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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시집

정지용 시집

  • 정지용
  • |
  • 범우사
  • |
  • 2020-10-12 출간
  • |
  • 198페이지
  • |
  • 111 X 175 X 16 mm / 177g
  • |
  • ISBN 9788908063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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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 정지용론 - 청신한 감각과 순백의 내면 공간
(정지용의 생애와 작품세계)

정지용은 1902년 음력 5월 15일 충청북도 옥천군 하계리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시 〈향수〉에서 나오는 것처럼 넓은 벌에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황소가 게으른 울음을 우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에서 성장하였다. 아홉 살 때인 1910년 4년제 과정인 옥천공립보통학교(현재 죽향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에 졸업하였다. 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3년에 결혼을 하였는데 이때 그의 나이 12세였고 부인도 그와 동갑인 12세였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지용은 그 이듬해에 서울로 올라와 처가의 친척집에 기숙하면서 여러 가지 일을 하다가 1918년 4월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휘문에 입학하자마자 문재를 발휘하여 1학년 때부터 《요람》이라는 등사판 동인지를 내는 데 참여하여 작품을 발표하였고 선후배들이 함께 참여하는 ‘문우회’ 활동에 동참하여 문학에 대한 자극을 얻었다. 그는 이러한 문학적 분위기를 최대로 흡수하면서 시인으로서의 자기 성장을 도모했다.
1923년에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졸업생 장학금을 받아 일본 경도의 동지사대학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우리가 잘 아는 시 〈향수〉를 썼다. 1923년 5월부터 1929년 6월까지 경도에서 유학하게 되는데 영문학과에 재학 중이던 1926년 6월 경도 유학생들의 학회지인 《학조》 창간호에 시조 9수, 동요 형식의 시 6편, 현대적 감각의 시 3편 등 많은 작품을 한꺼번에 발표함으로써 등단하게 되었다. 지용은 이 시기에 다양한 문학 체험을 얻고 작품 발표의 기회도 얻어 시인으로서 이름을 세상에 알린 반면, 개인적으로는 혈육의 죽음이라는 불행을 겪었다. 이때 가톨릭에 입교하게 되는데, 그의 딸아이를 잃은 데다가 아들 구관이 태어나자 마음의 다짐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에서 입교했던 것 같다.
동지사대학을 졸업하고 1929년 9월 1일자 모교인 휘문고보의 영어교사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그의 수업은 학생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정규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한 실력 있는 영어교사였고 학생들의 선배였으며 무엇보다도 시인이라는 점이 학생들에게 어필했을 것이다.
1930년 이후 정지용은 국내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문단 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시문학》 동인들과도 어울리고 문학좌담회에도 참석하면서 그 특유의 재치 있는 언변을 휘날렸다. 160센티미터가 안 되는 작은 키에 두터운 안경을 끼고 약간 앞니가 버드러진 입으로 독설과 야유를 총알처럼 날렸다. 그의 음성은 가늘게 떨리는 듯한 낭랑한 음조로 시 낭송에 적합하여 그가 시를 읊으면 좌중이 모두 매료되었다고 한다.
1935년 10월에는 시문학사에서 《정지용 시집》이 간행되었다. 일찍이 《시문학》에 시를 내준 인연을 소중히 여긴 박용철이 정성을 다하여 호화로운 한 권의 시집을 엮어낸 것이다. 지용의 시집이 간행되자 많은 사람들의 찬사가 쏟아져 나왔다. 문단의 시선은 온통 정지용에게 집중되며 정지용은 명실공히 30년대 최고의 시인으로 부상하게 된다.
