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가 발터 벤야민에게 보내는 가장 세밀한 러브레터
누군가의 전기를 쓰는 것은 그 사람에게 보내는 길디 긴 러브레터를 쓰는 것과 같다. 날카로운 관점을 유지하되 대상의 삶에 깊숙이 들어가 다양한 감정을 헤아리려는 정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의『발터 벤야민:1892-1940』도 그렇다. 어쩌면 둘의 만남은 예견된 것일지도 모른다. 두 사람 다 유대인이었고, 세계 대전이라는 어두운 시대를 살았으며, 나치 독일로부터 도망쳐 고향을 떠났다. 그러나 한나 아렌트는 살아남았고, 발터 벤야민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어쩌면 한나 아렌트는 그에게서 자신을 보았기에 이러한 전기를 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발터 벤야민: 1892-1940』은 세심하고 다정하다.
벤야민은 자신의 삶을 “꼽추 난쟁이”가 따라다니는 삶이라 묘사했다. 그는 독일인이지만 파리에 친근감을 느낀 이방인이었고, 그 무엇으로도 분류되지 않고, 당시 학계로부터 인정받지도 못했다. 한나 아렌트는 어디에도 닻을 내리지 못한 발터 벤야민의 불운한 삶을 “꼽추 난쟁이”를 소환해 그린다. 살아있을 때, 소수에게만 인정받은 그의 삶은 불운으로 얼룩덜룩하다. 이러한 벤야민의 불운, 운명은 그의 위치와 긴밀하게 얽힌다. 벤야민이 “발 디딜 어떤 확고한 기반을 얻기 위해 적응하고 협조하려고 노력할 때마다, 일은 반드시 잘못되었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에도 그는 학계와 등진 채 교수직을 얻지 못한다. 파리로 이주했으나 곧장 가난과 나치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되었고, 안전한 곳을 찾아 파리를 떠나지만 그가 향한 곳은 “전투 없는 전쟁 기간 동안 프랑스에서 심각하게 위험”했던 몇 안 되는 장소였다.
미국으로 이주하려던 벤야민이 프랑스-스페인 국경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 마지막 순간을 아렌트는 이렇게 말한다. “오로지 이날만 재앙이 가능했다.” 살아서 벤야민은 그 어디에도 자리를 잡지 못했지만, 사후에 “위험을 무릅쓰고 그 시대의 가장 노출된 위치로 나아갔으며 고립이라는 충분한 대가를 치른 소수의 사람들” 중 하나로 판명 난다. 아렌트는 벤야민의 위치에 “문인”이라는 역사적 명칭을 부여하여 그를 몽테뉴, 파스칼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한나 아렌트는 벤야민이 얻게 된 사후의 명성에서부터 글을 시작해 그의 삶을 세 부분(「꼽추」, 「어두운 시대」, 「진주 잠수부」)으로 나누어 그린다. 벤야민의 삶 어디에서든 “꼽추 난쟁이를 발견”하는 아렌트는 그의 삶만큼이나 그의 사유방식도 세밀하게 들여다본다. 젊은 벤야민에게 결정적 경험이었던 파리 경험을 고려해야만 벤야민 저작에서 소요객이 왜 핵심 형상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아렌트는, 벤야민의 사유와 저작들을 벤야민의 삶, 경험, 관계, 당시 독일유대계 사회 분위기·관습 등과 등고선처럼 연결하면서 그려 보인다.
특히 아렌트는, 흔히들 간과하는 벤야민의 ‘은유적 사고’에 주목하며, 아렌트는 벤야민이 “철학자가 아니라 시인”을 통해서, 철학을 공부했지만 “거의 전적으로 시인과 소설가들에게 자극을 받았다”고 얘기한다. 아도르노가 벤야민이 [사회연구지]에 기고한 보들레르 글을 거부한 이유였던 은유적 사고를, 아렌트는 벤야민이 남기고 간 선물로 여기며, 이 글에서 벤야민이 “시적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보여” 주려 한다. 또한 아렌트는 벤야민의 시적으로 생각하기와 인용 수집을, 진주와 산호를 캐내어 수면으로 옮기기 위해 바다 밑바닥으로 내려가는 “진주 잠수부”로 명명하며 의미를 부여한다.
복잡한 문장, 시적 은유가 담긴 한나 아렌트의 문장을 한국어로 옮기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발터 벤야민』은 아렌트가 보여주려 한, 벤야민의 은유적 사고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이성민 역자는『발터 벤야민』의 영어본과 독일어본을 꼼꼼히 대조하면서 한나 아렌트의 문장들을 하나하나 섬세하게 되살려낸다. 번역은 정확한 독서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역자의 번역관은 손쉽게 읽어낼 수 없는 한나 아렌트의 세밀한 생각들을 선명히 드러내준다. 단 하나의 문장, 어구, 표현도 쉽게 흘려 생각하지 않은 세심함이 담긴 번역 문장들은 독자들에게 벤야민처럼, 아렌트처럼, 시적으로 생각해보라고 권하는 듯하다.
또한 역자는 아렌트가 풍부하게 인용하고 있는 벤야민 글들의 한국어본 출처를 하나하나 밝혀 독자들을 이후의 독서로 안내하며, 본문만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부분들에 상세한 주석을 달아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아직 번역되지 않은 벤야민 서간집의 경우 주석으로 날짜와 수신인을 밝혀 더 관심 있는 독자들이 서간집의 영역본을 참조할 수 있도록 했다. 발터 벤야민을 알아가려 하는 독자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