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용과 항주의 세 선비, 고도의 지적 대화를 나누다
한중일 학계를 통틀어 항주 세 선비의 가계와 학맥에 대한 최초의 연구
조선 후기 실학사상과 실학자들에 대한 연구는 학계의 레드오션이라 할 정도로 많은 학자와 연구 성과들이 축적되어 있다. 홍대용과 박지원이 대표적인 연구 대상인데, 그간 홍대용을 연구한 국내 대다수의 학자들은 항주 세 선비의 존재를 알지만 연구 대상에서 제외하거나 혹은 수준 낮은 시골 선비 정도로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이 나고 자란 항주는 당시 중국에서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가장 발달한 강남 지방의 대도회였으며, 양명학과 고증학, 금석학, 문자학, 서지학 등 다양한 학문이 만개한 곳이었다. 더구나 이들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절강 향시를 통과해 북경으로 올라온 엘리트 지식인이었다. 1만 수천 명에 달하는 수험생 중 94명을 선발하는 절강 향시에서 육비는 1등으로 합격하여 ‘해원’이 되었고, 반정균은 21등, 엄성은 69등으로 합격했다. 홍대용이 이들과 가까워진 계기는 실력 있는 학자이면서 동시에 이들이 과거 급제에 결코 연연하지 않으며 청조 치하에서도 옛 명나라를 잊지 않고 존모하는 고결한 인품의 소유자였다는 점 때문이었다. 홍대용은 이와 같이 비범한 중국 선비들과 깊은 우정을 맺고 당대 유행한 최신 학문까지도 두루 대화를 나누었다. 이 책에서는 육비와의 양명학 토론, 엄성과의 주자학 토론을 집중적으로 다루었고, 주자의 시경학에 대한 세 선비의 비판과 홍대용의 옹호, 주자의 주역관에 대한 견해 등을 정리했다.
홍대용과 항주 세 선비의 교유는 북경 여행의 하이라이트이면서 동시에 홍대용의 사상적 변화를 해명하는 관건이 된다. 이 책의 저자는 홍대용의 3부작 여행기 중 항주의 세 선비와의 교유 및 이들과 나눈 필담을 주로 기록한 『간정필담』을 집중 연구해 이들과의 고도의 지적인 만남을 다루었다. 뿐만 아니라 세 선비의 가계와 인맥, 스승 및 학문의 연원 등을 살펴 정리했다. 항주 세 선비에 대한 이처럼 자세한 연구는 이 책이 처음이다.
북경에서 귀국한 직후부터 거의 말년까지 홍대용이 청조 문인들과 주고받은 서신은 100여 편 이상이 현전하지만, 아직 제대로 연구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왕복 서신들을 주된 자료로 삼아 홍대용이 엄성·육비·손유의·등사민 등 청조 문인들과 나눈 일련의 학술 토론을 고찰해 본다면, 홍대용의 후반기 생애에 지속된 사상적 모색 과정을 규명할 수 있을 것이다.
‘대규모 세심법’, 북학파의 청 문물 수용 논리를 마련하다
북학사상 논리의 기반
홍대용은 여행 전에 자신보다 40~50년 앞서 북경을 다녀온 김창업과 이기지의 연행록을 숙지했으며, 여행 중에도 휴대했다. 중국 도처에서 김창업의 『연행일기』를 여행안내서 삼아 꺼내 보았고, 이기지의 『일암연기』도 초록해서 지니고 다녔다. 노론계의 학통과 인맥을 감안하면, 홍대용이 이 두 사람의 연행록을 익히 보았을 뿐만 아니라, 이 이 두 사람의 연행록과 홍대용의 여행기가 많은 공통점을 보여 주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당시 조선에서는 반청(反淸) 감정이 여전해서 연행을 간 조선인이 청나라 관원이나 문사들과 사적으로 접촉하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는 풍조가 있었고, 홍대용은 여행을 다녀온 뒤에도 이 문제로 산림 학자 김종후와 반목하는 등 시달림을 당했지만, 그럴 때 홍대용은 김창업의 선례를 들었다. 자제군관 신분으로 여행에 나선 김창업도 이원영이나 마유병 같이 황제의 시위(侍衛) 벼슬을 한 만주인들과 거리낌 없이 교제했는데, 마찬가지로 자제군관의 신분인 자신이 중국인들과 사적으로 교유하는 것이 무슨 문제냐고 반문했다.
