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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세계사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세계사

  • 신상목
  • |
  • 뿌리와이파리
  • |
  • 2019-04-22 출간
  • |
  • 400페이지
  • |
  • 152 X 215 mm
  • |
  • ISBN 978896462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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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자신의 역사’를 알고자 한다면 ‘타자의 역사’를 공부하라!
한국에서는 역사를 국사와 세계사로 분리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자신의 역사’인 국사는 역사의 ‘왕관보석(crown jewel)’과 같은 존재로 각광받지만, 세계사는 자국 역사와 연관성이 미약한 ‘타자의 역사’로 인식되어 관심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다. 서울대 입시에서 3%의 수험자만이 세계사를 수험 과목으로 선택한다고 한다. 인문학 붐 속에서도 세계사는 상대적으로 찬밥 신세이다. 이 지점에서 의문 하나. 역사를 자신의 역사와 타자의 역사로 분리해서 인식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또는 바람직한 것인가? 이 책에 의하면 답은 ‘아니오’이다. 직업 외교관 출신의 저자는 외교관 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 사회가 고립되고 폐쇄적인 역사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역사는 서로 다른 문명 간의 인력(引力)과 반발력이 상호 작용하는 양방향의 진화 과정이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역사를 알고자 한다면 타자의 역사를 알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책 전편에 걸쳐 자신의 주장을 독특한 구성으로 전개한다.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세계’의 역사 감각을 전달하기 위해 일본의 유럽 교류사를 일종의 가상 체험 교재(敎材)로 활용한다는 아이디어이다. 저자는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중반에 걸친 한 세기 동안 생각보다 강한 변화의 추동력을 동반한 농밀한 이문명 간 교류가 일본 땅을 무대로 펼쳐졌다고 주장한다.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일본-유럽 간 교류의 연원과 과정이 흥미를 자아내고, 당시 조선에는 누락된 유럽의 동아시아 진출 역사를 일본을 통해 간접 체험하는 재미도 신선하다. 일본을 흔히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한다. 그러나 한국인에게 일본은 ‘잘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잘 모르는 나라’인 측면도 있다. 그동안 피상적이나 단편적으로만 알려졌던 근세 초기 일본과 유럽의 만남을 생생하게 전하는 다채로운 역사적 사건과 그를 세계사적 맥락에서 조망하는 배경 설명은 동아시아 역사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유용한 정보가 될 듯하다.

서구는 왜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는가?
책의 또 하나의 특징은 유럽이 일본에 오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유럽의 역사를 압축하여 살펴본 점이다. 저자는 일본-유럽 교류사를 세계사의 맥락에서 조망하기 위해서는 ‘유럽은 왜 일본에 왔는가’, 그리고 ‘유럽은 어떻게 일본에 올 수 있었는가’라는 근원적 의문에 대한 답을 먼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2000년에 이르는 유럽 역사를 축약하면서 저자는 결과가 아니라 동기와 과정에 서사의 강조점을 둔다. 저자는 중세 후기까지 대등한 수준이었던 동아시아 문명과 유럽 문명이 분기한 것은 문명의 ‘수준’이 아니라 ‘욕망’의 차이였다고 주장한다. 즉 동아시아는 서방 진출에 흥미가 없었지만, 유럽은 어떠한 고난과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동방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강한 의욕이 있었으며, 이러한 욕망의 차이가 두 문명이 서로 다른 발전 경로를 진행하게 되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유럽의 동방 진출을 견인한 동기를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에 빗대어 ‘료料, 금金, 신神’이라는 키워드로 풀어내는 발상이 흥미롭다.

대항해시대라는 인류 문명사의 일대 전환이 유럽에서 촉발된 과정을 근대 유럽 문명의 요체인 각종 기술적·도구적 성취를 중심으로 살펴본 것도 이 책의 서사를 입체적이고 풍부하게 하고 있다. 100여 쪽에 유럽 문명사 전부를 담을 수는 없겠지만, 복잡하고 어렵게만 여겨지던 유럽의 역사를 대항해시대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머릿속에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외교관 출신 우동집 주인장’, 대항해시대와 일본을 말하다
저자의 전작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가 전직 외교관의 시각으로 일본의 근대화 성공에 기여한 에도시대를 사회문화적으로 해부했다면, 이 책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형성하는 기본 틀을 만든 대항해시대 일본과 유럽의 농밀한 교류의 역사를 훑어낸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 책의 목표를 일본이라는 무대에서 벌어진 동?서양 간 만남의 주요 장면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놓음으로써 독자들이 이異문명 간 교류의 원리와 과정을 보다 생생한 임장감臨場感을 느끼며 감상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가까운 이웃나라 일본의 사례를 일종의 가상현실(VR) 디바이스로 삼아 한반도에서 누락되었던 역사적 경험을 간접 체험하는 이미지 트레이닝을 해보자는 것이다.