1939년 2월에는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잡지 중 가장 격조 높은 문예지로 평가되는 《문장文章》이 발간되는데, 정지용은 이 잡지의 시 부문 추천위원을 맡게 된다. 그는 될 수 있는 한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공정하게 신인을 추천하였다. 그의 추천을 받고 나온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박남수 등의 시인들은 해방 후 한국 시단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 이것은 시를 보는 지용의 안목이 정확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일제 말 문학정신의 마지막 기둥 노릇을 했던 《문장》은 1941년 4월 총 25호를 종간호로 내고 폐간된다. 그것은 문학지를 하나로 통합하여 일본어로만 간행하겠다는 총독부의 압력에 의한 것이었다. 폐간의 아쉬움을 시집 간행으로 메우려는 듯 그는 1941년 9월 두 번째 시집 《백록담》을 간행하였다. 시 작품은 25편밖에 되지 않아서 시집 한 권의 분량으로는 조금 부족했지만 시간이 더 흐르면 한글로 작품을 발표하는 것이 불가능하리라는 예감 때문에 시집 간행을 서둘렀을 것이다.
일제의 강압에 의해 조선어 사용이 금지된 이후 그는 단 한 편의 글도 일본어로 쓰지 않았고 발표하지도 않았다. 글 쓰는 사람에게는 절필이 무엇보다도 고통스러운 일일 터인데 그는 일제 말 암흑의 3년을 침묵으로 견뎌냈다. 1943년 폭격에 대비한 서울 소개령으로 그는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해방이 되자 정지용은 16년간 근무하던 휘문고보를 떠나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였는데 여전히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좌파 문학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에 정지용의 이름이 아동문학 분과위원장으로 올라 있었으나 그는 이 단체가 주관하는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들 단체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정지용의 이름이 필요했던 것이다.
1946년 10월 정지용은 가톨릭 계열의 신문사인 경향신문의 주간으로 취임하게 된다. 천주교 신자이고 과거에 《가톨릭청년》이나 《경향잡지》의 편집을 맡은 경력이 있기 때문에 천거된 것 같다. 주간으로 있으면서 그는 사설난 등에 많은 글을 집필하였는데, 그의 사회 현실에 대한 시각은 좌파적이라기보다는 평범한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다만 한민당에 대해서는 부정적 시각을 뚜렷이 드러냈다. 그가 쓴 논설문이 극우계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반발을 사게 된 것도 한민당에 대한 부정적 시각에 기인한 것이다. 당시의 경직된 풍토는 그의 현실 비판적 태도를 좌경적 태도로 오인케 했고 결국 그는 좌익이라는 부당한 투서를 받게 되었다.
이런 문제 때문에 그는 1947년 8월 경향신문사 주간직을 사임하고 그 이듬해에는 집도 돈암동에서 녹번리의 초당으로 옮기게 된다. 겉으로는 한가한 전원생활을 하는 것 같았지만 그의 내면은 허탈감과 번민에 가득차 있었다.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 1)의 서문에서 그는 ‘재조도 탕진하고 용기도 상실하고 8·15 이후에 나는 부당하게도 늙어간다’고 탄식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친일도 배일도 하지 않았던 그는 이 시기에는 우익도 좌익도 아닌 중도파 지식인으로서 고뇌를 거듭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좌익 세력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가 행해졌다. 한때 본의 아니게 조선문학가동맹에 이름이 등재된 것, 《경향신문》 주간으로 있을 때 한민당에 대한 비판적 논설로 좌경인물로 몰린 것, 가까이 지내던 문인들이 월북해 버린 것 때문에 그도 몇 차례의 조사를 받았고, 좌익 경력 인사들의 사상적 선도를 명분으로 내세우고 결성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모두가 민족의 분단이라는 모순된 현실이 빚어낸 개인적 진실의 왜곡이며 굴절인 것이다.
6·25가 발생하여 서울이 점령당했을 때 정지용은 피난을 가지 못하고 녹번리 초당에 머물고 있었다. 7월 어느 날 안면 있는 젊은이 몇 명이 찾아와 대화를 나누다가 그들과 함께 나간 후 그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어지럽게 엇갈려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실제로 자신이 목격한 사실을 말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들은 내용을 옮긴 것들이어서 신빙성이 없다.
우리에게 가장 확실한 것은 그가 6·25 때 행방불명되었다는 사실이며 더욱 중요한 것은 행방불명의 그 순간까지 우리 시단에 가장 영향력 있는 시인으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이 뛰어난 시인을 잃은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민족 분단의 비극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실종과 희생은 그 시대를 살았던 우리 민족 모두의 책임으로 돌려야 한다. 우리는 이 엄연한 사실 앞에 머리 숙이고 숙연해져야 할 것이다. 민족 비극의 포연 속에 그의 삶은 실종되고 말았지만 그의 시가 주는 감동은 먼 훗날까지 유구하게 전해질 것이다.


