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본문에 앞서 드리는 글
대학에서 국어학을 전공한 국어학도가 졸업 후 「말공장」이라 불리는 방송국 가운데 종가(宗家)격인 KBS의 아나운서가 되었습니다. 이 책은 국어학을 머리로 배운 젊은 국어학도가 KBS라는 한 직장에서 아나운서라는 한 직종으로 방송현장에서 몸으로 느끼면서 배운 실용국어에 관한 글입니다. 입사 후에는 선배님들의 도제교육으로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앞으로 우리 국어의 정책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써본 국어 백서(白書)라면 지나친 표현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느니라.’ 인류의 역사 이래 인간은 일상에서 말을 하면서 살고 있으니 인간의 제일 조건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생각이나 꿈속에서 말을 할 때도 있습니다. 사람의 평생에서 글씨를 쓰는 시간과 말하는 시간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또한 선진 국민의 조건 가운데 하나는 올바른 자기 나라의 말을 할 줄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더구나 사회 각층의 지도급 인사가 되려면 더욱 그러합니다. 전 세대에서 문자를 모르셨던 할머니들 가운데는 후천적 교육의 결정(結晶)인 무형문화재급의 품격 있는 말씨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학식이 풍부한 현대인에게서는 말다운 말을 듣기가 어렵습니다. 예전의 가정교육은 곧 말교육이었던 바 오늘날에 와서는 그 역할을 방송이 한다고 보아도 무리한 생각은 아닐듯합니다.
말씨는 사회계급 또는 인간계급과 정비례한다는 통념을 보여주는 특이한 영화에 『My fair lady』가 있었습니다. 내용은 언어학자인 히긴스 교수가 하층계급의 여인(오드리헵번 주연)을 언어교육으로 우아하고 세련된 귀부인으로 만들 수 있다는 계획을 세우고 친구와 내기를 하는 내용입니다. 결국 발음교육의 성공으로 이상적인 여인상으로 변신시킬 수 있게 됩니다.
한 사람의 말씨는 그 사람의 「마음의 소리」라고 하는 바 말 교육은 언어학이외의 다른 철학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독일의 철학자 피히테는 「사람이 말을 만들고 말이 사람을 만든다.」고 하였습니다. 최근에 부쩍 황폐해진 국민들의 언어생활과 심성을 걱정하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이러한 국어의 우국지사(?) 가운데는 저와 같은 방송인의 책임이 크다고 쓴 소리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저는 이렇게 응대합니다. 해방 이후 제도권 국어교육에서 발음교육이 없었다는 사실을 먼저 들려줍니다. 이런 교육을 받지 못한 프로그램 제작자들이 사명감을 가질 수 있겠으며 표준발음을 지키려는 아나운서들이 오히려 비정상적인 방송풍토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국방송 거의 모든 채널의 소음수준의 심각한 오디오 레벨(Audio Level)을 제가 스스로 지적하기도 합니다. 빈도수가 잦은 방송말 가운데 「㉠일본에 사과를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사ː과(謝過)/사과(먹는~), ㉡‘문제인 데통령’→‘문재인 대ː통령’」이렇듯 무심하게 방송을 하는 ‘문제인(問題人) 방송인’이 현 한국방송을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어의 심각한 붕괴는 국어학자의 견해로는 1970년 유신 독재시절 대중 인기 영합정책(Populism)의 하나인 한글전용주의 정책을 중요한 원인으로 봅니다. 그리고 방송학자의 시각(視覺)에서는 1980년대 전두환의 신군부 시절 우민(愚民)정책의 일환으로 컬러TV의 등장과 함께 시청률을 높이기 위한 언어훈련이 안 된 외부출연자의 무분별한 등장을 들고 자 합니다.