홍대용은 박지원을 상대로 북경 천주당의 파이프오르간에 대해 논하면서, 선배 김창업과 이기지가 탁월한 식견으로 중국을 잘 관찰하기는 했지만 이들의 연행록 중 천주당에 관한 기록만큼은 미흡한 점이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청나라의 발전상과 강희제의 업적을 예찬한 두 선배의 견해를 계승한 홍대용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강희제와 비교하여 옹정제와 건륭제의 사치를 비판했다. 저자는 청나라의 실정에 대한 관찰에서 홍대용의 북경 여행기가 김창업?이기지의 여행기와 뚜렷한 공통점과 아울러 그보다 진일보한 인식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홍대용은 청 문물을 한마디로 ‘대규모 세심법’이라 정의한다. 물론, 홍대용의 북경 여행 전후에도 청 문물의 광대하거나 정밀한 특징을 통찰한 사람들이 없지 않았지만, 홍대용은 풍부하고 다양한 견문을 바탕으로 청 문물의 근본 특징을 ‘대규모 세심법’이란 명제로 명확하게 요약했다. 그 이후 ‘대규모 세심법’은 북학파에게 청 문물을 파악하는 기본 틀로 받아들여졌다. 『열하일기』에서 박지원은 압록강을 막 건너 당도한 국경의 작은 고을인 책문의 번화함을 보자마자 홍대용이 말한 ‘대규모 세심법’을 상기했다고 한다.
홍대용은 청 문물이 실은 중화 문물이며, 『주례』에 구현된 ‘대규모 세심법’을 계승했다고 보았다. 중화 문물을 중국의 특정 왕조의 소산이 아니라, 고대의 성현들이 제작한 이상적인 문물제도로 인식한 것이다. 이와 같이 고대의 중화 문물을 보편적인 이상으로 설정하고 청 문물을 청 왕조와 분리하여 사고함으로써, 홍대용은 당시 조선의 지배적 이념이던 존명배청주의(尊明排淸主義)와 충돌을 피하면서 조심스럽게 청 문물 수용의 논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후 ‘대규모 세심법’은 실학을 추구하던 이들에게 주요한 논리로 받아들여지게 되고, 북학사상을 조선 땅에 전파할 단단한 기반이 되었다.
연암의 길에서 홍대용을 만나다
이 책의 저자 김명호 교수는 연암 박지원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손꼽히는 학자다. 정년퇴직을 즈음하여 저자가 필생의 과제로 삼은 ‘연암 박지원 평전’을 집필하던 중 ‘홍대용’이라는 큰 산을 만났다. 박지원이 삼십대 중반에 홍대용과 처음 우정을 맺고 그의 영향으로 북학사상을 품게 되는 대목에 이르러 그만 집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집필을 시작할 당시에는 홍대용에 관한 그간의 선행 연구를 바탕으로 이 부분을 순조롭게 쓸 것이라 예상했지만, 홍대용에 관한 많은 부분이 여전히 연구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박지원만큼 홍대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다면, 더 이상의 집필이 어렵다고 판단한 저자는 잠시 평전 집필을 멈추고 홍대용 연구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2015년부터 시작된 홍대용 연구는 5년의 시간을 기울인 뒤에야 결실을 맺게 되었다.
홍대용의 생애에서 북경 여행은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여행을 분기점으로 해서 그의 생애는 두 시기로 나뉘는데, 전반기가 북경 여행을 위한 오랜 준비 기간이었다면, 후반기는 여행 체험을 충실히 기록하고 주위에 전파하는 한편 여행 당시 교분을 맺은 청나라 지식인들과 서신 교류를 지속하면서 사상적 전환을 모색한 시기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홍대용의 가계부터 조부와 부친의 행적, 초년 시절의 홍대용부터 노년의 홍대용까지 전 생애를 정리했다. 특히 부친 홍역이 환곡의 가분 문제로 유배형에 처해진 것을 두고 탐관오리였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사건의 전말을 자세히 살펴 해명했다. 연암과 담헌의 관계를 왜곡하는 주장에 대해서도 북경 여행 이후 북학사상의 형성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던 부분을 별도의 장으로 정리했다. 북학파와 북학사상, 그리고 후세대 사람들에 미친 근대화의 영향까지 모두 한 책에서 다루었다.
이렇게 보면 이 책은 홍대용의 평전 같이 여겨지지만, 홍대용의 북경 여행이 그만큼 전 생애에 걸쳐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젊은 시절 혼천의 등 천문기구를 만들고 존명배청에 철두철미했던 젊은 홍대용을 설명해야 했고, 귀국 후 집필 작업과 이덕무 박지원 등 북학파 학자들의 반향을 설명해야 했다. 이처럼 저자는 홍대용의 북경 여행과 이 시기 항주의 세 선비와의 만남의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홍대용의 모든 것을 다루는 대작업을 했다.