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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칠 끝없는 투쟁

처칠 끝없는 투쟁

  • 제바스티안하프너
  • |
  • 돌베개
  • |
  • 2019-08-05 출간
  • |
  • 335페이지
  • |
  • 146 X 207 X 28 mm /449g
  • |
  • ISBN 9788971999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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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 소년 처칠의 수난과 투쟁
『처칠, 끝없는 투쟁』은 보잘것없는 시골귀족이었던 처칠 가문을 고위귀족으로 끌어올린 1대 말버러 공작 존 처칠(1650~1722)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어서 150년 동안 역사책에서 종적을 감추었던 처칠 가문을 다시 일으킨 또 한 명의 천재가 소개된다. 서른 살에 “혜성처럼” 정치무대에 등장해서 6년 만에 보수당을 다시 집권당으로 만들었으나 부총리에 취임한 지 넉 달 만에 스스로 모든 관직을 내던지고 파멸한 기이한 천재 로드 랜돌프 처칠(1849~1895). 바로 그가 윈스턴 처칠의 아버지다.

[랜돌프 처칠은] 절도 없고 불끈 화를 내며 내던지고, 예의 없다고 할 정도로 남에게 상처를 주고, 게다가 스스로도 몹시 쉽사리 상처를 입는 다정다감한 사람으로, 돈키호테 방식의 기사였다. 그러니까 무모하고 정신 나간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자주 경탄의 뜻을 담아 ‘정신 나간 놈’이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더욱 진지한 의미에서 그렇게 말했다. 예를 들어 늙은 빅토리아 여왕은 그가 짧은 명성의 절정에 있을 때 악의를 품고 진지하게 그를 ‘정신병자’라고 불렀다. 실제로 그는 정신착란 상태에서 죽었다. 겨우 마흔다섯 살 때였다. _본문 13쪽

처칠은 일곱 살부터 열아홉 살까지 12년 동안 영국식 “초강력 교육기계” 기숙학교에서 잔혹한 매질을 당하면서도 배움을 완강히 거부했고, 그로써 아버지 랜돌프 처칠에게 “재능 없고 희망도 없는 실패자”라는 경멸을 받아야 했다. “삶에서 가치 있는 모든 것”의 열쇠를 쥔 듯이 보이는 아버지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것이 어린 처칠의 “트라우마”였다. 처칠은 스무 살이 되도록 고등학교 졸업시험도 통과하지 못했고, 사관학교 입학시험을 두 번 떨어졌으며, 보병이 되기엔 “멍청”한 부잣집 자제들이 흔히 지원하는 기병이 되어야 했다.

어린 처칠은 해로 스쿨에서 영원한 낙제생이었다. 오직 영어만 우수했고, 나머지 모든 과목에 대해 ‘이성을 닫아’걸었다. 학교 스포츠에서도 반항적인 실패자였으니 크리켓과 축구도 라틴어나 수학과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 어떤 우정도 맺지 않았다. 그가 학교에 대해, 학교의 강요와 방식에 대해 마음을 닫고 내면의 파업을 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막연히 결심한 채 이 모든 것을 12년 동안이나 견뎠다. 비싼 학교는 그에게 모조리 허사였고 학비만 들었다. 그는 기율을 얻지 못하고 목표대로 형성되지도 않은 채 교육도 교양도 없이 학교를 떠났다. _본문 36쪽

■ 청년 처칠, 국민영웅이 되다
“다 자랐으나 쓸모없는 귀족 자제, 가문의 수치이며, 죽어 가는 아버지 눈에 ‘무능력자’일 뿐”이었던 처칠은 스물한 살이 되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환골탈태한다. 훗날 처칠은 “마치 알라딘의 기적의 동굴처럼” 세계가 자신 앞에 열렸다고 썼다. 그리고 하프너는 이 놀라운 변화의 원인을 ‘아버지의 죽음’과 ‘전쟁과의 운명적인 조우’ 덕이라고 말한다.

젊은 시절에 대한 처칠의 회고에서 열쇠가 되는 문장이 나온다. “이제부터 나는 내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다.” 길들일 수 없는 그를 길들이려는 시도가 갑자기 사라졌다. 학교도, 사관생도 생활도, 위압적인 아버지도 없었다. 랜돌프 처칠 경의 죽음은 희망 없고 수치스런 위대한 사랑[아버지를 향한]의 종말을 뜻했다. 이 죽음과 함께 나타난 우울하면서도 깊은 해방감은 젊은 윈스턴 처칠이 꽉 눌려 있다가 스물한 살의 나이에 갑자기 풀려난 깃털처럼 앞으로 날아오른 것에 대한 한 가지 설명이 된다.
또 다른 설명은 그가 거의 우연히 곧바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직종인 전쟁으로 뛰어들었다는 사실이다. _본문 46쪽