책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어려울 수도 있는 내용을 빠른 정보 처리가 가능한 스토리텔링으로 구성하거나, 마치 유튜브 동영상을 보는 듯 텍스트가 이미지화되어 정보가 처리되는 인상을 주는 서사 스타일도 인상적이다. 젊은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역사교양서를 쓰고자 했다는 저자의 고민과 노력의 흔적이 곳곳에서 엿보인다. 외교현장에서 느낀 경험과 자각이 바탕이 되어 형성된 탓인지 책 전편에 흐르는 저자의 역사관은 현실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이다. 책을 읽다보면 잔인하리만치 냉엄했던 국가관계의 역사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과연 현대 국제사회는 그러한 속성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 것인지,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질문이 이어지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재미의 하나이다. 복잡하고 다층적인 관계망 속에서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역사의 원리와 과정을 독자와 공유하고 싶다는 저자의 희망이 흥미로운 소재와 흡입력 있는 문체에 잘 배어 있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책속으로 이어서]

포르투갈인들이 가져온 아르케부스와 불랑기포佛朗機? 등의 총포류로 촉발된 화약 수요는 남중국과 일본 간에 상호 비교우위 품목의 교역 확대 유인誘因을 제공하였다. 공무역이 제한된 환경 속에서 왜구들에 의한 사무역 또는 밀무역은 교역 이익 실현을 위한 중요 수단이었다. 규슈 지방의 다이묘들은 유력 왜구집단을 가신화家臣化하면서 능력 본위로 경제적·신분적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이들의 해상 활동을 후원하였다. 뎃포 전력화의 핵심인 화약의 경우, 일본 규슈 지역에서는 고품질의 유황이 생산되었으나, 일본인들은 초석 생산능력이 없었다. 반대로 중국 남부 해안 지방에서는 초석이 생산되었지만, 그곳의 화약 제조업자들은 질좋은 유황을 확보하는 데 애로를 겪고 있었다. 공무역체제하에서는 양자 간의 거래가 성립될 수 없었으나, 왜구는 그 체제를 우회하여 거래를 성사시키는 촉매 역할을 하였다. (……) 이처럼 일본은 16세기 중반 이후 형성된 동아시아의 비공식 해상무역망에 한 꼭지로 편입되면서 예전에는 꿈도 꾸지 못하던 전략물자를 무역을 통해 입수할 수 있는 환경을 맞이한다. 일본의 뎃포 전력화는 그 환경 속에서 이루어진 일종의 전략적 ‘아웃소싱’의 결과물이다. 외부와의 통교通交를 통해 가용해진 자원을 결합하여 즉각적 전력화를 기하는 한편, 기술의 흡수와 내재화를 꾸준히 병행한 것이 기존의 폐쇄체제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속도와 효율성으로 달성한 부국강병의 비결이었다. 신문물을 이념으로 배제하기보다는 이용가치로 평가하고 개방적 태도로 수용한 실리주의가 그 바탕에 깔려 있었다. (190~194쪽)

센고쿠시대의 피비린내 나는 투쟁 속에서 규슈 일대의 다이묘들은 군사적·경제적 힘을 기르기 위해 전력을 경주하고 있었다. 이러한 전략적 환경하에서 눈앞에 나타난 포르투갈인들은 배척의 대상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세력에 결부시켜야 하는 포섭의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그것이 여타 동아시아국과 일본이 가장 대별되는 점이다. 다이묘 간에 기독교 개종을 마다하지 않으면서까지 유럽 세력을 자기 편으로 만들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질 정도였다. 오다 노부나가는 유럽 세력과의 통교와 신문물의 적극적 도입을 통해 천하통일의 꿈을 이루려 한 대표적 존재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에 접어들어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등 기독교 포교 세력을 추방하고 일본이 원하는 형태와 방식의 교류에 동의한 네덜란드의 팩토리만 데지마에 남겨두었다. 데지마가 위치한 나가사키는 대對유럽 문물 교류의 관문이자 난학蘭學의 중심지로서 200여 년 동안 일본이 세계를 접할 수 있는 ‘통로gateway’가 되어주었다. (210~211쪽)

