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나라가 겪은 고통의 역사, 예술로 공감하다
1813년, 아제르바이잔의 조그만 시골 마을 귈뤼스탄은 역사적 공간이 된다. 두 차례에 걸친 러시아-페르시아 전쟁의 결과로 아제르바이잔을 러시아와 이란이 나누어 점령하는 ‘귈뤼스탄 조약’이 체결된 것이다.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강대국의 세력 다툼 속에서 신음하고 분열한 아제르바이잔은 이 조약으로 인해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고, 평화롭게 살고 있던 사람들은 이산가족이 되어버렸다. 현재 아제르바이잔 영토인 북쪽 지역에 1천만 명, 이란 영토인 남부 아제르바이잔에 3,500만 명 정도가 살고 있는데, 남과 북으로 나누어진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은 북쪽이 구소련에 편입되면서 서로 왕래조차 할 수 없었다가 구소련이 해체한 1991년 북쪽 지역이 독립하면서 왕래가 가능하게 되었다.지리적으로도 멀고 정보도 부족했지만, 아제르바이잔과 한국은 유사한 고난의 역사를 겪었기에 한국인들은 와합자대의 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민족의 운명과 함께 성장한 시인, 배흐티야르 와합자대
시인이자 민족해방운동가인 와합자대는 민족의 현실과 고통을 작품에 담아냈을 뿐만 아니라, 아제르바이잔 바쿠 국립대학 문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교육자로서 수많은 학생들에게 민족 정체성을 일깨우고, 민족정신을 고양했다. 분단과 독립, 민족해방운동, 민주화 투쟁,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분쟁 등을 다룬 배흐티야르 와합자대의 시(詩)는 아제르바이잔인들의 한(恨)과 고통, 슬픔, 좌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민족의식 등이 시 한 구절 한 구절을 채우고 있다. 1958년에 발표한 대표작 「귈뤼스탄」은 ‘귈뤼스탄 조약’으로 두 개로 나뉜 분단국 아제르바이잔의 역사적 참사에 대해 쓴 시이다.
당시에는 소련의 검열이 심해 이 작품을 출판하는 것이 불가능했으나 아제르바이잔의 작은 도시 섀키 출신인 시인은 친구의 도움으로 지역 신문 『섀키 패흘래시??ki f?hl?si』에 이 시를 발표했고, 이것을 빌미로 신문은 폐간되었다. 그러나 지역 신문이기에 별로 구독자가 많지 않았음에도 『귈뤼스탄』은 며칠 만에 온 국민에게 퍼지고 사람들은 이 시를 암송하면서 아픔을 공유하고 위로받았다. 배흐티야르 와합자대는 아제르바이잔 국민과 운명을 함께하며 국가를 위해 싸운 지식인으로, 구소련이 지배하던 시대에 온갖 통제와 억압에도 불구하고 두려움 없이 역사적 고난들을 섬세한 예술적 언어로 표현했다. 아제르바이잔의 아픔을 다양한 문학적 표현 방식을 통해 상징적으로 구현한 서사시들과 희곡은 왜 그가 사랑받는 국민 시인인지 말해준다.
“와합자대의 시와 미학은 민족적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우주적이고 보편적이다.” _칭기즈 아이트마토프(소설가)
와합자대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민족의 분단과 통일, 억압된 현실’을 주요 주제로 다루었으나, 독립 이후 그의 시 세계는 인간의 근원적 삶과 본질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 시대와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다루는 와합자대의 시는 철학적이며 사색적이다. 시인은 「다채로운 꽃」 「인간 그리고 시간」 그리고 「그리움의 시(詩)」와 같은 연작시들에서 인간의 근원적 고뇌와 고통을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깊이 고찰한다. 「뭔가 부족해」 「나는 나 자신을 부인한다」에는 공허한 내면세계에 대한 탐구, ‘나’를 찾기 위해 던지는 근원적 질문들이 잘 드러나 있고, 「무엇이든 자신이 되어라」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인간은 내면의 부름과 양심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삶의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이렇게 자기 자신과 마주하고 세계와 타협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지며 세상과 화해해간다.
와합자대는 독창적인 시적 사고, 다양성과 창의성으로 아제르바이잔 문단을 풍요롭게 장식했다. 우리나라에는 지금까지 소개될 기회를 얻지 못했지만 구소련, 튀르크 국가들, 유럽과 미국에는 매우 잘 알려졌으며, 그의 작품은 세계 20여 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아제르바이잔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시인 와합자대의 작품이 인기를 얻고, 학술 연구 대상으로 가치를 인정받는 이유는, 그의 작품이 민족 문제를 다양한 범주에서 다루고, 인간 본성, 독특한 시적 사고를 모두 조화롭게 풀어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