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에 있어서 헤로도투스가 ‘역사의 아버지’라면 동양에 있어서 그것은 사마천(司馬遷)이고, 서양에 있어서 ‘인물전(人物傳)의 고전’이 플루타르크의 「영웅전」이라면 동양에 있어서 그것은 사마천의「사기열전(史記列傳)」이라고 할 수 있다.
사마천이 남긴 불후의 대저(大著)「사기(史記)」는 중국 고대의 황제(黃帝)에서 시작하여 하(夏)·은(殷)·주(周)의 3대와 진(秦)·한(漢)의 사적을 기록한「본기(本紀)」 12권과 일종의 연표라 할 수 있는「표(表)」 10권, 국가의 제도와 문물에 관해 기록한「서(書)」 8권, 제왕과 제후들의 흥망성쇠를 적은 「세가(世家)」 30권, 그리고 그 당시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천하에 이름을 떨친 인물들의 행적을 그린「열전(列傳)」 70권―도합 130권 52만 6천 5백 자로 구성되어 있다.
한나라 무제 정화(征和) 2년(기원전 91)에 이 방대한 역저(力著)가 완성되었을 때 사마천은 이를 이름하여「태사공서(太史公書)」라 했다.
「사기열전」은 전(全) 130권으로 구성된「사기」의「열전」(70권)을 통칭하는 것이며, 사마천의 옹혼한 필치가 유감없이 발휘된 명저이다. 사서(史書)로서의「열전」은 단순한 사실의 나열에만 그치지 않고, 전기(傳記)적인 서술 방법과 함께 그들 개인의 각기 다른 생활의 일면과 심리의 변화까지도 서술함으로써 인간 그 자체를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사마천 자신의 표현대로 ‘아무런 쓸모없는 병신의 몸’이 되자, 그는 오로지「사기」의 찬술(撰述)에만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이를 가상하게 여긴 무제는 노여움을 풀고 그를 중서령(中書令)의 요직에 기용하여 그전보다 더욱 우대하여 주었다. 이리하여 그 규모의 방대함은 물론, 그 독창적인 서술 방법으로 후세에 길이 남을「사기」가 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다.
그는 무제가 죽은 해와 같은 해인 시원(始元) 원년(기원전 68)에 죽었다. 그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는 지극히 불행한 일생이었지만, 그러한 불운이 오히려「사기」라고 하는 불후의 대저(大著)를 남기게 했다는 것은 참으로 기묘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