1582년 2월, 예수회 신부 알레산드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의 인솔하에 일본인 소년 4명이 나가사키항에서 마카오로 향하는 포르투갈의 카라크선에 몸을 싣는다. 이토 만쇼, 치지와 미구엘, 나카우라 줄리앙, 하라 마르티노 등 4명의 소년은 로마 교황과 에스파냐·포르투갈 국왕을 알현하고 일본 선교를 위한 정신적·경제적 지원을 요망하는 사절단으로서 의 임무를 부여받고 있었다. (……) 이들은 인도양과 아프리카 대륙을 두르는 2년 반의 여정 끝에 1584년 8월 리스보아에 도착하여 본격적인 유럽에서의 활동에 나선다. 그해 11월에 에스파냐의 마드리드에 도착하여 펠리페 2세를 알현한 후 지중해 동쪽 로마를 향한 여정을 계속한다. 이듬해 3월 이탈리아반도에 상륙하여 르네상스의 본고장인 토스카나 대공국의 군주이자 메디치가의 후예인 프란체스코 1세를 알현한 후, 3월 말 꿈에 그리던 로마에 입성한다.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이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일본 땅에서 복음이 전파되기를 축원祝願한다. 교황의 옥음玉音은 소년들에게 신의 목소리나 다름없었다. 공교롭게도 소년사절단을 접견한 지 3주 후 그레고리오 13세가 선종한다. 후임으로 식스토 5세가 새로이 교황에 선출되자, 마침 로마에 머물던 소년사절단도 새 교황의 대관식에 초청되어 참석하는 영광을 누린다. 지구상 가장 동쪽 끝에서 꼬박 3년을 걸려 천신만고 끝에 로마를 방문한 소년들이 겪은 일들은 가히 기적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212~214쪽)

이때 이에야스가 믿는 구석이 서양의 대포였다. 당시 도쿠가와 측 동군은 영국제 컬버린포 4문과 세이커포 1문, 네덜란드제 대포 십수 문을 보유하고 있었다. (……) 1614년 12월 동군은 오사카성 포격을 위한 전술 지점을 확보한 후, 오사카성에 집중 포화를 퍼붓는다. 기존의 대포라면 가능하지 않았을 거리에서 포탄이 퍼부어지자 도요토미 측 서군의 지도부가 크게 흔들린다. 특히 권력의 심장부인 혼마루本丸가 포격으로 파손되고, 그로 인해 히데요리의 모친이자 실질적 최고 권력자였던 요도도노淀殿의 측근 중에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히데요리 측은 이에야스의 화의和議 제의를 수용하는 쪽으로 방침을 선회한다. 농성전을 벌이던 세력이 장거리포에 의해 성의 방어력이 해체되는 순간, 전쟁의 승패는 기울기 마련이다. 이에야스는 조금이라도 유리한 조건에서 화친을 맺고자 교섭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포격을 늦추지 않았다. 결국 이에야스가 원하는 조건으로 화친이 체결되었고, 이때의 화친이 화근이 되어 도요토미가는 멸문의 길을 걷게 된다. 후세에서는 히데요리의 화친 선택을 두고 유약한 유화정책이 멸망을 초래한다는 교훈의 스토리로 인용하고는 하지만, 이미 첨단무기 확보에 심혈을 기울인 이에야스의 필승 전략 앞에서 히데요리가 항전 의지를 다진다고 해서 전세를 뒤집기는 역부족인 상황이었다. (262~264쪽)

최근의 연구는 이에야스가 애덤스를 총애하며 서양식 선박 건조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 배경에 그의 원대한 외교 구상이 있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강경외교로 인해 주변국과 불편한 관계에 놓인 상황을 타개하고자 했다.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조선, 필리핀, 타이, 캄보디아, 베트남 등에 사절을 파견하여 선린관계 수복을 원하는 친서를 전한 것도 그러한 맥락이다. 이에야스는 특히 필리핀·멕시코와 통상관계를 수립하는 데에 관심이 많았다. 이에야스는 자신의 권력 기반 강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함을 잘 인식하고 있었고, 새로운 교역 루트를 개척함으로써 공고한 경제 기반을 확보하고자 했다. (……) 당시 세계의 정세와 지리에 능통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은 그랜드 플랜이었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거치면서 일본 권력자가 서양 세력과의 교류를 통해 습득한 정보와 세계관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이르러 집대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67~268쪽)