하프너는 책 전반에 걸쳐서 반복적으로 처칠을 “전쟁의 사람”이라고 호명한다. 실제로 처칠은 평생 전쟁을 쫓아다녔다. 청년 처칠이 대반전을 맞는 것도 쿠바, 인도, 수단, 남아프리카에서 잇달아 터진 전쟁에 뛰어들면서다. 특히 남아프리카 보어전쟁에서 기관차를 탈취해 부상자들을 구하고,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하는 등의 스펙터클한 모험을 통해 처칠은 “국민 영웅”으로 급부상한다. 타고난 군사적 재능과 글쓰기 재능으로 무장한 처칠은 때론 기병소위로, 때론 신랄한 종군기자로 전장을 누비면서 점점 더 세상의 주목을 받다가 1900년 10월 스물다섯 살에 올덤 하원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한다.

■ 성공한 기회주의자
정치인 처칠은 몇 차례 실패를 맛보기도 했지만, 거의 언제나 권력의 중심에 있었다. 보수당에서 자유당으로, 다시 보수당으로 철새처럼 옮겨 다니며 60년 동안 하원의원, 장관, 총리를 두루 섭렵했다. 그러나 하프너는 거물 정치인 처칠을 꽤나 야박하게 평가한다. “아웃사이더”인 동시에 “기회주의자”라는 이중적인 처신으로 권력을 좇았지만, 당대의 정치 천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나 전쟁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스러져 간 네빌 체임벌린 등에 비하면 정치인으로서는 하수라는 것이다.
하프너에 따르면 처칠은 고도의 정치적인 계산보다는 “불안감과 초조함”, “명예욕”, “권력욕”, “소명 의식”, “운명에 대한 믿음”, “천재적인 데몬의 힘”으로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수많은 적들에 둘러싸여 있었고, 진정한 추종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런 처칠에 대해 로이드 조지는 이렇게 썼다.

“그의 정신은 강력한 기계와 같지만, 무언가 감추어진, 알려지지 않은 결함을 갖고 있다. (…) 이 기계가 잘못 작동하는 날이면, 그 결과는 그 자신만이 아니라 그 일 자체와, 일을 함께 한 동지들에게까지 파괴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것이 그들을 그토록 예민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들 말로는, 그가 어딘가 자재(資材) 결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_본문 132쪽

■ 차라리 파시스트
급기야 하프너는 처칠이 반(反)파시스트라기보다는 오히려 파시스트에 가깝다고 평가한다. 평생 반볼셰비키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있었던 처칠은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하고 서유럽에서 사회민주주의 노동당이 부상하는 것을 분노에 차서 지켜보다가 파시스트가 주도하는 반혁명 붐이 일자 오히려 반색했다는 것이다. 하프너는 1920년대의 처칠을 파시스트라고 단언하면서, 그 당시 처칠이 “사회주의 배신자인 무솔리니와 천박한 속물 히틀러보다” “유럽 파시즘의 가장 위대한 국제적 지도자”에 더욱 잘 어울리는 인물이었다고 평가한다. 1930년대 초반의 처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처칠은―특히 30년대 초기의 처칠은―반(反)파시스트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다. (…) 처음에는 심지어 히틀러에 대해서도 어떤 특별한 반대가 없었다. 히틀러의 반유대주의에 대해서만은 고개를 저으며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것 말고는 말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이 무시무시한 사내의 잔인성과 독특한 깡패 기질에 진짜 역겨움을 느꼈다. 30년대 초에는 그런 게 아직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이따금, 독일이 1차 대전에서 패배한 것처럼 영국이 큰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영국에도 히틀러 같은 사람이 나타나면 좋겠다고 말했을 정도다. _본문 166쪽

이런 그가 20년 뒤 파시즘을 물리치는 전사가 되는 것은 “기질적으로 모든 유화 정책의 반대자였기 때문이고, 마침 이 순간 나치가―노동당과 인도에 뒤이어―영국 유화 정책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라고 하프너는 설명한다.

■ 전쟁의 사람 vs 전쟁의 사람
하프너는 ‘정치인 처칠’ 대신 ‘전사 처칠’에 더욱 주목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전사였고, 그런 다음에야 정치가”였던 사람. “20세기의 사람이라기보다는 그보다 더 옛날 더욱 강하던 시대에 속했”던 시대착오적인 인물. “다른 사람들이 번영을 누리는 온건한 지역에서는 쇠약해지고, 남들이 숨을 헐떡이는 곳에서 비로소 되살아”나는 사람…. 이 같은 표현들은 히틀러에게도 그대로 부합한다. 하프너에 따르면 처칠과 히틀러는 “서로의 운명”이다.