이 무렵 오염과 훼손되어 가는 방송언어를 우려하는 시청자들의 빗발쳤던 항의전화에 방패막이로 1983.4월 아이러니(Irony)하게 탄생된 조직이 KBS한국어연구회입니다. 당시 국어학계의 원로(元老)이셨던 이숭녕, 허웅 박사와 중진(重鎭)교수 그리고 현역 아나운서들이 회원이 되어 산학(産學)협동의 정신으로 손을 잡고 일하니 한국어의 새로운 지평(地平)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정신이 반영된 제도가 오늘날의 KBS한국어능력시험으로 신입사원(아나운서·PD·기자)들의 입사 후 실제 방송을 위한 시험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어떤 연유에서인지 음성언어(방송언어)를 도외시한 문자언어위주의 마치 신문사의 시험처럼 되었습니다. 이러한 국어정책의 현실에서 한국의 방송은 프로그램 제작수준과 방송장비의 선진국이 되었지만 방송언어에서는 후진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그른 소리 나는 대로 적꼬 잉는 펼리한 문짜이다/한글은 소리 나는 대로 적고 읽는 편리한 문자이다」국어맞춤법 제1장 제1항 「한글 맞춤법은 소리 나는 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을 원칙으로 한다.」는 규범은 한국어의 표기와 발음법의 헌법 1조입니다. 소리 나는 대로 적으면 뜻을 알 수 없어 소리 나는 대로 적지 않는 것을 「표의주의(表意主義)/형태주의(形態主義)」라고 하는데 표기대로 읽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반면 「태양·땅·바다」처럼 소리 나는 대로 적는 경우를 「표음주의(表音主義)」라고 하며 쓰인 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세계의 언어에는 표기와 발음이 일치하지 않는 언어(영어, 프랑스어, 일본어의 한자(漢字))와 표기와 발음이 일치하여 발음 부호가 필요 없는 언어(독일어, 이태리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로 나누어집니다. 한국어는 위의 규범에 따라 약 40%가 표기와 발음이 일치하지 않습니다.(필자의 가설(假說)) 이러한 한국어의 특성상 반드시 발음교육이 있어야 함에도 한글우월(優越)주의에 따른 국어 만능주의로 해방 이후 이러한 교육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2018년도 국정초등학교 국어 교과서(4학년1학기 국어활동 53p, 63p)에 「한라, 칼날, 신라, 생산량, 훈련, 의견란, 물난리, 등산로」, 「밥 먹을[머글]시간, 찾은[차즌], 낳았다, 좋아요, 닿았다, 놓아라, 많아서」처럼 한국어는 표기와 발음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명제(命題)를 밝히고 있습니다. 내년도에는 5·6학년 교과서에도 이러한 내용이 실릴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러한 계기는 마치 어린이 조기 영어 발음교육인 phonics를 통해 표기와 발음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언어의 특성을 영어를 통해 깨우친 것 같기만 합니다. 그러나 1990년도 초등학교 국어 「말하기·듣기」교과서에서 모처럼 실시되었던 발음교육이 실패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당시 KBS한국어회원이었던 필자가 문교부 당국자에게 간곡한 건의를 한 바 있습니다. 현직 초등학교 국어교사 자신이 발음에 대한 지식이 없으니 KBS의 남녀 아나운서들이 표준 발음을 무료로 녹음하여 보급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공무원들의 상투적인 예산타령으로 무산(霧散)되고 말았습니다.
국민 누구나 TV 방송에 출연할 수 있으나 고정 진행자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평생 TV에 단 한 번도 출연하지 않으신 전설적(?) 국어학자 한 분을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저에게는 대학에서의 가르침 이전에 중학교 때의 은사이셨던 이기문(李基文) 선생님이십니다. 우선 중학생 때의 첫 기억은 「선생님은 영화배우」였습니다. 그리고 수업의 내용 가운데는 「영어는 표기와 발음이 일치하지 않는 언어입니다./국 끓여먹는 ‘아욱’은 근동(近東)지역에서 온 외래어입니다.」 중학생인 저에게는 과분한 수업내용이었습니다. 이기문 교수는 세계 언어학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우리말과 함께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몽고어, 터키어로써 국어를 연구하신 1세대 세계적인 국어학자이십니다. 대학 졸업 당시에는 프랑스의 언어학자 「도자」의 「언어학개론」을 번역하시기도 했습니다. 일찍이 선생께서는 ‘방송 출연자가 국어에 미치는 영향이 막중하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언어의 속성(屬性)을 언행일치로 보여주신 이 일화(逸話)가 과연 현 방송인들에게는 어떻게 다가갈지 모르겠습니다.
한글전용 국어정책은 한자 배척의 대결주의이며 한자혼용의 국어정책은 한글과 한자를 두 날개로 쓰자는 평화주의입니다. 세종께서는 훈민정음의 어느 글에도 한자를 쓰지 말자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세종대왕께서는 훈민정음을 창제하셨으며, 큰 글이라는 뜻의 한글은 백 여 년 전 초애국주의 정신의 신조어입니다.
이러한 70여 년 간의 「문자전쟁」은 세계 어느 나라의 언어학사(言語學史)에도 없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처럼 통일이 안 된 남한의 언어정책의 현실에서 앞으로 남북한 간의 언어 이질화(異質化) 극복문제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한글전용의 국어정책에도 불구하고 초등학생들의 불법(?) 한자 과외 학습서인 「마법천자문」이 베스트셀러인 현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특히 고려대 문과대학(2004년부터 한자2급 취득)과 중앙대(2014년부터 한자3급 취득)의 한자 필수교육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 인하대는 전교생이 필수교양과목으로 한자교육을 이수해야 합니다. 마치 일제 때 구정(舊正)의 설ː을 억압해왔으나 오늘날 되살아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Paris」를 미국에서는 [패리스], 프랑스에서는 [빠리]라고 하니 알파벳(Alphabet)은 구미(歐美) 여러 나라의 문자입니다.