유럽의 소국 네덜란드는 어떻게 근대 자본주의의 기원을 이루고 전 세계로 뻗어나가 최강 해상국가로서 군림하면서 ‘황금시대The Dutch Golden Age’를 구가할 수 있었을까? 네덜란드의 약진은 조금 색다른 차원에서 그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다. 오늘날 인구에 회자되는 ‘유대인의 세계 금융 영향력’이라는 현상은 네덜란드의 부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질문을 바꿔, 박해받는 소수민족에 불과했던 유대민족이 어떻게 전 세계적으로 큰 영향력을 갖는 집단이 될 수 있었을까? 첫째 질문과 둘째 질문은 동전의 양면관계에 있다. 17세기 이후 네덜란드의 성장과 자본주의의 확산이 유대민족의 운명을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303쪽)

1602년, 암스테르담에서 VOC 출범에 맞춰 지난 수십 년간 진행된 증권 기반 상업 프로젝트 기법을 집대성한 암스테르담 거래소Amsterdam Bourse가 개장한다. 세계 최초의 ‘공개’ 증권거래소라 불리는 곳이다. 이제 회사의 소유권은 분할된 증권으로 존재하게 되었고, 그 증권을 소유한 사람은 자발적 거래를 통해 수익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사유재산제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이전까지 모든 투자는 회사 자체에 대한 것이었고 회사의 실적에 따라 손익이 결정되었지만, 거래소의 성립으로 증권 소유자는 회사의 실적과 관계 없이 증권 거래만으로도 수익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수익을 올릴 수도 있고 손실을 볼 수도 있지만, 기존에 왕이나 귀족 또는 대부호 상인만 소유할 수 있던 생산수단을 약간의 돈만 있으면 누구라도 소유할 수 있게 되고 임의로 처분할 수 있게 된 것은 그 자체로 혁명적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증권거래소 성립에 의한 부의 창출·분배 메커니즘은 정치적 권위가 생산과 분배를 결정하던 시대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각 주체의 자율적 경제활동 영역을 확대하였다. (294~295쪽)

데우스호 사건 이후 1년 만에 포르투갈의 사절이 일본을 찾아 손해 배상을 요구하였으나, 일본은 이 모든 불상사가 페수아의 오만과 무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포르투갈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 네덜란드의 부상浮上으로 동아시아에서의 제해권이 위협받는 전략적 환경 변화를 맞아, 포르투갈로서는 가장 중요한 전통적 교역 상대의 하나인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굳건히 유지하는 것이 매우 긴요한 상황이었다. 기존의 우월적 지위를 어느 정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네덜란드를 견제하기 위한 전략적 관점에서 일본에 접근하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였으나, 한 세기 동안 최강 제국으로 군림한 포르투갈의 자존심은 정확한 정세 판단을 방해하였다. 반면, 포르투갈의 대항마로 떠오른 네덜란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불신의 앙금이 남은 일본-포르투갈 관계의 틈을 파고들었다. 네덜란드가 일본에 접근하는 방식은 포르투갈과는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국가(또는 왕실)가 아니라 수익 창출에 최우선 목표를 두는 상업조직인 동인도회사가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취한 순응적 태도와 실용적 접근은 일본과의 교역관계 수립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유럽과의 교역을 원하되 기독교를 배척하고자 하는 막부의 의향에 이보다 더 잘 들어맞는 교역 파트너는 없었다. (325~326쪽)

펑후다오 해전은 성채만 한 VOC 함선에 조각배 같은 명 군선 수십 척이 달려들다가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지는 어린아이 손목 비틀기 싸움이었고, 세상의 중심을 자부하던 명은 깊은 좌절감을 맛봐야 했다. 남거익은 조정에 올린 상계에서 “홍모인紅毛人(서양인)의 배는 대단히 크고 그 함포는 10리 밖에서도 중국 군선을 한 방에 조각내버리는 가공할 위력”이었다고 놀란 심정을 적고 있다. 그러나 기술 문명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알리는 이때의 교훈은 중국의 변화를 촉발하는 데 실패한다. 1840년 아편전쟁을 겪은 이홍장李鴻章은 이렇게 기록한다. “오늘날 목도하고 있는 홍모 외적(영국)의 침입은 중국 3000년 역사에 전례 없는 일이다. 이토록 강력한 무력武力과 화력火力을 지닌 외적은 지난 1000년간 중국이 경험해본 적이 없으며, 이들은 중국이 감당할 수 있는 적이 아니다.” 펑후다오 전투 이후 200년의 세월이 무색한 뒤늦은 한탄이었다. (349쪽)

