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사전이 맹랑하고
박일환의 탐방이 맹랑하고
앞일이 맹랑하다
―그리고 재미있는 낱말들의 풍경과 속사정,
덤으로 훌륭한 공부의 길잡이
맹랑(孟浪)하다: 「형용사」 (1) (무엇이) 생각과는 달리 이치에 맞지 않고 매우 허망하다. (2) (사람이나 그 언행이) 함부로 얕잡아 볼 수 없을 만큼 깜찍하고 당돌하다. (3) (일이) 처리하기가 매우 어렵고 곤란하다. 『고려대한국어대사전』의 뜻풀이다. 30년 동안 국어교사 생활을 했던 시인이자 소설가 박일환이 여러모로 ‘맹랑한’ 책을 썼다.
‘봄볕’과 ‘가을볕’은 붙여 쓰고 ‘겨울 볕’은 띄어 써야 한다?―맹랑한 국어사전이로고!
이를테면, ‘저물녘’은 합성어로 인정하여 붙여 쓸 수 있지만, ‘해질녘’과 ‘석양녘’은 띄어 써야 한다(『표준국어대사전』). ‘봄볕’과 ‘가을볕’은 한 낱말로 인정하지만, ‘겨울볕’은 인정하지 않는다. ‘거ㅣ시기’는 표준어인데 ‘머시기’는 방언이다. ‘알타리무’는 안 되고 ‘총각무’, ‘오돌뼈’가 아니라 ‘오도독뼈’, ‘꼼장어’가 아니라 ‘곰장어’로 써야 한다.
맹랑하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은 표준어와 비표준어를 가르는 기준이 명확하지 않고, 부정확하거나 불충분한 낱말풀이를 버젓이 달아 놨다. 쓰임새가 거의 없는 일본식 용어가 지나치게 많이 실려 있는 데다가, 사용자들의 언어생활을 반영하거나 말글살이의 영역을 넓히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낱말의 실제 쓰임새를 중시하는 『고려대한국어대사전』 역시 개선해야 할 점이 많다.
사전에 있어야 할 말이 없는 반면, 없어도 되는 말은 너무 많다. ‘전선병’, ‘일기병’, ‘학교병’, ‘관찰포장’, ‘사고경성’, ‘조방적양식’ 같은 낱말들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모두 일본에서 건너온 용어들이다. 언어순혈주의를 고집할 필요는 없지만, 국어사전에 일본에서 들어온 한자어를 무분별하게 싣는 건 문제가 있다.
국어사전 편찬자들은 쓰임새가 거의 없는 용어들을 포용하는 데 열심이면서도, 우리말을 풍부하게 하는 낱말을 되살리려는 고민이 부족하다. 『고려대한국어대사전』에만 실린 ‘숨비소리’나 〈우리말샘〉에 있는 ‘해루질’처럼 방언으로 분류되기 아까운 낱말들을 표준어로 인정한다면, 언중은 지금보다 훨씬 풍요로운 언어생활을 누릴 수 있지 않겠는가. 국어사전이란 편찬자들이 만든 말을 언중이 배워서 쓰도록 하는 게 아니라 언중이 쓰는 말을 편찬자가 찾아서 제 표기와 뜻에 맞도록 설명해 주는 게 ‘존재의 이유’다.
“어이쿠, 개-나으리가 많이 피었군”―맹랑한 탐방에서 거둔 열매들
저자 박일환은 그동안에도 『미친 국어사전』, 『국어사전 혼내는 책』 등을 통해 국어사전을 비판하고 대안을 모색해 왔다. 국어교사였고 시인, 소설가인 그는 여전히 국어사전을 벗 삼아 살고, 낱말들의 풍경과 속사정을 살피고 더듬는 그의 탐방은 맹랑하다.
어느 기자 이름이 눈에 띄어 ‘혼잎’을 검색해 보다가, ‘혼잎나물’이 ‘회잎나물’과 동의어고 “봄에 화살나무의 새순을 꺾어서 데친 다음 무쳐 먹는 나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음엔 자연스레 다른 나물의 이름으로 나아가는데, ‘참메늘치’는 “지리산에서 주로 나는 멧나물의 하나”라고만 풀이되어 있다. 궁리 끝에 ‘참’이 식물 이름에 흔히 붙는 접두어, ‘메늘’은 ‘며느리’를 이르는 남쪽 지방 말이라는 걸 풀고, ‘참메늘치’가 ‘며느리취’와 같은 말이라는 데에 이른다.
‘신이화(辛夷花)’는 ‘개나리꽃’의 비표준어인데, 일화가 흥미롭다. 독립운동가 월남 이상재 선생이 친일파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런 말을 꺼낸 적이 있다고 한다. “에이쿠, 신이화가 많이 피었군.” 신이화는 개나리를 가리키고, ‘나리’는 ‘나으리’다. 개 같은 나으리들이 많이도 모였던 것이다.
제대로 된 국어사전을 만들려면 아마도 완전히 갈아엎어야 할 테니, 맹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맹랑한 탐방은 어디선가 그 맹랑한 일로 이어질 것이다. 저자에게는 또 “부실한 국어사전이 역설적으로 내 공부의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저자는 언젠가 잘못을 지적하는 ‘맹랑한’ 탐방기가 아니라 ‘명랑한’ 탐방기를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