‘한자(漢字)’를 한국어에서는 [한ː짜], 중국에서는 [한쯔], 일본에서는 [간지]라고 하듯이 이제 한자는 동북아(東北亞)의 문자로 보아야합니다. ‘먹는 빵(포르투갈)’, 학생들의 ‘가방(네덜란드)’, ‘아파트(미국)’라는 외래어는 당연시하면서 왜 굳이 국어 어휘의 70%를 차지하며 국어의 근간(根幹)이 되는 한자만을 배척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나라는 천여번의 외세의 침입과 일제(日帝) 36년간의 민족 트라우마로 「다름」을 「틀림」으로 치부하는 민족성 때문은 아닐까라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DNA가 된 소아병적인 배타(排他)애국주의입니다. 프랑스는 모자이크(Mosaic)의 다수민족으로 2018년 월드컵 우승은 「다름」을 포용한 민족성의 개가(凱歌)로 보고 싶습니다.
어린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 나팔꽃(Morning glory)을 인도의 꽃, 달맞이꽃(Evening primrose)을 남미의 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외국에서 우리나라에 귀화한 꽃이 50%에 가깝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온 다문화 이주 여성들은 한국인의 며느리들입니다.
현 한글전용 국어정책과 한자혼용 국어정책, 그리고 예문3)에서 필자의 견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야구경기에서 선발투수는 감독이 경기 전날 선발한다.
2) 野球競技에서 先發投手는 監督이 競技 전날 選拔한다.
3) 야ː구경ː기에서 先發투수는 감독이 경ː기 전날 選ː拔한다.
1)의 경우는 한글전용주의의 글로 한자는 물론 발음 부호도 없어 뜻이 쉽고 온전하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2)의 경우는 한자혼용주의의 글로 우선 한자가 지나치게 많아 독서의 효율성이 떨어지며 한자의 생명인 장단(長短)의 성조(聲調)를 도외시(度外視)하고 있습니다. 3)의 경우는 뜻에 변별력을 주는 어휘에만 한자를 쓰되 표준발음법 제1장 제1항의 「국어의 전통성」을 살려 장음을 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문3)은 한자의 빈도(頻度)도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적당(適當)」은 「중도(中道)」와 동의어(同義語)로 인간이 발견한 극(極)과 극을 피한 궁극의 평화주의의 개념입니다.
미국의 CNN 방송이 최근 전세계 언어의 악센트를 중심으로 발음현상을 조사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한글에 대해서는 배우기 쉬운 문자의 우수성은 인정하되 「듣기 좋은 국어는 아니다」라는 지적에서 우리는 현 국어정책을 새삼스럽게 생각해 보아 야 할 것입니다. 미국의 표준어는 언어학적으로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백인 개신교도)들이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TV English」라고 합니다. 방송인으로서 참으로 부러운 현상입니다. 흔히 과거에는 방송에서 아나운서의 역할을 으뜸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아나운서는 필요 없다는 극단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방송을 사려 깊게 생각하는 사람은 방송에서의 아나운서의 존재는 절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독일의 방송을 재미없다고 하는데 방송의 순기능(順機能)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한때 일본의 NHK의 사시(社是)였던 「1) 귀신같은 보도, 2)부처님 같은 교양, 3)꽃같은 오락프로」는 영원한 공영방송의 황금률(黃金律)로 보고 싶습니다. 과연 이런 수준의 고급 방송을 오늘날 이른바 「잘 나가는 방송인」들이 할 수 있겠는가. 1980년 신군부시절 이래 아나운서가 방송참여에 무시당해 온지 어언 38년, 대부분의 아나운서들은 소외감에 싸여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송 풍토에서도 SBS의 작년도 아나운서 응시생은 4천여 명, 금년은 500명 적은 3천5백여 명, 이 가운데 ‘군계일학(群鷄一鶴)’격으로 단 2명만이 합격되었습니다. 과연 이런 경쟁률의 직업이 세계의 어느 직장에 있겠습니까. 현재 서울 본사KBS아나운서실에는 100여명의 정예(精銳)아나운서들이 여러 라디오 채널의 음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과연 시청자들은 전 채널의 TV방송에서 몇 명의아나운서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까. K-POP에 이어 방탄소년단이 세계 대중음악세계에 스타로 떠올라 유엔에서 연설까지 했습니다. 이들은 현대외교에서 중시하는 「연성(軟性)권력/Soft Power」의 성공 신화(神話)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스턴트 뮤직(Instant Music)이 사랑을 받는다 할지라도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고전음악세계는 인류와 함께 영원할 것입니다. 아나운서의 순수(純粹)한 음성언어(Spoken Language)인 음악성의 아나운싱은 후자의 영역입니다.
「순수는 생명이 길다.」하였습니다.
이 책은 그림으로 국어의 특성을 쉽게 설명한 최초의 ‘그림국어책’으로 독자 여러분의 많은 사랑을 받고 싶습니다.
이 규 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