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를 시작하면서 내가 처음 주제로 잡은 것은 고려시기의 대간제도臺諫制度였다. 지금은 이 주제의 실체가 그런대로 밝혀져 있지만 1960년대 후반기까지만 하여도 연구가 미미한 상황이어서 어느 수준의 해명에만도 10여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런데다가 다들 알고 있듯이 대간제도는 정치의 핵심이 되는 조직의 하나였고, 따라서 왕권과 재추宰樞상서6부 등 국가를 운영해가는 중요 기구 인원들과 긴밀히 연결되게 마련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이들에 대한 이해에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고, 그 과정에서 정치권력의 특성과 고려사회 자체의 성격론 문제가 대두되면서 이들 주제의 논의에도 참여하였다.
그러다보니 주변에서는 나를 고려시대의 정치사 내지 정치제도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 치부하였고 그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특히 학생들 앞에서 강의를 해가는 동안 당시의 정치상황 뿐 아니라 당대인들이 무엇을 어떻게 먹고, 어떤 옷을 입었으며, 또 어떤 집에 살았는가 등등의 실제 생활상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를 해주지 못하는게 늘상 마음속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럼에도 바쁘다는 핑계를 구실 삼아 이 짐을 덜기 위한 준비작업은 정년을 앞둔 얼마전에야 시작하였다. 한데 정작 퇴직을 하고나서도 그동안 마무리를 짓지 못한 『고려시대사』의 증보 작업과 『고려사』 백관지와 선거지의 역주를 마치는데 또 몇 년간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나서야 기초 작업을 겸해 우선 『고려사』 여복지의 역주에 착수하였는데, 결과는 기대했던 것에 훨씬 미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용기만은 잃지 않고 결과물의 제목을 『고려시대 사람들의 의 식 주衣食住생활』이라 정해 놓고 모아온 자료들을 그에 맞추어 분류 정리하고 먼저 의생활衣生活에 대해 붓을 들었다. 그렇지만 얼마 못가서 나는 곧 좌절에 빠지고 말았다. 내용이 짐작했던 것보다 방대한데다가 나처럼 이 방면에 아무런 소양이 없는 처지에서 접근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중간에 포기할 수도 없어서 억지로 조금씩 추진해 갔는데 그러니 힘은 힘대로 들고 제대로 진척은 되지 않았다.
이에 즈음하여 나는 애초의 계획이 너무 무모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심 끝에 내린 방안이 식음食飮생활과 주거住居생활에 대한 것은 후일로 미루고 의복식衣服飾생활에 관한 것이나마 마무리지어 보자는 것이었다. 그 결과로 2017년 10월에 이르러서야『고려시대 사람들의 의복식衣服飾생활』 이라는 제목의 책자를 내놓을 수 있었다. 그나마 이 책은 의복식 자체의 제작이나 기술적인 문제 등은 거의 다루지 못하였고 다만 그를 통한 생활사의 이해에 도움을 얻어보자는 수준의 것이었다.
처음의 의복식에 대한 검토가 이같은 수준에 머물은만큼 다음의 식음食飮생활에 관한 천착은 다소나마 이보다 진척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거듭 살펴보아도 그렇지 못한 듯 싶어 상당히 당황스럽다. 다만 그런 가운데서도 좀 다행스러운 것은 이 방면에 관한 좋은 성과를 낸 선학 동료들이 있어 여러 모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다양하면서도 적지 않은 자료들을 점검하는데 이미 오래전에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고려대학교 대학원의 고려시대사 전공자들의 보탬도 컸다. 지금에 이르러 보잘 것은 없으나마 내가 뜻했던 『고려시대 사람들의 식음食飮생활』이 열매를 맺게 된 것은 이같은 배경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