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센이라고?
프로이센(Preussen, 영어로는 Prussia, 한자로는 普魯士)은 잊힌 이름이다. 중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 언급되는 보오전쟁, 보불전쟁에서 ‘보’(普)로 불린 그 나라. 17세기에서 20세기까지 공국, 왕국, 제국의 핵심 국가, 공화국의 핵심 주였던 프로이센은 지금 세계 지도에서 찾아볼 수 없다. 한때 독일 인구의 62퍼센트, 면적의 65퍼센트를 차지한 거대한 땅이자 권력은 완전히 지워졌다. 이는 과거의 유산과 기억을 무척 중요시하는 유럽의 역사에서 대단히 예외적인 사건이다. 수백 년간 저 땅에서 저 이름을 가진 국가가 걸어온 발자취를 생생하게 그려내는 『강철왕국 프로이센』은 이 문제의 국가 ‘프로이센’의 역사를 정면으로 다룬다.
프로이센을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한글로 된 최초의 단행본
프로이센은 비스마르크와 히틀러를 연결하고, 독일제국에서 (바이마르공화국을 거쳐) 나치의 제3제국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독일의 근대사를 정리하곤 하는 문헌들에서 언급되곤 하지만, 프로이센을 본격적으로 다룬 책은 국내에 그동안 한 권도 없었다. 모든 언어를 막론하고 프로이센에 관한 최고의 역사서로 평가받는 『강철왕국 프로이센』은 그간의 공백을 아쉬움 없이 메워줄 것이다.
대선제후에서 빌헬름 2세까지, 공국에서 제국까지
『강철왕국 프로이센』은 프로이센의 통사로 주요 사건과 인물을 빠짐없이 다룬다. 호엔촐레른 왕가가 브렌덴부르크 선제후국을 취득하게 된 이래, 프로이센 왕국으로 성장하고, 독일을 통일한 뒤 제국으로 발돋움했으며,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일으킨 주범으로 몰려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는 파란만장한 일련의 사건을 빈틈없이 엮어낸다. 여전히 변두리 왕국에 불과했던 1700년대 중반, 합스부르크 제국, 프랑스, 러시아 연합군과 맞선 7년 전쟁의 영웅 프리드리히 대왕, 나폴레옹과 프로이센의 굴욕, 1848년 혁명의 추이와 여파, 독일 통일의 주역 비스마르크, 최초의 미디어 군주라 불리는 빌헬름 2세 황제 등 주요 통치자들과 사건들을 다룬 챕터들은 압축적으로 정리된 별개의 글로도 손색이 없다.
정치와 세밀하게 얽어 짠 문화와 사회
『강철왕국 프로이센』이 주요한 정치적·외교적 사건을 도식적으로 나열한 책과는 가장 거리가 먼 역사서다. “역사책이 가져야 할 모든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외신의 평가대로, 저자는 역사의 분수령이 되는 정치적 사건과 이 사건의 원인이자 결과가 되는 사회문화적 변화를 대단히 긴밀하고 유려하게 엮어낸다. 특히 프로이센이 점차 세력을 불려 독일을 통일해 나가는 데 작용한 에너지를 중심으로 프로이센 사회의 변화를 짚어나간다. 프로이센이 자리한 지금의 독일 땅에는 뚜렷한 지리적 경계도, 단일하고 고유한 문화나 언어도 없었기 때문에, 프로이센의 어떤 점들이 문화적이고 정치적 아교가 되었는지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정치를 다룬 다음 구색 맞추기 식으로 등장하는 문화나 사회, 예술이 아닌 것이다.
프로이센을 만든 것들
저자는 프로이센을 설명할 때 언제나 등장하는 단어들, 경건주의, 고루하며 근대화의 훼방꾼 융커 계급, 군국주의와 권위주의, 엄격하고 효율적인 행정 등을 피상적으로 정의하거나 반박하지 않는다. 대신 이 단어들에 얼마나 복잡한 역사적 의미와 다양한 형태들이 있었는지를 독자들에게 펼쳐 제시한다. 예를 들어, 경건주의 프로테스탄트는 사회 복지의 한 양태이기도 했고, 권력을 강화하기도 약화하기도 했으며, 국제 질서 내에서 어떤 작용을 했는지 짚어나간다. 독일의 근대사가 어긋나게 한 주범으로 꼽히는 융커 계급을 서술하는 방법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통념에 반대해 융커를 구원하려 하거나 상투적인 설명에 기대지 않는다. 당대의 문헌을 통해 지주와 소작인, 젠더, 도시와 시골 사이에서 융커라 불린 사람들이 어떤 이들이었고, 어떤 역할을 했는지 보여준다. 프랑스발 혁명에 맞서 행정을 강화해나간 추이를 추적하는 대목도 다르지 않다. 저자는 프로이센 국가가 의기양양하게 특정한 종류의 근대화 모델이 되었다고 선언하게 되는 과정을 좇아가지만, 동시에 당대 식자층이 품은 국가의 권위와 숭고함이 대다수 백성의 삶과는 거의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는 점을 잊지 않고 지적한다.
히틀러라는 함정과 프로이센의 종말
프로이센은 독일 통일을 견인했지만, 역설적이게도 통일과 함께 소멸의 길을 걷는다. 독립 국가가 아니라 통일 독일의 주로 격하된 것이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1947년 연합군 점령 당국은 프로이센이 전쟁을 일으킨 독일 내 주범으로 지목당해 프로이센 주와 그 중앙정부, 그리고 그 정부기관은 프로이센이라는 이름과 함께 모두 폐지된다. 『강철왕국 프로이센』의 후반부는 이 장대한 몰락의 서사를 그린다. 저자는 바이마르 공화국과 나치의 집권, 독일의 패전으로 이어지는 이 혼란스러운 역사 속에서 프로이센과 프로이센 사람들의 역할은 무엇인지 냉철하게 추적한다. 프로이센 행정부와 군사조직이 왜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도 살아남을 수밖에 없었는지,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뮌헨에서 기반을 닦은) 히틀러와 나치가 프로이센의 유산을 어떻게 이용했는지,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로이센 출신 장교들이 어떻게 저항했는지를 서술함으로써, 저자는 비스마르크를 히틀러와, 프로이센을 나치와 곧장 연결하는 것이 얼마나 역사를 납작하게 만드는 것인지를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애도와 찬양을 넘어
저자는 자신이 호주 출신으로 케임브리지 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기에, 프로이센의 기록을 다루면서 선악을 나누거나 그 경중을 가리지 않고, 교훈이나 정치적 조언을 전할 부담 없이 프로이센의 기록을 애도 또는 찬양해야 할 의무와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대신에 저자는 프로이센을 만들고 없인 힘들을 이해하고자 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야 그토록 위풍당당해 보였던 국가가 어쩌다 그렇게 급작스럽고 감쪽같이, 그 어떤 애도도 없이 사라지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1000쪽에 달하는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저자의 이 말을 온전히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