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란 무엇인가
용서란 무엇이며, 누가 누구를 용서할 수 있고, 또 어떤 경우에 누구를 왜 용서할 수 없을까.
생전에 데리다가 ‘용서’라는 주제로 진행했던 세미나를 책으로 엮어 냈다. 데리다는 이 세미나에서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 용서’라는 아포리아에서 출발해 ‘용서’라는 행위가 내포한 다른 여러 아포리아를 하나하나 짚어나간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나치가 저지른 반인류 범죄, 제국주의 일본이 식민지를 상대로 벌인 반인류 범죄에 관해 용서를 빌거나 용서를 빌지 않는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그것을 용서하거나 용서할 수 없는지, 이 주제에 관한 칸트, 장켈레비치, 코이레, 아렌트 등 철학자의 주장을 소개하며 담론을 전개한다. 지난날 일본이 저지른 침략과 식민 지배, 반인류 범죄의 피해자였던 한국인에게, 특히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사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지금도 사죄를 거부하고 있는 일본 정부의 태도를 볼 때 매우 중요한 성찰을 제시한 책이다.
‘용서’라는 아포리아
데리다는 ‘용서(pardon)'라는 단어의 음절(par-don)에 포함된 의미를 성찰하면서 용서 행위에 포함된 논리적 난점들에 주목한다. 예를 들어 ’용서를 빌지 않는 자를 용서해야 하느냐‘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서부터 ’피해자 각자가 아니라 집단을 상대로 용서를 구할 수 있느냐, 그럴 권리가 있느냐, 그것이 과연 용서의 의미에 부합하느냐‘는 문제, 피해 당사자가 아니라 피해자를 대신해서 제삼자나 국가가 가해자를 용서할 권리가 있느냐’는 문제, 유대인 학살처럼 ‘저지른 죄가 너무 커서 ‘인간의 한계’를 넘었을 때에도 용서가 가능하냐‘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철학적·윤리적으로 대답하기 까다로운 주제를 두고 심각한 성찰을 전개한다.
이는 종군 위안부 문제를 두고 정부가 나서서 피해 당사자의 의지를 거스르며 가해자 일본과 벌인 협상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근거로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실제로 데리다는 바로잡아 회복할 수도 없고 되돌릴 수도 없는 악행을 저지른 자와 그 악행의 피해자가 제삼자의 개입 없이 ‘일대일’로 대면한다는 조건에서만 용서를 빌거나 용서할 수 있고, 피해 당사자만이 용서의 요청을 들어주거나 거절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런 식의 대리 용서는 용서의 의미와 진정성을 훼손한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