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89년 3월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전임강사로 임용되었다. 총장께 인사를 하러 갔는데, 하시는 말씀이 하나는 진주로 이사를 오라는 것이었고, 하나는 남명학을 공부하라는 것이었다. 학연과 지연이 전혀 없는 낯선 곳에서 근무하는 것도 생소한 것이 많아 긴장하고 힘들었는데, 남명학을 공부하라고 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더구나 나는 조선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을 공부하고 있었으니, 남명학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어쩌랴. 하는 수밖에. 나는 당시 박사학위 논문을 집필 중이었는데 잠시 접어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생경한 ??남명집??을 읽고 어렵사리 논문 1편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학교에 남명학연구소가 창립되어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소장까지 맡아 몇 년 동안 여러 가지 일을 하였다. 그리고 어느덧 본교에 부임한 지 30년의 세월이 훌쩍 흘렀다.
지금 돌이켜 보니, 내가 낯선 고장에 와 반강제로 남명학을 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무슨 운명 같은 느낌이 있다. 나는 남명학을 공부하면서 한편으로는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남명학을 강의하였다. 그리고 또 여러 차례 학술회의에서 발표를 하였고, 남명 선생이 남긴 글을 공동으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10여 편 이상의 논문을 생산하였다.
그런데 정작 그보다 더 큰 소득이, 나 자신이 어느덧 남명을 흠모하고 닮아가려 노력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맹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공자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는데, 남명도 마찬가지로 자신을 공자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나 역시 이런 선현들의 말씀에 느낀 바가 있어 공자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는데, 남명을 만난 뒤로는 더욱 긴장감을 갖고 살고 있다. 언행을 함부로 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올바로 실천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어느덧 남명 전도사가 되어 남명과 남명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어찌 보면 내가 진주에서 30여 년을 살면서 가장 큰 소득은 남명선생을 만난 것이다. 이처럼 큰 스승을 만나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다. 그리고 조선시대를 관통하는 사대부의 정신을 남명을 통해 이해하게 되었고, 현실에 대해 인식과 시대의 질곡을 헤쳐 나가는 정신을 배웠다. 그러니 나에게는 남명선생보다 더 큰 스승은 없을 듯하다.
내가 이 책을 엮어 출판하게 된 것은 그동안 연구한 몇 편의 논문을 한데 모아 남명학의 본질과 특색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남명학에 대해 여러 사람들이 이런저런 주장을 하는데, 본질을 왜곡하거나 본질을 알지 못하고 지엽적인 문제를 끌어내 자신의 선입견에 의해 엉터리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내가 전에 쓴 논문을 수정 보완한 것과 남명학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풀어쓰기 형식으로 쓴 글이 함께 실려 있다. 풀어쓰기 형식의 글은 논문형식과는 다르게 주석을 많이 달지 않고 논증을 하지 않았다. 대체로 이 책의 앞부분에 있는 글이 그런 형식의 글이다. 그리고 맨 앞에 ‘남명학 혹문’이라는 좀 색다른 글을 붙여놓았다. 주자가 사서(四書)를 주석하여 집주(集註)를 만들고서, 못 다한 말을 혹자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해설한 것이 사서혹문(四書或問)이라는 글이다. 그런 형식을 모방하여 남명학에 대해 혹자가 질문하고 내가 답하는 형식의 글을 맨 앞에 붙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