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진의 복원과 함께 그 진정한 의미를 찾아
어진이란 왕의 초상화를 일컫는 말로, 우리나라는 수많은 전란과 화재를 겪었음에도 한국전쟁 때까지는 함경도 영흥의 준원전과 전라도 전주 경기전의 태조어진을 비롯하여, 창덕궁 신선원전에 무려 열두 임금의 어진 48점이 봉안되어 있었다. 그러던 것이 전쟁을 피해 다른 문화재 3,400점과 더불어 부산에 소개되어 있던 어진들이 1954년 보관창고 화재로 거의 다 타버렸다. 겨우 몇 점만이, 그마저도 반 이상이 소실되고 남은 잔폭 상태로 구제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창덕궁 신선원전 어진들은 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을 거쳐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그 후 창덕궁 어진들의 보존처리가 부분적으로 진행되었지만, 본격적인 보존처리가 이루어진 것은 2012년부터 2017년까지였다. 홍룡포본 태조어진을 시작으로, 원종, 숙종, 순조, 익종, 철종, 고종, 순종 어진까지 보존처리가 행해졌고, 태조어진, 원종어진, 순종어진 등 원형모사가 가능한 어진들은 새로운 모사작업도 병행하였다. 이 책은 이 모든 과정에 참여했던 저자가 그동안 미흡했던 우리나라 어진 연구를 집성하고자 기획한 것으로, 총 168컷의 사진이 실려 있다. 각 사진의 세부까지 포함한다면 200컷이 넘는다. 남아 있는 어진은 물론 복원 후의 모습과 모사를 위한 디지털 합성 과정, 얼굴·손·귀 등 각 부분 복원에 참고가 될 관련 비교 이미지 등 어진 관련한 이미지가 총망라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통해 어진을 하나의 ‘그림’으로서 예술적 양식을 고찰하고 음미하는 동시에 어진이 차지하고 있던 ‘사회적 기능과 상징적 의미’ 또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함을 풀어내고 있다.
7할의 완성도면 극진한 것이라
어진 제작은 까다로운 과정과 절차를 거쳐 완성되었으며, 군왕 이하 여러 대신과 화가, 장인 들에 이르기까지 인원들이 폭넓게 동원되고 엄중한 절차를 거친 거국적 사업이었다. 더욱이 무엇보다도 주목할 것은, 이와 같은 당대 최고의 화가, 거국적 배려, 세심한 봉심을 거쳐 산출된 어진이 종국엔 ‘칠분모(七分貌)’ 즉 7할의 완성도면 극진한 것이라고 평가되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최고로 잘 그려야 70퍼센트의 완성도 밖에 도달할 수 없다는 엄격한 감식 기준이야말로 초상예술에서 ‘전신사조(傳神寫照)’가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가를 단적으로 대변해 준다. 한편 그와 같은 엄격한 태도가 초상화가들을 독려해 탁월한 초상화 작품들을 산출하게 했다. 이런 이유로 제12대 임금이었던 인종은 생전에 어진을 그리지 않았을 뿐더러 사후에도 그리지 말라고 단단히 유언을 남겼다. 그의 뒤를 이은 명종은 이러한 유지를 받들어 인종의 어진 추사를 강행하지 않았으며, 결국 인종어진은 제작되지 못한 것으로 기록에 나온다. 이와는 반대로 제26대 임금이었던 고종은 어느 왕보다도 어진 제작과 그 상징적 의미를 잘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왕의 위상 제고와 권력 강화를 위해 자신의 어진 제작 사업을 중시하고 여러 차례 공식적인 절차 외에 사적으로도 어진을 제작하였다. 특히 당시가 되면 어진에 대한 기존 관념이 희석되면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백성들 사이에 고종 사진 갖기 운동을 퍼졌다는 것도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