처칠은 히틀러보다 무한히 고귀하고 인간적이고 고상한 현상으로, 도덕적으로나 미적으로 마치 블레넘궁이 빈(Wien) 멜더만 거리의 노숙자 숙소와 거리가 먼 만큼이나 히틀러에게 멀리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 두 사내, 고귀한 사람과 저급한 사람을 서로의 운명으로 만든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들은 정말로 서로의 운명이었으니 말이다. 처칠이 없었다면 히틀러는 승리했을 것이고, 히틀러가 없었다면 처칠은 빛나는 실패자, 시대 착오자로 시들어 갔을 것이다. 평생 직접 대면한 적이 없는 이 두 사내는 알지도 못한 채로 수십 년 전부터 서로를 향해 행진해 나갔고, 그런 다음 죽기까지 서로 결투를 벌였다. 특별한 의미에서 그들은 한데 속하는 사람들이니, 언제까지나 역사에 함께 등장할 것이다. _본문 180쪽

그러나 처칠과 히틀러는 극과 극의 인물이기도 했다. 하프너는 이렇게 말한다. “처칠은 타고난 전사임에도 매우 인간적이었고, 자주 다정한 사람이었다. 마치 정열적인 사냥꾼이 흔히 동물을 몹시 사랑하는 사람인 것과 비슷하다. 더 약한 존재, 패배한 존재에 대한 잔인성을 그는 죄악처럼 싫어했다. 이런 종류의 잔인성은 히틀러의 성격 특성이었다.”(본문 216~217쪽)
정치적으로 훨씬 유능하고 유연했던 체임벌린의 유화 정책이 실패하고, “모든 것을 다 바쳐서라도 승리하겠노라”는 처칠의 무시무시한 결심이 세계를 구원한 것은, 단 하나, 반대편에 버티고 있는 파트너가 ‘히틀러’라는 특수한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체임벌린의 구상에는 “자신이 영국을 위해 계산하듯이, 자기 나라의 가능성과 이익을 합리적으로 정확하게 계산하는 독일의 정치가라는 개념”이 들어 있었지만, 히틀러는 “정치가가 아니”라 “유대인 절멸, 슬라브인의 노예화, 그리고 새로운 게르만 주인종족의 양성”을 꿈꾸는 “극히 무시무시한 종류의 혁명가”였으며, 오로지 처칠만이 이것을 간파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1940년과 1941년에 처칠이 없었다면, 지금도 78세의 히틀러가 대서양부터 우랄 산맥에 이르는, 또는 그 이상까지 미치는 거대 게르만 친위대 국가를 통치하고 있다고 상상해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처칠이 없었다면 오늘날에도 어쩌면 대영제국이 존재할지도 모르지만(히틀러는 대영제국이 존속하는 것을 보려고 했으니)―아마도 강력한 파시즘과 야만적 형태를 하고서, 히틀러가 통치하는 유라시아 대륙국가의 불쾌한 주니어 파트너 노릇을 하고 있을 것이다. _본문 208~209쪽

■ 마지막 투쟁
하프너는 처칠의 투쟁을 마냥 빛나는 것으로 그리지 않는다. 어떤 대상과 싸운다는 것은 투지에 찬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처절하고 피로하며 제 살 깎아 먹기이기도 하다. 처칠의 말년은 빛나는 승리 다음에 찾아오는 그늘에 싸여 있다. 처칠은 우울증과 무료함과 싸우며 서서히 소멸해 간다. 누군가는 처칠이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고 주장한다. “모든 게 너무 지루해.” 1965년 1월 24일에 처칠은 아흔 살의 나이로 죽었다. 90년의 투쟁이 그렇게 막을 내린다.

세월이 가면서 점차 그가 죽지 않는다는 것이 눈에 띄게 되었다. 처음에 그는 자주 죽음을 소망했다. 이제 쓸모없게 되어 버린 삶이 자신에게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죽을 수가 없었다. 그는 포기할 줄을 몰랐다. 지금도 그의 안에는 포기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었으니, 그것은 그 자신이 알든 모르든 마지막까지 죽음에 맞서 항거했다. 죽음은 다른 모든 사람에게 했듯이 천천히 한 조각씩 그를 차지했다. _본문 289쪽


목차


1. 아버지와 아들 7
2. 젊은 시절의 처칠 43
3. 과격분자 67
4. 고공비행과 추락 99
5. 반동주의자 127
6. 모든 사람에 맞선 한 사람 155
7. 데자뷔 183
8. 운명의 사람 205
9. 승리와 비극 237
10. 최후의 싸움 267
연표 293 | 증언 296 | 옮긴이의 글 303
참고 문헌 313 | 찾아보기 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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