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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수첩에 세상을 담다 2(1949-1951)

장면 수첩에 세상을 담다 2(1949-1951)

  • 허동현
  • |
  • 경인문화사
  • |
  • 2019-06-04 출간
  • |
  • 516페이지
  • |
  • 302 X 231 X 30 mm /1641g
  • |
  • ISBN 9788949948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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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운석雲石 장면(張勉: 1899-1966)은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한 후 1920년부터 5년간의 미국 유학을 통해 일제 식민지배 하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민족의 미래를 위한 교육사업과 가톨릭 전파를 통한 구령救靈활동에 있다는 생각을 굳혔다. 맨해튼대학 졸업 후 1925년 귀국한 그는 메리놀 외방전교회 사제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는 어학교사로 포교활동을 지원했다. ‘황국신민화’의 광풍이 몰아치던 1931년 동성상업학교 영어교사로 부임한 그는 『가톨릭청년』편찬위원, 동성상업학교 교장, 천주교청년회연합회 회장을 역임했다. 당시 그는 노기남盧基南(바오로, 1902-1984) 대주교를 도와 ‘조선총독부와 천주교를 중화’시키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중간에서 도맡아 방어하는 역할을 전담했다. 일제 식민지시대 가톨릭교단을 대표하는 교육자이자 지식인으로 활동한 그에게 1945년 해방은 정계 진출의 전환점이었다. 장면은 가톨릭 대표로 1946년 미군정 자문기관인 민주의원과 입법의원에 참여했으며, 1948년 5·10 선거에서 제헌국회 의원으로 당선됨으로써 정계에 몸을 담았다. 특히 그는 정부수립 직후 제3차 유엔총회 파견 수석대표로 임명되어 그해 12월 12일 신생新生 대한민국에 대한 국제적 승인을 획득했다. 1949년 1월 초대 주미대사에 발탁된 그는 6·25전쟁이 터지자 유엔군의 참전을 이끌어 내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지킨 외교관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이러한 업적에 힘입어 그는 1951년 1월 제2대 국무총리에 올랐다.
그의 민주의원·입법의원 진출과 제3차 유엔총회 파견 수석대표 임명은 각각 노 대주교의 추천과 바티칸의 지원을 이끌어내려 한 이승만(李承晩, 1875-1965) 대통령의 전략적 선택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초대 주미대사와 제2대 국무총리 선임은 가톨릭 배경에 더해 건국과 호국護國에 있어 발군의 역할을 한 외교관으로서의 성망聲望 즉 자신의 능력에 힘입은 것이었다. 기독교도였던 이승만이 가톨릭신자였던 그를 주미대사에 임명한 이유는 반공노선을 취하고 있던 미국 내 가톨릭세력의 지지 획득이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에 더해 승인외교를 통해 입증된 외교관으로서의 자질 및 미 정부측 인사들과의 사이에 구축된 신뢰관계가 고려된 것이었다. 제2대 국무총리 임명도 당시 미국과의 마찰과 국회의 반발에 직면해 있던 이승만 대통령이 국내외에서 호평을 받고 있던 그를 기용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하려 한 고육지책이었다. 하지만 취임직후 연이어 터진 ‘국민방위군사건’(1951)과 ‘거창양민학살사건’(1952) 수습과정에서 대통령의 독선적 행위가 꼬리를 물고 계속되자 1952년 4월 그는 총리직을 내려놓았다. 그가 정계에 복귀한 것은 1954년 제3대 총선에서 압승한 자유당이 그해 11월 ‘사사오입 개헌’으로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합법화하자, 이에 맞서기 위해 야권대통합에 나선 민국당과 무소속동지회 소속 의원들이 ‘호헌동지회護憲同志會’를 구성하면서였다. 그는 1955년 9월 흥사단계와 원내자유당계가 주축인 신파新派의 대표로서 한민당계와 민국당계가 주류인 구파舊派 인사들과 연합해 민주당을 결성했다. 이후 반독재 투쟁에 나선 그는 1956년 5·15선거에서 자유당의 이기붕李起鵬(1896-1960)을 20여만 표 차로 누르고 제4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1960년 3·15 부정선거에 분노한 학생들이 일으킨 4·19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붕괴하자 내각책
임제 제2공화국의 국무총리(1960-1961)에 올라 ‘민주주의의 황금시대’를 열었지만 5·16군사쿠데타로 9개월 만에 실각했다.