초기 시와 시 의식의 형성
정지용의 시작 단계를 시의식의 형성 과정과 관련지어 구분하면, 1922년 휘문고보 재학 시절부터 일본 유학 시절까지를 제1시기, 1929년 귀국 이후 1935년 《정지용 시집》을 간행할 때까지를 제2시기, 《정지용 시집》 간행 이후를 제3시기로 나누어 각각 전기 시, 중기 시, 후기 시로 설정할 수 있다.
창작시점으로 볼 때 가장 최초의 작품에 해당하는 〈풍랑몽〉은 1922년 3월에 쓴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작품의 실제적인 발표는 1927년 7월 《조선지광》을 통해 이루어졌다. 같은 지면에 〈풍랑몽〉 외에도 〈발열〉과 〈말〉이 실려 있다.
〈풍랑몽〉은 졸업과 새로운 진급이 교차하는 3월의 어느 날 마포 하류의 물가에서 주체할 길 없는 외로움을 표현한 작품이다. 그로부터 일 년 후에 정지용은 작품 〈향수〉를 썼다. 이 작품 역시 《조선지광》에 발표되었다. 이 두 편의 작품에서 우리는 20대 초반의 젊은이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그리움과 갈구의 심정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일본 유학을 떠난 후 경도에서 쓴 첫 작품은 〈압천〉이다. 이 시는 1927년 6월 《학조》에 발표되었다. 그 후 1930년 3월, 《시문학》 창간호에 〈경도 압천〉이라는 제목으로 재발표되었으며, 《정지용 시집》에 다시 〈압천〉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다. 이 시의 화자는 압천 십리벌에 해가 저무는 장면을 배경으로 날마다 님과 이별하는 여울물의 모습을 통하여 자신의 비애감과 고독감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러한 비애감을 표현하면서 오렌지라는 익숙한 영어 대신에 ‘오랑쥬’라는 불어를 사용한 데는 경도 유학생으로서의 우월감과 지용 특유의 이국정조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국정조도 일본 유학을 하는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고독감이나 공백감에서 나온 것일 공산이 크다. 요컨대 이 시에서 조국을 떠나 만리타향 낯선 곳에서 학업을 꾸려가는 스물두 살 젊은이의 고독과 우수, 그 내면에 담겨 있는 지식인으로서의 서구 취향과 이국정조를 엿볼 수 있다.
다음 단계의 시는 시인의 자전적 독백성을 극복하고 하나의 작품으로서 완성도를 높이려는 시도를 보이고 있다. 말하자면 시인으로서의 자각을 가지고 창작에 임하게 된다. 대상의 감각적 인식에 의한 시창작의 첫 단계를 장식한 작품은 〈이른 봄 아침〉(《신민新民》, 1927. 2)이다. 봄의 연상 작용을 통하여 봄의 속성이 더욱 선명하게 부각되고 결과적으로 이른 봄이 어떠한 정취와 의미를 지닌 것인지 분명해진다.
1926년 여름 그는 바다와 관련된 두 편의 시, 〈갑판 위〉(《문예시대 1》, 1927. 1)와 〈선취〉(《학조 2》, 1927. 6)를 썼다. 이 두 편의 작품은 개인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시적 감각의 객관적 정조에 의해 긴장감이 유지되어 있다. 〈선취〉가 형식의 정형성을 고수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데 비해 〈갑판 위〉는 형식이나 표현에 있어 자유로운 면모를 보이고 있다. 〈선취〉도 그렇지만 이 당시 바다를 소재로 한 작품에는 고독의 감정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바다의 탁 트인 공간성이 시인의 마음을 드넓게 넓혀줌으로써 경도 압천의 웅크리고 있던 시인의 자아가 활력을 얻은 것인지도 모른다.
〈발열發熱〉(《조선지광》, 1927. 7)과 〈태극선太極扇에 날리는 꿈〉(《조선지광》, 1927. 8)은 지용의 개인사가 시작의 모티프로 작용하고 있다. 〈발열〉은 아이가 병 들어 열이 오르고 ‘애자지게 보채는’ 모습을 지켜보는 아버지의 안타까움을 나타낸 시다. 개인사를 드러내면서도 정제된 시 형식으로 압축적으로 표현하여, 〈유리창〉에 버금가는 절제의 미학을 보여준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중기 시와 주제의식의 심화
