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분권.균형.연대’를 위한 학문
지방재정론은 ‘지방’의 ‘재정’에 대한 이론과 제도에 관한 것이다. 지방과 재정의 두 가지 주제는 본질적으로 가치지향적이다. ‘지방’의 담론에는 분권과 균형의 가치가 있다. ‘재정’의 담론에는 효율과 책임의 가치가 있다. 두 가지 유형의 가치는 현실에서 양립하기 힘들다. 하지만 두 가지 가치가 동시에 실천되지 않으면 사회의 성장과 발전이 멈춘다. 이른바 ‘동그란 네모’,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는 도형체다. 사회는 그러한 것을 만들면서 한 단계씩 업그레이드됐다.
분권과 균형 그리고 효율의 동그란 네모
운동장에서 모든 선수가 동등하게 뛸 수 있는 제도가 정비돼 있으면 모두가 수용하는 생산적인 게임을 할 수 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는 어떠한 변명도 불균형의 결과를 설명하거나 정당화하지 못한다. 각자의 목소리와 자신감을 가지고 적당히 긴장하는 균형, 가끔 그러한 시대가 잠시 스쳐 지난다. 모순되게도 균형은 늘 불안정하다. 시소에서는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제일 힘들다. 하지만 균형이 만들어질 때 모두가 비전을 가지고 전체적으로 뭔가 큰 성과를 얻는다.
정부간 재정관계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형성되면 갈등과 상호 비방이 무성해진다. 과도한 집권 상태에 중앙정부는 국가 전체를 끌고 가느라 탈진한다. 일을 할 수 있는 기본 조건을 갖추지 못한 지방은 사회경제의 모든 문제 해결이 냉소와 방만에 머문다. 중앙도 지방도 모두 힘들다. 힘든 이유는 모두 안다. 하지만 실천은 안 된다. 실천의 동력과 플랫폼이 중요하다. 동등한 조건에서 공정하게 문제 해결 역량으로 경쟁할 수 있는 정부간 재정관계 플랫폼이 필요하다.
중앙정부의 과부하
지방재정론에는 보편적 사회 가치로서 자치분권이 전제돼 있다. 그것이 없으면 일반적인 재정학의 이론만으로 충분하다. 또 그것이 없으면 일반적인 행정학의 이론과 실무지식만으로 충분하다. ‘자율과 책임’의 가치가 정부간 재정관계 그리고 지역사회의 정치경제 활동에 전제가 될 때 독립적인 사회과학의 분과학문으로서 지방재정론이 자리를 잡을 수 있다.
지방자치는 주민의 희망 고문이 아니다. 중앙정치의 권력 도구도 아니다. 내일의 성장을 위한 핵심 열쇠다. 혼자 모든 짐을 짊어지는 중앙정부는 지금의 집권화된 방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체감하고 인정해야 한다. 2019년, 국회의 정치갈등 속에서 1만4천여 개가 넘는 각종 법률과 규제가 국회 심의에 걸렸다. 중앙과 지방 모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세종시 중앙관료들은 국회 배석에 지쳐 기본 업무 수행도 힘들었다. 언론은 국회만 비판했다. 문제는 국회가 아니다. 국가 중대사를 하나의 제도 기관에서 처리하는 집권화된 정부간 관계 플랫폼이 문제다. 국회에 입법 대기하고 있는 수많은 법률안에 연계된 재정사업을 대폭 지방으로 이양하면 지방주민의 눈높이로 다양하고 적실성 있게 문제 해결을 추진할 수 있다. 세종시 중앙관료들의 국회 배석 부담도 대폭 줄어들 수 있다.
중앙정부의 과도한 재정집권에서 발생하는 낭비는 정도를 지나쳤다. 하지만 중앙실패에 따른 예산 낭비의 반성이 없다. 중앙정부의 관료와 의사결정 책임자들은 서로 책임을 회피한다. 중앙정부가 기획한 지방의 대규모 테마파크사업들이 제대로 정착되지 못하고 건설 낭비로 판명나도 중앙정부는 책임지지 않는다. 처음부터 추진해서는 안 된다고 걱정하면서도 중앙정부의 자체 권력 유지와 다음 해 예산 확보의 틀에 갇혀 기계적으로 사업을 추진한다. 관료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제도화된 비효율성 문제다. 중앙정부가 개최하는 각종 행사와 축제의 비효율과 낭비 그리고 중앙행정관청의 큰 건물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지방의 작은 행사와 관청은 있어서는 안 되는 낭비라고 비판하는 기울어진 잣대가 만연하다. 중앙과 지방에 대한 이중의 잣대 그리고 집권화된 비효율과 낭비는 문화와 관행이 됐다.
