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인물 평전의 역작, <만화 김대중> 다시 태어나다
역사를 고스란히 살아낸 사람들이 있다. 우리에게 민주화 운동의 투쟁가이자, 국민의정부의 수장이며, 한국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로 남아 있는 고 김대중 대통령 역시 그러한 사람이다. 그는 해방 전인 1924년 전라남도의 작은 섬에서 태어난 이래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을 최전방에서 온몸으로 겪어왔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는 금언을 자신의 좌표로 삼아, 그는 ‘행동하는 양심’으로 한 시대를 살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 책은 역사 속 우리의 좌표로 남은 고 김대중 대통령의 삶을 그를 둘러싼 시대적 배경과 정치적 환경 속에서 치밀하고 꼼꼼하게 추적했다. 그러기에 만화로 그려낸 한국 현대사의 증언이자 기록물인 셈이다. 박정희, 전두환에서부터 노무현, 문재인까지 격동기 역사의 중심에 있던 인물들의 삶을, 역사적 시각과 비판적 인식으로 작품에 담았던 시사만화가 백무현 화백 최고의 역작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2009년에 5권으로 출간된 바 있다. 이후 백무현 화백은 내용의 오류를 조금씩 바로 잡았으나 책의 재출간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지난 지금, 고 김대중 대통령의 서거 10주기를 맞아 이 책을 3권으로 묶어 세상에 다시 내보낸다. 인간으로서의 품격은 고사하고 예의마저 사라진 이 시대에 불의에 맞서 ‘행동하는 양심’이 되고자 하는 분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하의도에 핀 인동초
6.15남북정상회담 장면이 프롤로그로 나오는 1권은 먼저 김대중 대통령의 고향인 하의도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1623년 인조 임금이 정명공주가 혼인할 때 하의도 땅을 하사한다는 명을 내린다. 그 뒤 하의도 농민들은 자신의 손으로 개간한 땅에서 농사를 지으면서도 부당하게 2중으로 세금을 착취당하게 된다. 억울한 현실에 분개하여 농민들은 300년 동안이나 농지 탈환 운동을 전개한다. 이러한 하의도에서 보낸 유년 시절은 김대중 대통령이 시대의 모순에 굴하지 않고 저항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목포상고를 나와 해운사업으로 성공하고 6.25 전란 속에서 첫 번째 죽음의 고비를 넘긴 후 정계에 입문하기까지 그의 행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정치에 입문했지만 그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아내 차용애의 죽음을 겪어야 했고 군사 쿠데타도 목도해야 했다. 연속된 시련 탓에 좌절도 하지만 삶의 동지이자 정치적 후원자인 이희호와 만나 결혼한 뒤 삶의 안정을 되찾는다. 그리고 그는 본격적으로 행보한다. 5.16 군사 쿠데타를 통해 악연으로 만난 박정희 정권과의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야당의 차기 지도자로 떠오른 김영삼과 경쟁해 신민당 대통령 후보가 된 김대중은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와 맞붙게 된다.
행동하는 양심으로
2권은 제7대 대통령 자리를 놓고 김대중과 박정희가 각축을 벌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김대중은 박정희에 앞서는 듯했으나 투표 결과 박정희가 당선된다. 이후 김대중은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를 절게 된다. 박정희는 장기 집권을 하기 위해 유신헌법을 공포한다. 당시 일본에 있던 김대중은 납치를 당하지만 죽음의 목전에서 극적으로 생환한다. 서울대 시위로 촉발된 반독재, 반유신의 불길이 타오르는 등 민주화 투사로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행동하는 양심’ 김대중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결국 10.26으로 박정희는 최후를 맞고 유신 독재가 끝난다. 이른바 서울의 봄. 그러나 또다시 전두환을 필두로 신군부 독재 세력이 등장한다. 5.17 쿠데타로 실권을 잡은 전두환의 정치공작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그 실체를 드러냈다. 김대중이 투옥되어 사형을 선고받기까지 희극과도 같았던 전두환 정권의 정치공작, 계엄사령부의 폭정에 항거하는 5.18 광주민주항쟁, 피의 진압 작전인 ‘화려한 휴가’, 김대중을 살리기 위한 이희호의 노력과 전 세계적 구명 운동이 숨 막히게 진행된다. 이후 김대중은 신병 치료를 위해 망명길에 오르지만, 오히려 망명지인 미국에서 한국의 실상을 알리는 투쟁을 전개하다 위험을 무릅쓰고 귀국을 결심한다. 그리고 6월항쟁과 6.29선언, 드디어 그날이 온 것일까.
