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 없는 세상,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이정표
이 책은 사회기술체제 전환의 시각에서 한국의 원자력발전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력공기업집단이 주도하는 독특한 원전 산업구조는 합리적 계획의 산물이 아니라 연구개발, 설비제작, 전력공급 부문 간의 경합으로 인한 국가계획 실패의 산물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계획 실패로 인해 기술추격의 경로가 확정되고 발전주의적 에너지 공공성이 확립될 수 있었다. 여기에 반핵운동의 지역화가 맞물리면서 원전을 매개로 한 값싼 전기소비사회는 2000년대까지 지속될 수 있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에도, 문재인 정부의 탈핵선언에도 불구하고, 원전 축소에 대한 저항이 거센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긴 시간에 걸쳐 형성된 원전 사회기술체제를 세밀하게 해부할 필요가 있다. _‘들어가며’ 중에서
2017년 고리 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서의 탈핵선언을 계기로 첫발을 내딛었을 뿐, 탈핵에너지전환을 위해 앞으로 수십 년 동안 한국 사회가 풀어야 할 숙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한 예로, 원전을 매개로 한 값싼 전기소비사회에 대한 미련은 에너지 가격의 현실화를 제약할 뿐만 아니라 지속가능한 에너지 체계로의 전환을 지연시키고 있다. 원전 수출에 대한 기대가 식지 않는 이유와 원자력 연구 개발 분야가 여전히 사회적 감시의 사각지대로 남아 있는 까닭 역시 조금 더 긴 호흡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한 공론화 예찬론에 머물러 있는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의 경험을 한국의 에너지 민주주의의 역사 속에 위치시켜 더 나은 에너지 민주주의를 탐색하는 계기로 발전시켜야 한다. 탈핵에너지전환의 정치사회적 기반이 강화되어야 탈핵 정책이 신규 원전 건설 중단과 노후 원전 수명연장 중단에 갇히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속가능한 에너지 체계로의 전환을 위해 에너지 공공성을 재정립하고 정의로운 전환의 방안을 모색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지만, 얽히고설킨 현실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데 원전 사회기술체제의 형성과 변형 과정을 되짚어보는 것이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 지평 위에 섰을 때, 탈핵에너지전환 정책의 성과와 한계를 보다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원전 사회기술체제 분석이 제시하는바, 탈핵에너지전환은 결국 우리가 앞으로 어떤 사회-기술을 만들어갈 것인지를 선택하는 문제다. 소모적인 탈핵 찬반 논쟁에서 벗어나 더 나은 선택지를 논의하는 단계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을 이 책에 담았다.
이 책의 시간적 분석 범위는 1967년부터 2010년까지이며 사회기술체제의 형성과 안정화 여부를 기준으로 4시기로 구분했다. 1기(1967~1979)는 원전체제가 틈새 수준에서 체제 수준으로 확장되어가는 시기이고, 2기(1980~1986)는 원전체제의 발전 경로가 결정되는 시기이다. 3기(1987~1996)는 기술추격이 진전되고 반핵운동이 부상하면서 원전체제에 균열이 생긴 시기이고, 4기(1997~2010)는 전력산업 구조조정의 여파와 지역반핵운동의 지속으로 인해 원전체제가 이중의 위기에 직면한 시기이다. 이 책의 제2~5장은 4시기 각각을 분석한다. 여기에 한국 원전체제의 발전 경로에 대한 비교역사적 분석을 덧붙이고, 후쿠시마 사고 이후 원전체제의 변화를 개괄하는 장을 추가했다.
배경적 논의에 해당하는 제2장은 후발추격적 조건에서 원전체제의 기본 구성요소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다룬다. 먼저 제1차 석유위기와 중화학공업화에 따른 전력수요의 증가로 원전 건설의 기회가 확대된 배경을 살펴본다. 원전 건설이 핵무기 개발과 결합되면서 원전산업육성계획이 수립된 것도 눈여겨볼 지점이다. 이어서 산업보조화, 산업화, 안보화 전략이 충돌하면서 발생한 연구개발, 전력공급, 설비제작 부문 간의 원전산업 진출 경쟁을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조직 간 이해관계가 상충되고 대외적 자율성이 제한되면서 불확정적인 상태에 놓여 있던 원전체제의 조직적·기술적 상황을 되짚어본다.