새로운 사료 특히 장면 같이 한 시대를 이끈 이의 체험이 담긴 기록의 공간公刊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의 진상眞相을 밝히고 오도된 통념을 바로 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먼저 이 책에 담긴 주미대사 시절 그가 남긴 사료들은 주미대사로서의 업적에 대해 재평가하게 하는 초석이 된다. 미국은 조선왕조가 최초로 문호를 개방한 서구 국가로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이래 서구제국 중 한국과 가장 긴밀한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다. 그러나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은 두 개의 상충하는 눈으로 미국을 보고 있다. 하나는 호의적인 시각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제를 몰아내고 해방을 가져다 준 세계 최강의 문명국이자 우리의 이해를 대변하는 최고의 우방으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민족의 주체적 역사발전을 왜곡하는 제국주의적 패권국가로 인식하는 것이다. 장면의 경우 전자에 속하는 시각으로 미국을 보고 미국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공헌한 초대 주미대사다. 대사로서 그의 업적을 평가하는 데 있어 전제가 되는 것은 해방 후 1950년대에 이르는 시기의 우리 역사를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평가가 달라진다. 즉, 한국현대사를 해방을 기해 남북한에 각각 친미 보수정권과 친소 공산정권이 대두하여 우리 민족의 주체적 역사 발전의 기회를 압살해 버린 암울했던 역사로 보거나, 남한의 경우 분단의 고착화를 배경으로 우익 독재정권이 반공을 내세우면서 그 기득권을 확대해 나가는 한편 대외적으로 미국의 종속국가로 전락해간 시기라고 본다면, 그의 역할은 비극의 민족사를 이끈 주역 중에 한 명일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를 퇴영·침체·좌절의 늪이 아니고 한국인이 자유·평등·민주주의 등 보편적 이상을 향해 전진을 재촉했던 시기로 보는 발전적 입장에서 조망할 때, 그리고 당시의 한미관계를 후원자와 수혜자, 침략자와 피침략자, 혹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로 보는 극단적 입장, 즉 한미관계가 미국의 일방적인 이익만을 위해 전개된 것이라는 시각을 탈피할 때 그가 주미대사로서 이룩한 업적에 대한 평가는 달라진다. 즉 우리의 필요에 의한 미국과의 유대 강화와 이를 통한 우리 국익의 실현이라는 관점에서 한미관계사를 본다면, 그는 미국과의 긴밀한 유대를 쌓고 이를 이용하여 역사상 최초로 서구중심 세계질서 속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는데 있어, 남한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는데 있어 결정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한 최대의 공헌자로 평가할 수 있다. 첫째, 그는 덜레스 등 미 정계 요인들과의 긴밀한 유대를 바탕으로 미국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신생 대한민국에 대한 유엔의 승인을 비롯한 미국주재 각국 대사관의 접촉을 통해 33개국의 개별적 승인을 얻어냄으로서, 조선시대 이래 ‘은자隱者의 나라’로 알려진 폐쇄성을 극복하고 유엔 등 국제무대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초석을 쌓았다. 둘째, 그는 한국에 대한 인식이 전무하다시피 한 미 정부인사에 대한 외교 활동과 함께 미 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순회강연과 언론매체 등을 통한 한국 알리기 작업에 매진함으로서, 미국 내에 호의적 한국관이 형성되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셋째, 그는 남북한 간의 군사적 불균형이 야기할 국방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필적하는 ‘태평양동맹’과 같은 집단안보체제의 도입을 구상하고 이의 실현을 도모한 바 있으며, 불의의 6·25전쟁을 맞아 미국과 유엔에 대한 외교활동을 통해 미국과 16개 유엔 회원국의 참전을 이끌어냄으로서 풍전등화와 같던 조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는데 기여했다.

다음으로 이 책에 실린 사료들은 정치가로서 장면의 리더십에 대해 재평가하게 하는데 기여 할 일급 자료다. 종래 학계의 통설적 견해는 정치가로서 장면이 ‘가톨릭적 배경과 영어실력’ 덕택에 피동적으로 정계에 진출하였으며, ‘강한 결단력과 즉각적 행동이 필요한 상황에서 상당한 정도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행동을 취한 ‘형식적 지도자로서 항상 수동적이고 자기 패배적인 행동 경로’를 취한 무능한 지도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제2공화국의 붕괴와 5·16군사쿠데타의 필연성 내지는 정당성을 옹호하려는 결과론적 시각에서 기인한 사후事後(post-factum) 해석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책에 실린 사료들에 보이는 그의 이미지는 통념에 반하기 때문이다. 과연 부정적 평자의 지적대로 장면은 ‘정계의 영원한 초대받은 손님’에 지나지 않는 나약한 지도자였을까?
1948년 대한민국은 단독 정부수립을 선포했지만 고립을 면하기 위해서는 국제적 승인이 필요했다. 또한 그가 주미대사로 재직 중 발발한 6·25전쟁도 남북한군의 전력 상 격차로 인해 국제적 지원이 없었다면 그 결과는 명약관화한 것이었다. 즉 신생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과 6·25전쟁 시의 유엔군 파병은 국가의 존립 그 자체를 좌우하는 중차대한 문제였으며, 이 과업의 성공적 완수는 장면 개인의 역량이 결정적으로 작용하였음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주지의 사실이다. 그는 정치가로만이 아니라 외교관의 세계에서도 초심자였지만, 국가의 존망이 걸린 문제를 훌륭히 해결함으로써 차후 한국을 이끌어갈 지도자로 부상한 것이다. 이러한 성과를 배경으로 그는 이승만 정부하의 제2대 국무총리, 민주당 최고위원이 되었으며, 1952년 미국이 세운 이승만 제거 계획인 ‘에버레디 계획(Plan Everready)’이 웅변하듯이 미국 측에게서조차 이승만을 대체할 한국의 차기 지도자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따라서 장면에 대한 부정적 선입관에 입각한 연구들이 정치가로서의 장면의 성장 요인을 그를 필요로 하는 정치세력에게 충분한 이용가치가 있는 경력의 소유자이면서도 그들이 마음대로 이용하기 쉬운 꼭두각시형의 ‘형식적’ 지도자이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설명하는 것은 재고를 요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는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과 6·25전쟁 시의 유엔군 파병을 이끌어 내고, 민주당 창당 이후 부통령으로 반독재 투쟁을 진두지휘하면서 쌓은 성망聲望을 바탕으로 미래의 한국을 이끌 차기 지도자로 성장한 인물로 합헌적 절차를 거쳐 집권한 정치가였기 때문이다.