시대의 한계를 넘어
온 국민의 열망으로 되찾은 대통령직선제. 3권은 87년 대통령선거로 시작한다. 그러나 대통령직선제는 빛을 발하지 못했다. 시민들이 후보 단일화를 요구에도 김대중, 김영삼은 각자 출마해 결국 노태우 군사정권이 다시 들어서고 만다. 다행히 여소야대 정국을 만드는 데 성공, ‘1노 3김 시대’를 연다. 평민당이 제1야당이 되자 김대중은 광주항쟁 진상을 밝히고 5공화국 비리도 청산하는 청문회를 제안해 전두환 친인척을 비롯해 5공화국 비리를 들추어내고 전두환을 백담사로 유배시킨다.
그러나 ‘1노 3김 시대’는 김영삼, 김종필이 노태우와 손을 잡으면서 끝난다. 92년 제14대 대통령선거에서 김영삼은 3당 합당 덕을 톡톡히 누린다. 노태우가 준 거액의 정치자금을 바탕으로 색깔 논쟁과 지역감정을 자극해 김대중을 압박해갔다. 결국 김영삼이 제1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김대중은 정계 은퇴 선언을 하고는 영국으로 건너간다. 이 시기에 그는 민주주의와 통일 문제에 천착하고, 귀국한 직후 아태평화재단을 세운다.
1994년 남북 특사교환 실무접촉에서 북측 단장 박영수의 ‘서울 불바다’ 발언은 남북을 일촉즉발의 전쟁 상황으로 내몬다. 김대중은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만남을 제안하고 성사시켜 전쟁 직전에서 한반도를 구해낸다. 이것을 시작으로 그는 새정치국민회의 총재로 정계 복귀를 선언한다.
97년 대선에서 신한국당 이회창을 이긴 김대중은 50년 만에 처음으로 수평적인 여야 정권 교체를 이루며 제15대 대통령이 된다. 청와대에 입성한 김대중은 가장 급한 불인 외환위기를, IMF체제 1년 반 만에 벗어났다. 그러나 부실 기업과 금융기관을 정리하고, 공기업을 매각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어야 했다.
김대중은 재임 기간 중 경색된 남북관계를 푸는 데도 힘을 쏟았다. 2000년 6월 13일에 김대중이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북한을 직접 방문해, 남북은 봄을 맞는다. 김대중이 김정일 국방위 위원장과 합의해 선언한 ‘6.15 남북공동선언’은 기본적으로 “한반도 문제는 한반도 사람들끼리 해결하자”는 데 동의하고 있다. 이런 활동의 공로로 김대중은 2000년에 노벨평화상을 받는다. 그러나 임기 말년에 막내아들이 연루된 ‘최규선 게이트’, 측근 권노갑이 연루된 ‘진승현 게이트’ 등 친인척과 측근들이 저지른 비리로 도덕적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기도 했다.
노무현에게 자리를 넘겨준 그는 퇴임한 뒤 공부에 매진한다. 그러다 2009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자, 그는 영결식장에서 권양숙 여사를 붙잡고 오열한다. 그해 6월 6.15 남북정상회담 9주년 특별강연에서 그는 “행동하는 양심이 됩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라며 불의에 맞서 싸울 것을 촉구했다. 이 말은 김대중 대통령의 마지막 연설이자 정치적 유언이 되고 말았다.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김대중 대통령은 2009년 8월 18일 지병으로 영면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