1632년 9월, 스벡스는 노위츠의 신병을 일본에 인도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한다. 1627년 이래 양측 간에 빚어진 갈등을 VOC가 아니라 노위츠 개인의 불찰과 비행에서 비롯된 것으로 정리하고, 그 책임을 물어 노위츠의 처분을 일본에 맡긴다는 의미였다. 쇼군이 이에 만족을 표하자, VOC 인질들은 모두 석방되었고, 히라도 VOC 상관 활동도 재개되었다. 나아가 막부는 1634년 모든 일본 선박의 대만 도항을 금지함으로써 대만 무역을 둘러싼 VOC와의 갈등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 이러한 해결 과정에서 눈에 띄는 것은 스벡스의 외교술이다. 일본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는 문제의 핵심 당사자인 스에쓰구가 사망함으로써 이 문제가 이권 다툼의 측면과 일본 문화 특유의 명예 문제의 측면이 공존하게 된 것을 꿰뚫어보았다. 쇼군 입장에서는 규슈의 상인이건 벽안의 외국인이건 출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쪽이 자신에게 더 충성하고 이익을 안겨주느냐가 중요한 것이었다. 대신 쇼군도 주위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에 누구의 체면도 손상시키지 않고 일방적인 승리나 패배로 보이지 않도록 명예로운 퇴로graceful exit를 만드는 것이 문제 해결의 관건이라면 관건이었다. 스벡스의 노위츠 인도 결정은 당사자들의 명예는 지키고 과실은 덮음으로써 쇼군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묘안이었다. 이로써 VOC의 일본에서의 무역 이권은 재보장되고, 대만 영유권도 확보되었다. 잘 훈련된 외교관 한 명이 1000명의 군대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357~358쪽)

쇄국이라는 말은 사실 에도시대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쇄국정책이 역사 용어로 등장한 것은 메이지시대 이후로, 주로 막부의 교역 독점에 대한 비판적 의미를 담은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쇄국정책은 위정척사류의 단순한 고립주의 또는 이념적 외세 배척주의가 아니다. 무엇보다 유의할 점은 ‘쇄鎖’, 즉 쇠사슬로 결박結縛하는 대상은 번이지 막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막부의 쇄국정책은 ‘폐문閉門정책’이 아니라 막부가 사람·물자·정보의 대외 교류를 장악하는 ‘창구독점정책’으로 성격을 파악해야 보다 적확하게 그 의미를 음미할 수 있다. (……) 쇄국정책은 기본적으로 도쿠가와 막부의 임진왜란 전후戰後 처리 외교와 막번幕藩체제 수립의 상호작용 속에서 탄생한 통일국가 일본의 대외정책이다. (374~375쪽)


목차


책머리에

제1부 유럽이 동쪽으로 간 까닭
제1장 환상의 황금섬
제2장 료料: 향신료의 자극적인 유혹
제3장 금金: 황금 보기를 돈같이 한 문명
제4장 신神(상): 기독교의 절대사명
제5장 신神(하): 성전聖戰의 종교
제6장 성전기사단과 포르투갈
제7장 항해왕 엔히크
제8장 대항해시대의 서막
제9장 인도로 가는 길

제2부 유럽과 일본의 만남
제10장 다네가시마의 뎃포 전래
제11장 뎃포가 운명을 바꾼 두 전투
제12장 뎃포 전력화의 비결: 전략적 아웃소싱
제13장 동아시아의 팩토리
제14장 순교의 나라
제15장 항구의 나라
제16장 국제무역항 나가사키

제3부 새로운 시대와 쇄국
제17장 포르투갈 독점의 종언
제18장 해양강국 네덜란드
제19장 자본주의의 탄생
제20장 자본주의와 유대인
제21장 데우스호 폭침 사건
제22장 풍운아 로드리게스 신부
제23장 격동의 동아시아 바다
제24장 일본 무역을 둘러싼 각축전
제25장 통일 일본과 쇄국체제의 완성

도판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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