 되었으며 이데올로기 영역에서도 광범한 영향을 미쳤다.
왕양명은 위로 공맹을 계승하고 “주희와 육구연을 범위로 하여 나아가거나 물러섬으로써”1 심학心學의 집대성자가 되었다. 그는 송·명 리학 가운데 정인심正人心 사상 및 그와 관련된 철학적 사변을 집중적으로 발전시켰으며 정주학의 폐단을 교정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정程·주朱와 육陸·왕王의 기본적인 정치 가치관은 다르지 않지만 심과 리를 결합시킨 왕양명의 철학적 사변은 심의 본체성 및 그 윤리도덕적 속성을 강화시켰다. 격민심지비格民心之非, 즉 민심의 잘못을 바로잡고, 파심중지적破心中之敵, 즉 마음속의 적을 깨뜨리라는 말은 심학이 특별히 관심을 기울인 이론 문제다. 왕양명과 그의 후학들은 이 사유의 길을 따라 서민을 교화하고 사회를 안정시킬 구세의 방안을 탐색했으며 이로써 유학은 더욱더 세속화하게 되었다.

동림당인東林黨人의 시폐 관심 정치사상과 충군忠君의 정치 심리

명 왕조 중기 이후 국세의 점진적 쇠퇴는 주로 정치 혼란과 이치吏治 부패로 드러났으며 사회 갈등은 심화되었다. 만력萬曆 초기 장거정張居正이 재상을 맡던 시기엔 정치적으로 중앙 집권을 강화하고 경제적으로 일조편一條鞭 세법을 시행하며 개혁에 힘씀으로써 퇴세가 늦춰지기는 했다. 그러나 오래되고 깊은 적폐 때문에 그의 조치들은 겉만 다스렸을 뿐 근본적인 전환을 가져올 수 없었다. 장거정은 권력을 쥐고 국정을 담당하면서 독단을 하고 친신만을 임용하며 자기와 다른 사람을 배척하고 언론을 억눌렀다. 이로써 통치 집단 내부의 권력 충돌은 더욱 격화되었다. 장거정이 병사한 후 권력 충돌은 아주 빠르게 격렬한 붕당 투쟁으로 바뀌었다. “당론黨論의 흥기는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명나라 말엔 당쟁이 흥기했을 뿐만 아니라 발생할수록 수습이 불가능했다. “정사를 논하는 사람들은 갈수록 집정자를 심하게 재단하고 집정자는 날마다 그들과 맞서며 물불처럼 서로 용납하지 못하면서 명나라가 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명 말 붕당의 이름은 절당浙黨, 제당齊黨, 초당楚黨, 곤당崑黨, 선당宣黨 등 아주 많았다. 동림당東林黨은 그 가운데 하나였다. 그들은 ‘쟁국본爭國本’ ‘이궁移宮’ ‘정격안?擊案’ ‘홍환안紅丸案’ ‘과장안科場案’ ‘북왕지국福王之國’ 및 계리計吏, 경찰京察4 등 정치 문제를 둘러싸고 공공연히 암투를 벌이고 쟁송을 그치지 않았다. 다른 붕당 집단과 비교할 때 동림당이 가장 특색이 있었다. 그들의 정치 주장은 시대의 폐단과 깊이 관련이 있어서 특정 사회 계층의 광범한 지지와 호응을 얻었으며 명대 정치사상 발전상 특별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청 초 봉건 사대부 집단의 자아비판 사조

명청 교체기 인재와 천재가 무참히 이어지면서 사회 모순은 전례 없이 격화되었다. 명나라 조정 내부의 당쟁은 그치지 않았고, 부패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다. 북방에선 만주족滿洲族이 발흥하여 대청大淸 정권을 수립하고 누차 명나라 군대를 패퇴시키며 중원을 압박했다. 하층 민중은 방법이 없이 모험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사내가 장대를 높이 쳐드니 천하가 그에 호응했다.”1 복잡하게 뒤얽힌 사회 모순들이 한꺼번에 터짐으로써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게” 되었으며, 국왕의 기강은 해체되었다. 1644년 이자성李自成의 봉기군이 북경을 점령하자 숭정제崇禎帝는 매산煤山에서 스스로 목을 매었다. 머지않아 청군이 산해관山海關으로 들어와 중원을 쟁탈하니 대순大順, 대서大西, 남명南明이 연이어 패망했다. 중국역사상 최후의 왕조인 대청제국이 천하통일을 실현했다.
극렬한 사회 혼란과 나라와 군주를 잃은 정치 대변동은 수많은 사대부로 하여금 명대의 정치적 병폐를 반성하게 만들었고, 송명 리학을 반추하게 했으며, 전통 정치사상과 정치 체제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을 하도록 했다. 비판과 성찰의 기초 위에서 그들은 도를 밝혀 세상을 구제하고, 실용을 숭상하고, 군권을 조정하고, 체제를 개혁해야 한다고 분분히 주장하고 나섰으며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친 정치 사조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조를 대표하는 인물로는 주로 황종희黃宗羲, 고염무顧炎武, 왕부지王夫之, 여유량呂留良, 당견唐甄 등을 꼽는다.