목차


일러두기
화보
친필사료 2집 속간을 반기며 : 장익 주교
간행사 : 한홍순 운석장면기념사업회 이사장
책을 펴내면서 :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대한민국 탄생 직후의 외교활동(1949)
① 「초대 주미대사 장면 수첩(1949. 1. 1-1. 25)」
② 「대한민국 주미대사관 일지 : 대(對) 한국 언론계 보도안 초안의 일부(1949. 2. 7-7. 13)」
③ 「세계 각국의 대한민국 정부 승인 일람표」
④ 「한국외교 황무지 개척을 회고한다」

6·25전쟁 발발 전후의 호국 외교활동(1950)
① 「6·25전쟁 발발 이전 주미 대사 장면의 안보 외교활동(1949-1950)」
② 「태평양동맹 결성 외교 차 뉴질랜드·호주·필리핀 순방 일정(1950. 4. 10-5. 9)」
③-1 「무초 전문(1950. 6. 25)」
③-2 「주한 미국대사 무초가 국무부에 보낸 6·25전쟁 발발을 통보한 전문(電文)」
④-1 「6·25동란 발발 직후 긴급히 소집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장면 박사가 행한 호소연설문
(1950. 6. 25)」
④-2 「1950년 6·25동란 문제에 관하여 대한민국 대표 장면박사가 동년 9월 1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서 행한 연설문(1950. 9. 1)」
⑤ 「6·25 Story(1950. 6. 24-6. 30)」
⑥ 「미국의 한국전쟁 참가 경위(1950. 6. 24-1951. 3. 14)」
⑦ 「화부(華府)서 겪은 6·25」
⑧ 「6·25동란과 워싱턴」

미국의 소리(VOA) 방송원고(1949. 8-1950. 12)
① 1949년 8월 11일 방송원고 「8·15 국경일을 당하여」
② 1950년 1월 방송원고 「희망의 신년을 맞이하며」
③ 1950년 2월 방송원고(원조관련)
④ 1950년 6월 27일 방송원고(제2차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관련)
⑤ 1950년 6월 29일 방송원고(유엔군 파병관련)
⑥ 1950년 7월 5일 방송원고(유엔군 파병관련)
⑦ 1950년 7월 7일 방송원고(제3차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관련)
⑧ 1950년 7월 20일 방송원고(미 육군 증파 관련)
⑨ 1950년 8월 1일 방송원고(원조 관련)
⑩ 1950년 12월 28일 방송원고 「필승의 신년을 맞이하며」

제2대 국무총리 시절의 시정활동(1951)
① 「제2대 국무총리 장면 수첩(1951. 1. 4-12. 18)」
② 「이승만 대통령의 국무총리 임명서한(1950. 11. 11)」
③ 「제2대 국무총리 수락에 관한 이홍렬 비서관의 증언」
④ 「국회 귀국보고(1951. 1. 30)」
⑤ 「귀국 후 첫 대(對) 국민방송원고(1951. 2. 10)」
⑥ 「시정연설(1951. 2. 26)」
⑦ 「전국 특별 지방관 회의 국무총리 훈시 요지(1951. 3. 7)」
⑧ 「국토분할 반대성명(1951. 4. 3)」
⑨ 「한미동맹 등에 관한 애치슨 국무장관과의 논의(1951. 11. 19)」
⑩ 「하야유감(1952. 4. 20)」
⑪ 「부산정치파동 관련 장면의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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