저출산·고령화 정책에 수십 조원을 지출해도 상황은 더 악화됐다. 정책 한두 개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 중앙정부는 솔직하게 일을 잘할 자신이 없다고 고백해야 했다. 자신들이 맡기에는 역량이 부족하다고 고백해야 했다. 하지만 중앙정부는 자신들이 문제 해결 역량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외부의 다른 변명과 구실거리를 찾는다. 비효율과 낭비 그리고 무책임에 대한 지금의 정부실패는 곧 중앙실패에 대한 것이다.
지방과 분권, 문제 해결의 파트너를 위한 플랫폼
당면한 사회경제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파트너로서 ‘지방’ 그리고 실천을 위한 ‘분권’이 중요하다. 중앙의 역량 한계와 무책임을 인정하고 지방에 손을 내밀어야 한다. 국정 운영의 장에서 중앙과 지방이 기울어지지 않은 경쟁의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지방자치 부활 이후 국정 운영에서 뒷전에 밀려나 있던 지방에 대해 지금 와서 같이 뛰자고 해도 현실은 중앙의 희망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중앙정부는 중앙실패에 대한 반성부터 해야 한다. 그리고 중앙이 주고 싶은 것을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지방이 요구하는 것을 나눠야 한다. 못사는 지방에 적선하듯이 돈 몇푼 더 주고 수십 배에 달하는 효율과 책임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지방들 간 경쟁에서도 운동장이 기울어지면 안 된다. 약탈적 경쟁과 냉소적 허무주의가 만연할 수 있다. 모든 지역이 동등한 운동장에서 주민들을 위해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균형은 분권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분권은 불균형을 만들고, 그래서 균형을 위해 집권이 필요하며, 집권은 불가피하게 또 불균형을 만든다. 이른바 신자유주의 분권이다. 분권이 균형을 만들고 그래서 다시 분권으로 연결되는 선순환의 플랫폼으로 옮겨 타야 한다. 고전주의 분권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잔여적 분권이 아닌 보편적인 분권 투자로 정부간 재정관계의 플랫폼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
분권의 전제조건으로서 균형, 그리고 연대
수도권에 인구와 부(富)가 집중했다. 처음에 수도권 시민들은 수도권에 거주하는 자부심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수도권 생활이 재앙이 되고 있다. 집값과 대학입시, 멀어지는 직주 간 거리, 그리고 미세먼지, 수도권에 발을 디디는 순간 불균형의 늪에 빠지게 된다. 지키려는 자와 같이 나누고자 하는 자들의 약탈적 경쟁이 시작됐다. 대표적인 ‘지방실패’의 현상이다. 해결 방안은 ‘지역 균형’이고 이를 실천하는 주체는 ‘지방’이다. 지방의 균형은 지방의 주민뿐 아니라 수도권 주민들에게도 축복이다. 모든 지역이 동등하지 않으면 모두가 불행해진다.
균형을 위해 중앙정부가 개입하면 집권과 불균형을 만든다. 지금까지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했다. 균형을 위한 분권의 플랫폼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지역연대’가 중요하다. 지방이 함께 상생의 발전을 고민해야 한다. 중앙정부는 한 걸음 뒤에 있어야 한다. 여기서 재정 선진지역에서 재정 낙후지역에 직접 도움이 되는 연대활동이 중요하다.
‘불균형과 집권’의 틀에 갇힌 상태에서 허무와 냉소에 무너진 사회경제 상황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새로운 동그란 네모를 만들어야 한다. ‘균형과 분권 그리고 연대’가 새로운 답이다. 지방재정론은 분권과 균형 그리고 연대를 위한 학문이어야 한다. 중앙과 함께하는 국정 파트너와 지역연대의 분권을 위한 지방재정의 담론과 제도 그리고 실천이 필요하다.
이 책에서는 자치분권의 관점에서 지방재정론의 내용들을 정리했다. 자치분권을 위해 애쓰는 많은 선배, 동료, 후배 학자님들 그리고 정책 현장의 관료와 분권운동가들의 선행 업적에서 직간접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자치분권를 위해 고생하는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 어려운 출판 환경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출판을 해 준 윤성사 정재훈 대표께 고마운 마음을 드린다. 책 내용의 교열과 편집을 위해 고생한 출판사 직원분들의 노고에도 큰 감사를 드린다.
2019년 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