청淸대 전기 제왕들의 정치사상: 절대 군권의 수호

1644년 청나라 군대가 북경을 점령함으로써 전국을 통치한 중국 역사상 최후의 봉건 왕조가 그 서막을 열었다. 청조의 최고 통치 계층은 만주족 귀족이 핵심이었는데 입관入關 전과 입관 후 상당 기간 동안 문화적 소양이 비교적 낮았다. 청조 원래의 정치권력 체제는 내지에 대한 통치에 적응하기 위해 개혁이 필요했다. 청나라 초의 순치順治, 강희康熙, 옹정雍正, 건륭乾隆 네 황제는 정치적으로 아주 열심히 정무에 종사했으며 정치사상적으로도 각자 나름대로의 견해를 밝히고 탐구했다. 청조 황제의 정치사상에 대한 분석은 중국 고대 정치사상사를 연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다. 청 조정은 역대 왕조의 흥망성쇠에 대한 역사적 교훈을 총결하며 정치권력 체제상 군주 일인 전제를 극단적으로 강화했다. 동시에 청조 황제들 또한 그에 상응하는 정치적 견해를 제기했다. 가장 잘 드러난 점은 군주 전제 사상을 한 단계 절대화한 것이다.

공자진?自珍과 고전 정치 사유의 종결

청대는 중국 역사상 중대한 변화가 발생한 시기다. 일찍이 청 왕조가 건립되기 전 중국의 봉건사회는 이미 말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강건 성세康乾盛世’를 지난 뒤 대청제국은 극성기에서 쇠퇴기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19세기 전기에 이르러 봉건 제도의 문란과 청 왕조의 쇠락이라는 이중의 말세적 상황이 만들어졌다. 전체 사회에서 경제 쇠퇴, 정치 부패, 사상 침체, 민생 곤궁이라는 황폐한 현상이 노정되었다. 각종 사회 모순이 매우 첨예하게 드러났으며, 농민과 각 소수 민족은 청 왕조의 통치에 반항하여 맹렬한 기세로 봉기를 일으켰다. 가경嘉慶 18년(1813) 천리교天理敎가 봉기를 일으키니 민중이 청조의 궁궐에 난입하여 융종문隆宗門에 활을 쏨으로써 청 조정을 크게 놀라게 했다. 가경제는 슬피 탄식했다. “한, 당, 송, 명에 없었던 일이 끝내 대청 조정에서 일어났구나.” 동시에 세계 자본주의 각국이 피비린내 나는 야만적 해외 약탈을 전개하면서 중국에 대해서도 염탐과 침략의 고삐를 바짝 당기고 있었다. 중국의 대문을 열기 위해 영국은 외교 방법을 통해 교섭하는 동시에 무력 침략을 적극적으로 획책했다. 불법적인 아편 무역은 중국에 심각한 사회 문제를 가져왔다. 사회 제도의 위기, 청 왕조의 위기, 그리고 중화 민족의 위기가 모두 무르익어 전면적 폭발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중국 사회는 이미 “산비가 내리려니 온 누각에 바람이 가득했다”.
세도世道의 쇠패와 사회의 동요는 다시 한번 사람들의 시선을 현실로 끌어왔다. 날로 격화되어가는 사회 모순은 새로운 정치적 사유를 불러왔다. 통치 계급 또한 세상을 구제하고 운세를 만회할 방법을 화급히 구하여 현존 질서를 유지하는 데 더욱 효과적인 사상적 무기를 만들려고 했다. 세도의 변화를 가장 먼저 민감하게 느낀 사람은 사대부 계층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직접적으로 사상계 풍토의 변화를 유발시켰으며 차츰 하나의 사회 사조로 자리를 잡아갔다. 공자진?自珍은 이 사조의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다.


목차


중국정치사상사 1
중국정치사상사 2
중국정치사상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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