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농민 아닌 소외된 지방 지배층이 주도
북부 지역 지배층은 남부 지역 지배층보다 더 많은 급제자를 배출했으나 북부 출신은 당상관직에 오르는 통로인 홍문관원에는 한 명도 임명되지 못했다(77쪽). 반란에 중요한 지원을 제공한 부류는 이들 지역 양반이었다. 흉년과 가혹한 조세에 시달린 농민들은 금광 개발 소문에 혹해 가담했을 뿐 자발적으로 반란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패배를 예상하자마자 반란군에서 도망쳤다.
원인과 성격-계급투쟁 성격은 약해
지도자와 일반 병사를 포함한 반란세력은 자신들을 특정한 경제적 계급이나 사회적 신분집단의 대표자라기보다는 북북 사람으로 여겼다(295쪽). 지도부의 한 사람이었던 김사용이 선천의 부유한 향인 계항대에게 돈과 곡식을 내놓으라 윽박질렀지만 이는 기본적으로 반란자금을 확보하려는 것이었지 향촌의 부자를 응징하려는 것이 아니었다(239쪽).
이념-천명사상과 풍수설의 복합
풍수설과 예언은 대중의 지원을 동원하고 반란을 정당화하는 데 중요한 정치적 도구였다. 홍경래와 우군칙 같은 핵심 지도자가 지관이었을 뿐 아니라 왕조 교체에서 풍수설과 예언적 신앙은 동조자를 모으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157쪽). 홍경래 난을 포함해 수많은 모반에서 나타난 대로 최고지도자를 ‘정진인鄭眞人’이나 그저 ‘진인’이라고 부른 표현은 《정감록》의 예언에서 가져온 것이 분명하다.
좌절-지역차별론의 한계
평안도 차별이란 이슈는 다른 신분의 사람을 같은 깃발 아래 모이게 하는 이념적 이유도 제공했다(295쪽). 그러나 동시에 특정 지역에 국한됐다는 불만의 본질은 지역적 경계를 넘어 좀 더 넓은 범위의 불만 세력에게서 지원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크게 약화시켰다(300쪽). 그 결과 반란 지도자들은 황해도에서 무예에 뛰어난 소수의 인물과 서울의 첩자 몇 명을 빼면 청북 지역 바깥에서 중요한 지원을 얻지 못했다(202쪽). 지역적 충성을 넘어서는 데 실패한 운동은 어느 것이든 끝내 실패한다는 사례를 넘어서지 못한 것이다.
영향-사회적 차별은 여전
반란 이후 평안도의 친정부적 지배층은 재정적(관군의 작전에 기부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그들이 받은 면세 때문에)ㆍ사회적(그들이 새로 받은 관직ㆍ품계ㆍ칭호에 수반된 특권과 높아진 위신 때문에)으로 번영하게 됐다. 반란 이후 1894년(고종 31) 문과가 폐지될 때까지 문과에 급제한 지역 지배층이 늘어난 것도 이 집단이 안녕을 누렸음을 보여주는 증거다(304쪽). 그렇긴 해도 조정의 차별적 승진제도 등 평안도 출신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20세기 초까지 지속됐다(283쪽).
책은 반란의 정치ㆍ경제ㆍ사회적 원인과 배경을 찬찬히 살핀 1부와 참여 인물들의 면면과 반란의 경과를 추적한 2부로 구성되어 있다. 덕분에 홍경래 난의 입체적 조망이 가능하다. 적폐 청산과 개혁을 통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가 시대의 화두다. 왕조 교체를 꿈꿨던 서북인들의 반란을 새삼 뜯어보는 것이 의미가 없지 않은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