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언론과 독립 미디어를 통해 정치 시사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해 온 작가가 ‘그리움’을 테마로 한 글들로, 우리로 하여금 저마다 간직한 앨범을 한 장씩 넘기며 희미한 옛 그림자 속 그리움으로 잠겨들게 한다. 더 이상 나의 그녀가 아닌 그녀, 사랑이 떠나간 자리에서 하나씩 불러내는 풍경들, 그 풍경들을 수놓은 생활의 단상 60여 가지를 단행본으로 묶었다.
<풍경1> 동두천을 흐르는 완행열차
인생의 어느 시기, 아직 길이 먼데 걸음을 멈추고 지나온 길을 돌아볼 때가 있다. 뒤돌아본 어느 자리, 그리움에 사무친 내가 있다. 미군부대 옆을 달리던 완행열차의 칸과 칸 사이로 보이는 꼬마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흙을 쌓고, 약간의 긴장된 낯빛으로 나를 찾던 어머니가 환히 웃으며 다가오던 풍경. 어머니도 완행열차도 잔뜩 기교를 부린 채 미군부대 옆에 길게 늘어선 가게들의 영문 간판들까지도 풍경이다.
<풍경2> 그리움이 재가 되다
의대를 나와 평생을 소도시 개인의원 의사로 일해 온 아버지가 셀프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와 함께 살던 집도 이사를 하기로 했다. 병원 집기들을 고물상에 넘기고 고가의 의료장비들마저 중고 물품이 되어 헐값에 처분됐다. 아버지는 당신이 걸어온 인생의 모든 것을, 심지어 한 곳에 모아 불태워 가면서까지 지우고자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사를 도우러 간 나에게 집에 남겨진 나의 물품들을 치우거나 없애라고 했다. 거역할 수 없어서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했다. 몇 가지 남지 않은 물품들을 정리 폐기하고, 남겨진 책이며 앨범들을 불태웠다. 한 장 한 장 뜯겨진 앨범의 낱장들이 모닥불 속에서 일그러지며 재가 되어 스러졌다. 그리움도 저렇게 재가 된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풍경3> 낙서가 나를 끼적이다 그녀 때문이다
밤늦게 걸려온 그녀의 전화를 짐짓 심드렁하게 받는다. 그녀는 어떤 기대감으로 대화를 계속 이어가려 하고, 나는 약간 귀찮다는 듯 성의 없는 추임새로 그녀의 김을 뺀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찰기가 빠져 가며 이내 ‘잘 자!’ 하는 마지막 말과 ‘응.’이라고 대답할 틈도 없이 폰의 통화 창이 꺼진다. 잠을 이룰 수 없다. 문자라도 보낼까? ‘날 밝으면 전화 하지.’ 하는 동안 날이 밝고 늦잠을 잔 나는 무거운 머리를 이고 다니는 내내 그녀의 음성을 기다린다. 거래처 김 부장의 전화도, 대출 권유 스팸 전화도, 공과금 독촉 전화까지도 그녀의 전화가 아니란 사실에 실망을 넘어 화가 난다. 낙서장을 펼쳐 놓고 아무렇게나 끼적인다. 그녀의 목소리가 모스부호처럼 끊어진다.
<풍경4> 프레디 머큐리보다는 짐 모리슨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인기에 편승한 록그룹 ‘퀸’의 리드 보컬 프레디 머큐리 열풍이 식을 줄 모른다. 인도 태생의 영국 싱어 송 라이터 프레디 머큐리. 그는 아티스트로서의 정체성을, 천 년 전 인도를 떠나 14세기 무렵 체코 보헤미아 지방에 잠시 머문 집시들로부터 찾았다. 동성애자로서의 정체성과 마흔여섯이라는 나이로 멈추게 한 에이즈 투병까지, 4옥타브를 넘나드는 폭발적인 무대 매너는 <보헤미안 렙소디> 가사에서 극적으로 드러나는 반항적 감수성까지 더해 당대의 젊은 세대뿐 아니라 우리 시대의 중장년층들을 다시금 매료시켰다.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구절 ‘지각知覺의 문이 깨끗이 닦이면 / 모든 것이 무한히 드러나리라’에서 인용, 밴드 이름으로 삼은 ‘The Doors’. 1960년대 말, 활화산 같은 록으로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군림했으나, 밴드의 핵심 짐 모리슨은 약물 과다 복용과 극심한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했다. 당시 스물여덟. 영원한 청춘으로 기억될 수밖에 없는 나이. 대표곡 <Indian Summer>는 초겨울에 한동안 비가 오지 않고 날씨가 따스한 기간을 뜻한다. 잔잔하게 파고드는 기타 선율과 반항아 짐 모리슨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그의 인생에서 <Indian Summer>가 그리 길지 않음을 예감케 한다.
<풍경5> 인생을 살아본 자의 맛, 삭힌 맛을 아십니까?
먹을 것들은 일단 익어야 맛있다. 과일도 익어야 하고 곡식도 익어야 맛있다. 밥도 빵도 고기도 익어야 맛있다. 그 모든 익은 것들 중에서도 발효되어 익은 맛은 과일이나 곡식이 시간이 지나 익는 것과는 전혀 새로운 각별한 맛이다. 발효된 맛을 안다는 것은 인생을 안다는 의미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김치와 장류, 요구르트의 맛이 그렇다. 그러나 역시 익힌 맛의 최고는 삭힌 맛이다. 삭힌 홍어가 그렇고 북해 연안 사람들이 즐겨먹는 삭힌 청어가 그렇다. 단맛, 쓴맛, (매운맛), 신맛을 다 본 뒤에 알게 되는 삭힌 맛, 그러나 그 삭힌 맛은 누구나 즐기지 못한다. 삭힌 맛으로서의 인생, 나이 듦의 미덕이 그런 게 아닐까? 제대로 깊이 발효될수록 그 맛을 아는 사람들만 찾게 된다는 사실. 나이 들어 어중이떠중이의 하나로 휩쓸린다는 것만큼 부잡스런 것도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