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조식은 우리 역사상 가장 성공한 교육자라고 알려져 있다. 조선의 성리학이 활짝 꽃피기 시작할 때, 그의 문하에 130여 명이 찾아가 학문을 질정하고 강론하였다. 요즘말로 하자면 남명의 문하에서 박사가 1백여 명쯤 배출된 것이다. 오늘날 아무리 대단한 학자라 할지라도 문하에서 박사를 1백여 명 배출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더 특이한 사실이 있다. 남명이 살던 시대는 한 마디로 사화로 전형화 할 수 있다. 사화기를 살던 지식인들은 자신의 존재방식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였고, 권간(權奸)과 외척(外戚)의 전횡에 대해 맞서며 시대정신을 고취시켰다. 이런 사화기의 시대상황 속에서 한양에서 청풍으로 이름이 난 젊은 선비 최영경(崔永慶)이 천리 길을 멀다 않고 지리산 산속에 은거하고 있던 남명을 찾아 내려온 것이다. 최영경은 남명을 찾아와 며칠 이야기를 나눈 뒤 그의 학덕에 매료되어 제자의 예를 갖추었으며, 지리산 덕산으로 이사를 하였다.
이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사회기에 나타난 엄청난 사건이다. 그것은 한양 최고의 젊은 학자가 지방으로 유학을 온 제1호였다는 점이다. 전통시대에도 지금처럼 부와 권력은 물론 정보와 지식이 모두 수도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래서 모두 한양으로 유학을 하고, 한양에서 벼슬살이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런데 한양 출신으로 명성이 자자하던 젊은 학자가 지리산 산속으로 유학을 온 것이다. 학문의 지방화시대를 연 장본인이 바로 남명이었으니, 가장 성공한 교육자가 아니겠는가.
남명이 일찍이 경상우도에 은거를 하여 1백여 명의 박사급 제자를 길러냄으로써 이 지역은 일시에 학문이 울창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퇴계도 만년에 안동 도산으로 물러나 후학을 양성함으로써 경상좌도에도 동시에 학문이 크게 일어났다. 퇴계와 남명, 이 두 분에 의해 16세기 경상도 전 지역이 우리나라 제일의 학문의 고장이 되어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 불리게 되었으니, 우리 역사상 이는 3천 년 이래 일대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은 남명의 문인들 또는 사숙인들 가운데 주목할 만한 인물, 그중에서도 학문적으로 남명학을 계승하여 의미 있는 글을 남기고 간 인물을 택해서 그들의 정신지향과 학문성향을 논한 것을 모아 놓은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 수록된 인물들을 통해 보면, 남명 사후 남명학의 전승, 남명정신의 계승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남명학파는 인조반정 이후 와해되다시피 되어 그 명맥을 이어가지 못하고 가문을 통해 전승되었지만, 이 지역에 오래도록 전승된 남명정신은 남명 사후 수백 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이 책에 수록된 인물은 남명의 문인 최영경(崔永慶), 정구(鄭逑), 김우옹(金宇?), 곽재우(郭再祐), 성여신(成汝信) 및 재전문인 정온(鄭蘊), 박여량(朴汝樑) 그리고 사숙인 박태무(朴泰茂), 곽종석(郭鍾錫) 등이다. 이들의 학문과 사상, 문학과 정신을 통해 남명사상이 어떻게 전승되고 있는지, 남명의 후예로서 어떤 정신지향을 하며 살았는지를 일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이렇게 묶은 것은 남명의 문인, 재인문인들은 물론 19세기 곽종석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정신 속에는 남명정신이라는 학문종자가 변치 않고 전승되고 있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이 책을 통해 후학들에게 전승된 남명학의 특징이 재조명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