1929년 6월 동지사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한 지용은 그해 9월부터 모교인 휘문고보의 영어 교사로 부임하게 된다. 옥천의 가족도 서울로 이주하여 본격적인 서울 생활을 시작하면서 문인들과도 활발한 접촉을 갖는다. 졸업과 취업, 가족을 솔거한 서울로의 이사 등 분주한 생활이 어느 정도 정돈되고 일 년여의 침묵 끝에 그가 발표한 작품이 〈유리창〉이다. 이 시는 시인이 자식을 폐렴으로 잃은 후 그 안타까운 심정을 노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리창 1〉과 〈유리창 2〉 두 편의 작품은 유리창을 경계로 외부와 내면이 단절된 상태에서 시적 자아의 외로움과 괴로움을 나타낸다는 공통점이 있다.
개인의 비극에서 비롯된 이러한 자아의 괴로움은 그로부터 몇 년 후 《가톨릭청년》(1935. 3)에 발표된 〈홍역〉과 〈비극〉에 다시 시의 소재로 등장한다. 이렇게 자신의 개인적 비극이 투영된 시 작품을 일부 발표하면서 지용은 자신의 장기인 대상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새로운 스타일의 시를 계속 발표하여 한국 시단에서 독자적 시인으로서의 입지를 굳혀 갔다. 《시문학》 2호(1930. 5)에 발표한 〈바다 1〉은 지용의 청신한 감각을 잘 보여준다.
이 시 외에도 〈아침〉(《조선지광》, 1930. 8) 〈절정〉(《학생》, 1930. 10.) 등에는 감각적 특성이 잘 발휘되어 있다. 전기 시와 후기 시의 경계 노릇을 하면서 지용의 예민한 감각의 촉수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작품이 〈난초〉(《신생》, 1931. 12)다.
변화의 징후는 〈비로봉〉(《가톨릭청년》, 1933. 6)에서 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난초〉에서는 대상을 감각적으로 바라보고 대상의 외면을 즉물적으로 형상화하여 내면의 깊이를 파고들지 못한 한계는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동양적 정신세계로 눈을 돌리고자 하는 의식의 일단을 드러냈다면, 〈비로봉〉에서는 응축되어 있는 정신의 표상을 탐색하는 듯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정적의 공간에 관심을 갖는 것은 정적과 부동의 공간성을 보이는 그의 후기 시, 소위 ‘은일의 정신을 보이는 산수시’의 세계와 통한다. 한편 그의 장기인 감각의 청신함은 유지하고 있다.
당시 지용의 시에는 그러한 생활인의 고독과 비애를 표현한 작품이 다수 등장하고 있다. 〈시계를 죽임〉 〈귀로〉 등이 그것이다. 개인적 비극 체험이 내면의 막연한 불길함으로 정착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계기를 마련하지 못한 채 고독과 우수 속에 살아가는 예민한 시인의 행보를 본다. 아마도 이러한 비애와 고독이 그를 가톨릭으로 점점 더 몰입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정지용 시집》 4부에 수록된 9편의 시들은 신앙과 직접 관계가 있는 것들로 대부분 《가톨릭청년》을 통해 발표된 것들이다. 〈별〉이라든가 〈은혜〉 〈불사조〉 같은 시를 보면 현실의 체험에서 오는 고통과 비애가 신앙의 바탕이 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정지용의 신앙은 개인 영혼의 구원이라든가 대중적 복음의 전파라는 측면보다는 현실적 고통, 개인적 비애의 정화라는 선상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시 창작을 통하여 과감하게 일상성을 시에 끌어들임으로써 시의 영역을 확대하고 문학적 엄숙주의를 해체하는 역할을 했다. 정지용은 초기에는 고유어와 방언과 한자와 외래어를 다채롭게 구사하여 시를 쓰다가 뒤로 갈수록 고어를 발굴하여 시어로 적극 활용하였다. 이러한 시어의 변화는 시인의 의식의 변화를 그대로 반영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지용은 고유어의 선택 및 그 적용에 의해 한국 시의 독특한 경지를 열어 보였고 그런 작업을 통하여 시어를 확장하고 개척하는 문학사적 과업을 수행하였다.
정지용의 시는 생경한 관념의 표백이 아니라 정경의 함축을 통하여 자신이 추구하는 정신세계를 표현하였다는 점에서 한국 시의 내면을 풍요롭게 했을 뿐 아니라 방법상의 새로움을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의 시 창작 공간에서 이러한 사유와 표현의 유려한 결합을 보여준 시인은 매우 드물다. 정지용의 시는 그러한 문학사적 위상에 더욱 생생한 빛을 발한다.