제3장은 원전 산업구조가 안정화되고 기술 경로 및 규제 제도의 기본 틀이 형성된 과정을 재구성한다. 이를 위해 우선 제2차 석유위기로 말미암아 역설적으로 원전의 경제성 문제가 부상하게 된 맥락을 살펴본다. 이후 핵기술 병행 개발이 차단되면서 위기에 처한 연구개발부문이 연구.사업 병행 모델을 통해 재기하는 과정을 추적한다. 한전을 중심으로 한전력공기업집단이 형성되고 원전 국산화·표준화가 가속화된 것이 그다음 순서다. 연구개발, 전력공급, 설비제작 부문 간의 관계가 안정화되면서 기술 경로가 결정되고 규제 제도가 정비될 수 있었다.
제4장은 기술추격과 민주화 이후 원전체제의 균열이 봉합된 과정을 분석한다. 먼저 원전 설비 과잉이 어떻게 값싼 전기소비사회로 이어졌는지 살펴본다. 값싼 전기소비사회로의 전환은 원전체제가 사회적 지지 기반을 확충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는 점에서 이후 원전체제의 전개 과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다음으로 민주화 이후 반핵운동이 급속히 지역화된 배경을 뒤좇는다. 이어서 기술추격과 반핵운동이 연구개발, 전력공급 부문 간의 사업 주도권 다툼과 연결되어 원전체제에 균열이 발생하고 이것이 봉합되는 과정을 원자로 및 핵연료 설계, 방사성폐기물 관리, 방사성폐기물처분장 건설을 중심으로 분석한다. 원전 기술 개발 계획의 방향, 부지 선정의 실패, 안전 규제 및 수요관리의 저발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원전체제의 균열이 봉합되는 과정을 살펴봐야 한다.
제5장에서는 원전체제가 신자유주의의 확산과 반핵운동의 도전을 이겨낸 과정을 되짚어본다. 우선 전력산업 구조조정의 위기 속에서 전력공기업집단이 해체되지 않은 이유와 원전 수출동맹이 부상하게 된 맥락을 살펴본다. 다음으로 지역반핵운동으로 인해 원전 추진에 제동이 걸리면서 정부가 분할포섭 전략을 도입하게 된 과정을 상세히 추적한다. 마지막으로 원전체제의 재안정화의 산물로 형성된 혼종적 거버넌스의 특징과 한계를 정리한다. 더불어 기술추격과 원전 수출로 상징되는 원전체제의 성공의 한계를 따져볼 것이다.
제6장은 비교역사적 시각에서 한국 원전체제의 발전 경로를 분석한다. 이를 위해 원전 산업구조와 규제양식을 유형화한 뒤 미국과 독일, 영국, 프랑스, 일본, 한국의 원전체제를 비교한다. 그리고 원전 산업구조와 규제양식의 상호작용 속에서 각국의 원전체제가 분기된 과정을 살펴본다. 이를 통해 ‘공적 보조’가 한국 원전체제의 통합성을 유지할 수 있는 배경임을 밝히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제7장에서는 후쿠시마 사고 이후 한국의 원전체제를 진단한다. 먼저 후쿠시마 사고 이후 탈핵운동이 확산되면서 원전 산업구조와 규제양식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살펴본다. 이어서 문재인 정부의 탈핵에너지전환 정책과 원자력계의 저항을 개괄하고, 신고리 5·6호기 공론화를 탈핵정치의 시각에서 분석한다. 이를 바탕으로 원전 산업구조와 규제양식의 측면에서 탈핵에너지전환으로 가기 위해 풀어야 할 과제를 짚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