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왜 조선의 철학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는가?
전통 사회에서는 시대마다 그 시대를 지배하는 철학이 있었다.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그 시대의 지배적 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그것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고 가치 판단을 하며 행동한다. 조선시대 500여 년을 지배하였던 유학은 그 시대는 물론이고 지금도 한국인이 세상을 바라보고 가치 판단을 하는 데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개인의 무의식이 나이가 들어도 쉽게 바뀌지 않는 것처럼 한 사회의 문화적 무의식도 역사적으로 쉽게 바뀌지 않는다. 유학은 한국인의 문화적 무의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영향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에 대해서는 사람에 따라 견해가 다를 수 있지만, 그 영향이 크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특히 인간관과 세계관, 윤리 의식과 사회의식, 정치사상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우리가 왜 조선의 철학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는가? 그것은 그 시대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지금의 한국인의 문화적 무의식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사상 체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조선의 철학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그 시대는 물론이고 오늘의 한국 문화와 사상을 이해하는 데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다.
조선시대에 유학은 인간과 사회와 세계를 바라보는 개념의 틀을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수양하고 사회를 다스리는데 실질적 역할을 하였다. 비록 사회․정치 구조가 조선시대와는 많이 달라졌지만, 인간을 바라보고 삶을 생각하는 방식과 근본적인 태도가 모두 바뀐 것은 아니다. 철학은 특정 시대의 분위기를 반영하기도 하지만,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적 가치도 아울러 지니고 있다. 이 책은 조선의 철학을 대표하는 퇴계와 율곡, 남명을 비롯하여 퇴계학파와 율곡학파, 중도파인 여헌 장현광의 철학, 대표적 철학 논쟁인 호락논쟁을 다루었고, 조선 후기 실학을 대표하는 다산의 철학을 분석하였다. 또한 구한말 유학을 대표하는 화서학파의 유인석에 대해서도 다루었다. 조선시대에 사회적 영향력이 컸던 대표적 지식인 10명의 철학을 조명함으로써 조선의 정신세계를 밝혀보고자 하였다.
조선은 선비 또는 사대부로 불리는 지식인의 주도로 건국되었고, 또한 사림의 집권 이래로 지식인이 권력의 중심에서 시대와 나라를 이끌었다. 이것은 동시대의 중국과 일본의 경우와는 매우 다른 현상이다. 지식과 권력이 일체화된 사회에서 지식의 정당성은 권력의 정당성을 뒷받침하였다. 그래서 지식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지식인 사이의 담론은 활발하고 치열하였으며 때로는 권력 투쟁과 맞물리기도 하였다.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 학술적 주제를 가지고 왜 그 시대에는 오랫동안 치열한 논쟁을 하였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논쟁하였던 이기론, 심성론, 예론은 그 시대에는 세계와 우주를 바라보고,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패러다임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를 둘러싼 논쟁은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