- 이숭원(문학평론가 · 서울여대 교수)


목차


정지용鄭芝溶론 · 9

바다 1 · 21
바다 2 · 24
비로봉 · 26
홍역 · 28
비극 · 29
시계를 죽임 · 30
아침 · 32
바람 · 34
유리창 1 · 35
유리창 2 · 36
난초 · 38
촉불과 손 · 40
해협 · 42
다시 해협 · 44
지도 · 46
귀로 · 47
오월 소식 · 48
이른 봄 아침 · 50
압천 · 52
석류 · 54
발열 · 56
향수 · 57
갑판 위 ·59
태극선 · 61
카페·프랑스 · 63
슬픈 인상화 · 65
조약돌 · 67
피리 · 68
달리아 · 69
홍춘 · 71
저녁 햇살 · 72
벚나무 열매 · 73
엽서에 쓴 글 · 74
선취 · 75
봄 · 76
슬픈 기차 · 77
황마차 · 81
새빨간 기관차 · 84
밤 · 85
호수 1 · 86
호수 2 · 87
호면 · 88
겨울 · 89
달 · 90
절정 · 92
풍랑몽 1 · 94
풍랑몽 2 · 96
말 1 · 97
말 2 · 100
바다 1 · 102
바다 2 · 103
바다 3 · 104
바다 4 · 105
바다 5 · 106
갈매기 · 108
해바라기 씨 · 110
지는 해 · 112
띠 · 113
산 너머 저쪽 · 114
홍시 · 115
무서운 시계 · 116
삼월 삼짇날 · 117
딸레 · 118
산소 · 119
종달새 · 120
병 · 121
할아버지 · 122
말 · 123
산에서 온 새 · 124
바람 · 125
별똥 · 126
기차 · 127
고향 · 128
산엣 색시 들녘 사내 · 129
내 맘에 맞는 이 · 131
무어래요 · 133
숨기 내기 · 134
비둘기 · 135
불사조 · 136
나무 · 138
은혜 · 139
별 · 140
임종 · 141
갈릴레아 바다 · 143
그의 반 · 145
다른 하늘 · 146
또 하나 다른 태양 · 147
파충류 동물 · 148
‘마음의 일기’에서 · 150
옛이야기 구절 · 153
우리나라 여인들은 · 155
바다 1 · 158
바다 2 · 159
승리자 김안드레아 · 160
천주당 · 166
도굴 · 167
창 · 168
이토 · 170
그대들 돌아오시니 · 172
애국의 노래 · 175
곡마단 · 177

사사조四四調 오수五首
늙은 범 · 181
네 몸매 · 182
꽃분 · 183
산달 · 184
나비 · 185

작가 연보 · 186
작품 연보 ·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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