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대생들이 열광하는 작가의 경청학 수업
“사고력의 원천은 눈과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귀로 판단하고 입으로 정리해 사고로 연결 짓는 것이 새로운 앎의 방법이다.”
지금까지의 근대 문화는 지식이라는 눈의 힘을 축으로 발전해왔다. 인간의 말을 듣고 사물을 생각하는 것은 등한시되었다. 사람들의 귀는 중요한 것을 듣고 머리에 넣는 힘이 약해졌다. 사고의 흐름을 잘 따라가지 못한다. 아주 잘 정리된 이야기를 들어도 나중에는 전혀 인상(印象)이 정리되지 않는다. 그저 전체적인 느낌으로 재미있었다든지 지루했다든지 하며 문제 삼는다. 아무리 물을 부어도 물이 담기지 않는 소쿠리 같은 청각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우리는 거의 의식하지 않고 있다.
‘귀동냥’이라는 표현은 귀로 들을 뿐 정말로 학문을 배울 리 없다는 울림을 포함한다. 사전을 찾아보면 “스스로 배우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만 얻은 지식. 들은풍월로 익힌 지식”이라고 되어 있다. 귀 따위는 전혀 제대로 대우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가정에서 아이를 기를 때는 귀에서 들어오는 ‘귀의 말’에서 시작해 그 귀의 말을 철저히 하는 것이 기본 원칙이다. 그렇게 과거 수백 년이나 이어져왔다.
교육이 보급되어 문자 학습, 즉 읽고 쓰기를 듣고 말하기보다 중요시하면서 귀가 나설 자리를 잃었다. 왜곡된 것이지만 높은 학력을 지닌 사람들이 그런 교육을 받았기에 그게 정통 학문이라는 착각이 생겨났다.
이 책은 귀 기울여 듣는 경청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잘 들을 수 있는 귀의 힘을 기르는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경청할 수 있으면 더 많은 지식과 지혜를 얻고, 사고의 흐름을 파악하기도 쉽다. 저자는 언어의 각 분야를 자연의 서열대로 두면 듣기 → 말하기 → 읽기 → 쓰기 순이라고 말한다. 일그러진 문자 신앙에서 벗어나 잘 듣고 이해하는 경청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뿐만 아니라 언어의 네 영역 중 그 시작인 듣기 능력을 경청하는 수준으로 끌어올리면 저절로 다른 영역의 커뮤니케이션 능력도 향상된다고 강조한다.
‘지식의 거인’이 밝히는 ‘듣기’에서 ‘사고하는 힘’이 길러지는 방법
중요한 부분은 들으면 머리에 들어온다!
잘 듣고 사고의 흐름을 아는 ‘사고의 정리학’
흔히 지성은 ‘눈의 말’, 다시 말해 읽고 쓰기로 길러진다고 생각한다. 학교에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눈의 힘은 날카로워져도 귀는 퇴화해 ‘귀 바보’가 되어간다. 학력이 높아짐에 따라 귀를 경시, 때로는 무시하는 일이 많아졌다. 마음 없는 사람은 그걸 세상의 진보처럼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는 인간 문화의 위기라고 할 수 있다.
인쇄라는 2차원적 정보 사회였기에 ‘귀 바보’가 대량으로 늘었다는 사실은 어쩔 수 없다.
20세기 중반쯤 컴퓨터가 등장하며 상황은 분명 뒤바뀌었을 텐데, 지적으로는 여전히 보수적이다. 사회에서는 그 의미를 분명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컴퓨터는 지식이라는 2차원적 정보 처리에 대해서는 인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력을 지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3차원적 세계, 4차원적 세계에는 무력하기 그지없다. 인간으로 말하자면 ‘귀 바보’
인 셈이다. 컴퓨터는 2차원적 지식인의 일거리를 빼앗아가고 있다. 언젠가는 더욱더 인간을 배제하려 할 것이다. 오늘날 사무직의 취업난은 그 전조다.
컴퓨터에 맞서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면 귀를 쫑긋 세우고 눈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 ‘귀 바보’는 처음부터 상대도 되지 않는다.
예전에는 ‘마이동풍(馬耳東風)’이라고 웃어넘겼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그런 농담을 하고 있을 시대가 아니다. 말의 귀로는 곤란하다. 인간의 귀로 잘 갈고 닦지 않으면 기계에 당하는 가여운 인간이 될 뿐이다.
미래형이 아닌, 이미 진행되기 시작한 변화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의 귀를 인간의 귀답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 생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